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02. 10. 2] 2002년도 8·15 민족통일대회 자통협 평가서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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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15 민족통일대회 자통협 평가서



1. 평가에 앞서



올 8·15 대회는 분단 사상 처음으로 남쪽에서 남과 북의 통일운동세력이 함께 하는 대회로 치러졌다. 
그 동안 남쪽 통일운동은 지난 90년 제1차 범민족대회 이래로 8월 대회를 전민족이 함께 하는 민족통일대회로 치르기 위해 10년 넘게 매년 강고한 투쟁을 펼쳐왔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난 해 평양 민족통일대축전에 이어 올해 서울에서 8·15민족통일대회를 치러냄으로써 통일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고 있다. 이 같은 통일운동의 도약은 6·15 공동선언에 따른 획기적인 정세변화에 힘입은 것이다. 
하지만 올 8·15 서울 민족통일대회는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민간통일운동의 자주성을 확보해 내지 않고서는 민족대단결운동, 곧 통일운동의 진정한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겨주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올 8·15 민족통일대회는 명목상으로는 그 주체가 통일연대, 민화협, 종단으로 이뤄진 '2002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이하 추진본부)였으나 실제로는 정부의 철저한 통제와 간섭 속에서 그리고 남측 대중들의 접근이 완전히 차단된 가운데 치러진, 정부 주체의 관제행사나 다를 바 없었다. 민간통일운동세력은 그 어느 것 하나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고, 남과 북의 통일운동단체들 사이의 합의와 약속은 휴지조각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또한 남과 북의 통일운동단체는 8월 14일부터 8월 16일까지의 대회 기간 내내 공안기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대회를 치러야 하는 수모와 모욕을 당하였다. 이로써 분단 사상 처음으로 남쪽에서 치러진 민족통일대회는 그 역사적 의의가 심대하게 훼손되고 말았으며 민간통일운동진영은 자주성이 크게 침해되어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올해 8·15 민족통일대회의 역사적 의의가 훼손되고 민간통일운동진영이 자주성을 침해당하는 굴욕을 당한 것은 우리의 주체적 통일역량이 부족한 데 따른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번 8·15 민족통일대회에 대한 평가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자성적인 평가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통일연대의 평가는 이전과 같은 '평가를 위한 평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통일연대는 평가를 많이 하였지만 매번 평가 그 자체로 끝나고 말았으며 아무런 실천적 규정성도 갖지 못했다. 
이번 평가는 이전 평가의 전철을 밟지 않고 반드시 통일연대를 실천적으로 혁신하는 평가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통일연대가 대중들의 신뢰와 주동적인 대응력을 확보하여 통일정세의 획기적인 변화를 선도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연방통일조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2. 8·15 민족통일대회(워커힐 행사)에 대한 평가



1) 의미와 성과

① 분단 이후 최초로 남측에서 남북 통일운동단체가 8·15 대회를 민족공동의 행사로 치름으로써 우리 민족의 통일의지를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고 민족분열주의세력에 타격을 주었다.

남과 북이 함께 하는 8·15 민족통일대회가 분단 사상 처음으로 지난 해 평양에서 치러진 데 이어 올해 남측에서 다시 치러짐으로써 우리 민족의 통일의지, 단결의지를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였다. 특히 남과 북의 통일운동세력이 부시 정권의 한반도 전쟁책동과 냉전수구세력의 6·15 공동선언 파탄기도가 기승을 부리는 매우 어려운 정세 속에서 8·15 민족통일대회를 성사시켜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운동세력이 반통일세력의 극심한 공세를 뚫고 8·15 민족통일대회를 성사시킴으로써 민족대결을 부추기는 민족분열주의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② 각계각층의 남북간 민간교류가 지속, 확대되고 남북 당국 사이의 대화와 협력이 다방면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8·15 민족통일대회가 성사되고 또 거기서 부문별 상봉 모임이 이뤄짐으로써 청년, 여성, 종교인 등 계층별 민간교류의 지속,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민간 차원에서 남과 북이 화해와 단합을 선도함으로써 남북 당국이 대화를 재개하고 나아가 다방면으로 협력과 교류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추동하였다. 

③ 8·15 민족통일대회 서울 개최 합의를 이끌어내고 또 이를 치러냄으로써 민간통일운동의 성장된 역량을 보여주었다. 

우리 민족이 분단된 이래 지금까지 남쪽에서는 반통일세력의 방해책동으로 한 번도 남과 북의 민간통일운동세력이 함께 하지 못했다. 지난 90년대부터 남쪽의 민간통일운동진영은 8·15 대회를 범민족적인 대회로 성사시키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번번이 반통일세력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남쪽 민간통일운동은 올해 부시 정권의 대북 강경정책과 뜻하지 않은 제2의 서해교전 사태라고 하는 매우 어려운 정세에도 불구하고 8·15 민족통일대회 서울 개최 합의를 이끌어 내고 또 이를 치러냄으로써 남측 통일운동의 성장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운동세력이 지난해의 평양 합의를 지켜냈다는 점에서도 민족대단결운동이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④ 정부가 남북민간교류 때마다 온갖 간섭과 통제를 가하는 데도 민간통일운동이 그에 단호히 대응하지 못하고 순응해 온 그간의 잘못된 관행과 풍토를 되돌아 보고 혁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민화협·종단의 전횡과 독단에 휘둘려 온 그간의 관성적 풍토에 대한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면서 이 같은 풍토를 혁신하고 민간통일운동의 주동성과 중심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문제의식을 널리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워커힐 행사에 참여한 통일연대 대표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민화협·종단 쪽 인사들도 너나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도를 넘는 정부의 간섭과 통제에 대해서 성토하고 분개하였다. 그와 함께 대회 뒤에 열린 통일연대 원로 간담회에서는 통일연대가 정부의 통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데 대한 지적과 비판이 쏟아졌다. 
이처럼 이번 워커힐 행사는 그간 민간통일운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간섭을 통과 의례쯤으로 여기는 민간통일운동 내의 관성적 풍토가 매우 우려할만한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제 이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성의 계기로 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민화협·종단의 독단과 전횡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온 통일연대 내의 관성적 풍토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피부로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이번 워커힐 행사는 민간통일운동 내의 잘못된 관행과 풍토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을 혁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2) 한계와 오류

① 8·15 민족통일대회가 정부의 철저한 통제와 간섭을 받는 관제행사로 전락됨으로써 그 역사적 의의가 심대하게 훼손되었다. 

