2006년 8월 평화누리통일누리 제62호::: <참가기>대체 평화가 무어냐? 오키나와에서 만난 4박 5일간의 평화 --- 김슬기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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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기|
대체 평화가 무어냐?
오키나와에서 만난 4박 5일간의 평화
서울 평통사 김슬기
8월 16일(수) 첫째 날, 오키나와와 만나다
새벽 6시 30분, ‘평택에서 오키나와까지 평화기행단’은 인천공항에 모여 반갑게 수인사를 나눈 후 미국에 대한 테러위협으로 인해 까다로워진 검색을 통과하여 오키나와로 출발, 11시 30분 경 나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평화기행단은 평통사 최선희 교육국장을 단장으로, 평통사 회원사업팀 김현진 부장, 서울평통사 김슬기 홍보부장, 이낙호 선생님, 김경자 선생님, 평통사 노은아 회원, 부천 의제 21 이숙 사무국장, 평택참여자치시민연대 이은우 사무처장, 중학교 3학년 학생인 최지웅, 유재현, 이상휘, 고등학교 1학년 유준현, 성지수, 고등학교 2학년인 이아람 이렇게 열네 명으로 구성되었다.
공항에는 우후자토 교회 기요코 상, 통역을 맡아주신 히로유키 상과 토오코 상이 마중을 나오셨다. 히로유키 상은 기행단의 첫 방문지인 우후자토 교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오키나와 총인구는 약 130만 명이고, 160여개의 섬으로 이뤄졌으며, 유인도는 50여개에 이른다.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으로, 일본과는 다른 독립 국가였으나, 19세기 말 전쟁을 거쳐 강제로 일본에 편입되었다.’며 오키나와 역사를 간략하면서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우후자토 교회 부근의 아름다운 해변에서 잠시 동안 해수욕을 즐긴 기행단은 오후 8시부터 평택과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에 대한 브리핑, 참가자 소개 시간을 가졌으며, 주민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준비한 ‘평화가 무엇이냐(평택지킴이 조약골 님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배웠다.
8월 17일(목) 둘째 날, 우리의 하늘을 날지마라(Don't Fly Over Our City-U.S HELOS OUT NOW!)
우후자토 교회의 테히라 나쯔메 목사의 안내로 먼저 가가즈 고대공원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일본 군인들과 강제징용당하여 희생당한 분들을 위로하는 기념탑과 전망대가 있었다. 기념탑은 일본 우익 세력이 세운 것으로서, 조선에서 강제징용당한 사람들 중 남한 사람들만 언급하며, 일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희생된 동포들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후텐마 기지가 위치한 기노완 시청을 방문했다. 시청 옥상에 올라가니 옥상 바닥에 ‘Don’t Fly over Our City! U.S. Helos Out Now!(우리의 하늘을 날지 마라! 미군의 헬기는 당장 나가라!)’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이 구호는 아주 커다랗게 쓰여있어서, 후텐마 기지에서 뜨고 내리는 헬기가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했다.
기노완 시는 시장을 비롯하여 온 주민들이 후텐마 미군기지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시청의 기지 정책과에서 일하고 있는 야마꾸지 씨로부터 후텐마 기지 반환운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시청에 기지정책과를 두고 반기지 운동을 전개하다니… 미군기지 확장에 적극 나서고 있는 우리 정부와 비교되어 부럽기까지 했다.
후텐마 기지는 헬기 중심의 기지로 기노완 시 면적의 25%를 차지하고 있으며, 헬기를 포함한 군용기 52대 정도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전에는 70여대가 넘었는데 지금은 이라크에 가 있단다.) 활주로는 2,800m이며, 기지 주변을 도는 훈련이 가장 위험한데, 하루 평균 150여 회의 헬기 이착륙 훈련이 반복되는데 많을 때는 200~300회 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위협적인 훈련은 헬기가 미군기지 주변을 1~3시간 저공으로 비행하는 것으로 추락 위험이 큰데, 실제로 지난 2004년에 오키나와 국제대학에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기노완 시장은 미국을 방문하여 후텐마 기지 반환과 저공비행 훈련 중단을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도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최근 미국 내의 기지에서는 주택 위로 헬기를 날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기노완 시는 이를 후텐마 기지와 비교하는 발표를 2007년 3월에 할 예정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기지를 반환 받은 후 사용 계획을 수립하는 것도 기노완 시 사업 중 하나다.
이렇게 기노완 시가 반기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힘 때문이다. 평택 투쟁도 우리 국민들이 적극 지지하고 나설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고민이 크게 다가왔다.
우리의 다음 일정은 가데다에 있는 미군기지 자료관 방문이었다. 이 자료관은 가데다 역 건물에 들어있는데, 가데다 미군기지 바로 옆에 있고, 4층 옥상에는 CCTV가 설치되어있다. 기지를 향해 있는 이 CCTV로 주민들은 미군기지 내의 사고를 감시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북, 중국, 러시아 인공위성의 송수신을 감시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요미탄 기지도 둘러보았다. 일명 코끼리 우리(elephant cage)라고 불리는 기지는 주민들의 기지 반환 투쟁의 성과로 반년 후 북부의 캠프 한센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땅주인들과 미군이 직접 임대계약을 맺고 기지에 필요한 땅을 빌려준다고 한다. 요미탄 기지 일대는 트럭, 탱크, 사람이 낙하연습을 하는 곳이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불꽃을 여기저기 피어놓아 야간 연습을 중단시켰고, 낮에는 인분을 여기저기 뿌려놓아서 낙하연습을 방해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상황에 걸맞는 창조적인 방법으로 싸움을 하고, 결국 시설반환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정말로 놀라웠다.
8월 18일(금) 셋째 날, 하에바루 문화센터, 이도가즈 동굴, 평화공원. 그리고 헤노코 기지 건설 저지 투쟁 이야기
오키나와 남부의 하에바루 문화센터에는 2차 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당한 일본군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 병원으로 쓰인 이도가즈 동굴에는 약 3천명의 일본군 부상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일본군에 의해 몰살당했다고 한다. ‘전력약화’와 ‘기밀유출’을 우려하여 부상자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병원으로 사용되었다는 엄청난 규모의 이도가즈 동굴에도 가 보았는데, 각 병동별로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고, 각 공간별로 어떤 사용처였는지 설명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동굴 안은 너무 어둡고 음산해서 빨리 나오고만 싶었다.
다음 일정으로 평화공원을 찾았다. 우리가 조선인 희생자들의 기념비에 조의를 표하고 있을 때, 일본 누카가 후카로 방위청 장관이 그곳을 찾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나쯔메 목사는 장관을 향해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는 필요 없으니 도쿄로 가져가라!”고 소리쳤다. 우리 일행인 이낙호 선생도 “전쟁에 대한 아무런 반성 없이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하냐!”고 소리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날 저녁 테헤라 나쯔메 목사는 헤노코 기지 저지 운동에 대해 들려주었다.
“헤노코 해상기지 건설 저지를 위해 지난 8년간 운동해왔다. 완전 저지 비폭력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자신이 죽게 된다고 해도 폭력 사용을 하지 않으며 완강하게 기지건설을 저지시키는 것을 말한다.
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효과적인 투쟁방법을 고민했는데, 일본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조업을 중지하고 구조해야한다. 바다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법을 가지고 투쟁하기로 했다. 우선 카누 타는 연습을 시작했는데 파도가 심해도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연습이 가장 어려웠다.
첫 기지건설을 저지 해상 시위는 2시간동안 전개되었다. 카누 한대가 뒤집어지자 방위시설청의 진입은 중단되었다. 돌아갔던 방위시설청 사람들이 다시 진입을 시도해서, 결국 폭력 투쟁을 통해 방위시설청 사람들을 막아냈다. 이 때 비폭력을 지켜내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다시 비폭력으로 저지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그 이후 해상 투쟁의 방식은 모터 보트에 카누를 연결해서 이동하는 것으로 되었고 사람들은 방위사업청이 해상 기지 건설의 기초작업을 위해 파이프를 바다로 던지면 맨손으로 이 6m나 되는 파이프를 잡아냈다. 방위시설청은 바다 속에 던진 파이프들을 모아 기초 구조물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주민들은 이 작업을 막기 위해 산소마스크 없이 4~5m 바다 밑으로 들어가 파이프를 잡아내는 일을 계속 했다. 깊은 바다 속에서 파이프를 잡고 있으면 숨을 못 쉬어 죽을 것만 같은데 이렇게 죽어야하나, 살아서 저지행동을 계속 해야하나 하는 갈등으로 괴로웠다.
나중에는 다이빙옷을 입고 산소통을 매고 내려갔다. 총 150여회의 다이빙을 했는데 방위시설청 사람들은 산소마스크를 빼앗으려 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카메라 기자에게 부탁하여 같이 내려가니 폭력행위가 줄어들었다.
우리는 방위시설청 측 작업 인부들에게 “우리는 적이 아니다”라고 말해주었다. 항상 내 마음 속의 폭력과 싸워야한다는 다짐을 하며 그들을 대하려고 했다. 이러한 비폭력으로 일관하니 현장에서 변화가 일어났는데 방위시설청 작업 인부들이 더 이상 폭력행위를 하지 않았다. 입장이 서로 다른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수영훈련과 더불어 다이빙 자격증을 따고, 대형면허증을 따는 준비를 계속해서 해 나가고 있다.”
미군기지 건설을 위한 일본 정부의 무자비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저지활동을 벌여나가는 헤노코 저지행동 분들이 존경스러웠다.
8월 19일(토) 넷째 날, 북부지역의 캠프 한센과 다시 헤노코.
캠프 한센은 2차대전 당시 미군에 의해 기지가 생긴 곳으로 일본에는 하나밖에 없는 미군 해병대 캠프다. 해병대는 제일 먼저 상륙하는 군대라 스트레스가 많아서 기지 앞에는 미군에 의한 범죄가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상담센터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다.
헤노코에 도착한 우리는 지난 16년 동안 헤노코기지 건설반대운동의 정신적 지주라고 불려지는 긴조 유지라는 분을 만났다. 또 아시코미 히로시 선생은 오키나와 연락회 회장으로 “평택 투쟁이 헤노코 투쟁보다 더 위대한 투쟁이고 존경한다. 매향리 폭격장 폐쇄 운동을 보면서 오키나와에서도 미군 기지를 몰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동아시아 미군 기지를 없애기 위해 한국과 같이 연대하자”고 말씀하셨다.
평화기행단은 헤노코 투쟁 동지들을 위해 ‘평화가 무엇이냐’는 노래를 불렀다. 일본어로 노래가사를 번역해서 큰 종이에 가사를 적은 걸 보여드리니 헤노코 분들이 다들 노래가사가 정말로 좋다고 기뻐하셨다. 그리고 오키나와 평화기행 일정 내내 평화기행단 단원들이 한 땀 한 땀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우리말과 일본말로 된 ‘미군기지가 없는 평화를’의 아플리케 플랑을 선물로 드렸다.
평통사 회원사업팀 김현진 부장이 2003년부터 평택 투쟁 사진을 보여드리며 경과를 설명하고, 9월 24일 4차 평화대행진 10만 준비위원 모집에 대해 말씀드리자 즉석에서 10만 준비위원으로 서명과 함께 모금도 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주민 한 분이 헤노코 앞 바다를 배로 태워주겠다고 즉석 제안을 해서 슈와브 기지와 해상기지를 건설 지역을 둘러보는 ‘특별행사’를 하게 되었다.
8월 20일(일) 마지막 날, 다시 서울로
애초 이번 평화기행의 목적은 주일미군의 재배치를 주한미군 재배치와 연결하여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그 취지는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거 같다. 그러나 미군기지에 맞선 오키나와 주민들의 투쟁을 보며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싸움은 우리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우리들의 투쟁은 이곳 오키나와 투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깊이 알게 되었다.
진정한 평화가 무엇일까? 이번 기행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긴 여정의 작지만 소중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