8·15 민족통일대회 서울 개최 합의는 분단 이후 최초로 반통일 세력의 방해책동을 뚫고 이뤄낸 민족적 쾌거로서, 통일운동 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통제와 간섭으로 남북의 합의서는 종이조각으로 변해버렸으며 8·15 민족통일대회는 남측 대중들의 접근이 완전히 봉쇄된 가운데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치러졌다. 분단 사상 처음으로 110명에 이르는 북측의 각계각층 대표들이 남쪽을 방문하였지만 정부로부터 승인 받은 남쪽 대표단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이 만날 수 없었고 남쪽 대중들도 자유로이 북측 동포들을 만날 수 없었다. 
이렇듯 이번 워커힐 행사는 명목상으로만 추진본부가 그 주체였을 뿐이며 모든 것이 정부 지침에 따라 치러진, 정부 주도의 관제행사였다. 
이로써 남쪽에서 각계각층 대중들의 뜨거운 통일 열망을 분출시키고 온 민족의 통일의지를 과시하며 통일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8·15 민족통일대회는 그 의의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②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용인함으로써 민간통일운동의 자주성이 심각하게 침해되었다.

이번 8·15 민족통일대회의 의의가 훼손된 것은 그 책임이 1차적으로 정부에 있다. 정부가 민간통일운동의 자주성을 철저히 짓밟고 8·15 민족통일대회를 관제행사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정부는 8·15 민족통일대회를 관제행사로 전락시킴으로써 민간통일운동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민간의 통일열망이 분출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신의 반통일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또 정부는 북 당국과 '8·15 민족통일대회가 성과적으로 진행되도록 돕기로' 합의하고서도 이 같은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듦으로써 이중성을 스스로 드러냈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보면 그 책임은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용인하고 스스로 자주성을 포기해 버린 통일연대에 있다. 
민화협과 종단은 정부가 '냉전수구세력의 방해'니 '국민감정'이니 하며 부당한 간섭과 통제를 가해오는 데도 그에 단호히 대응하기는커녕 이를 빌미로 통일연대를 압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통일연대에게는 민간통일운동으로서의 중심성을 확고히 하여 정부의 부당한 간섭과 통제를 배격하여야 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통일연대는 시종 정부의 온갖 간섭과 통제를 배격하려는 의지도 행동도 보여주지 못했으며 끝내 자주적 통일행사로서의 8·15 민족통일대회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민간통일운동의 역할을 부정하는, 이른바 정부의 '2002 민족공동행사 지침'을 수용하고 말았다. 
그러면 통일연대가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용인하고 자주성을 상실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통일연대가 자주성을 상실한 직접적 원인은 8월 12일 '정부 지침'을 수용한 데 있다. 만약 당시 통일연대가 정부의 지침을 거부하였다면 민화협, 종단도 통일연대의 입장을 따르기로 되어 있었고 또 북으로서도 통일연대의 입장을 존중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자신의 지침을 끝까지 고집하여 온 민족의 지탄을 받든가 아니면 지침을 철회하든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민간통일운동은 자주적으로 8·15 대회를 치르거나 아니면 정부의 부당한 간섭과 통제가 되풀이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고 통일운동의 자주성을 지켜냈을 것이다. 
통일연대의 자주성 상실은 좀 더 멀리 보면 그 원인이 그 동안 남북 교류를 추진하면서 정부의 간섭과 통제에 순응해 온 데 있다. 
그 동안 정부는 남북 교류 때마다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통일연대에 대한 간섭과 통제를 가하여 왔다. 그러나 통일연대는 이 같은 정부의 불법부당한 선별 탄압에 대해서 항의다운 항의를 하지 않은 채 순응해 왔다. 이번만 하더라도 통일연대는 8월 12일 대표자회의에서 워커힐 행사에 참여하되 정부의 처사에 강력히 항의한다고 결의하고서도 이후 아무런 실질적인 항의를 하지 않았다. 또 통일연대는 정부가 범민련 소속이라는 등의 이유로 25명에 대해서 불허 통보를 하였는데도 아무런 항의투쟁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것은 통일연대가 어느 덧 정부의 간섭과 통제에 스스로 굴복해 가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 같은 관성이 이번에도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쉽게 용인하게 한 요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통일연대가 잘못된 관성에 빠지게 된 데는 남북 교류의 성사를 위해서 정부의 통제·간섭을 어쩔 수 없다고 보는 굴욕적 사고가 작용하고 있다. 
그 동안 통일연대는 남북 교류 시 그 성사의 의의를 들어 정부의 탄압과 통제를 용인하는 태도를 줄곧 취해 왔다. 그러나 정부의 통제와 간섭에 굴복해서는 남북 민간교류의 진정한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부에 대한 통일연대의 굴욕적 태도는 정부로 하여금 더욱 통제의 고삐를 죄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민간통일운동의 역할이 전면 부정 당하는 사태까지 자초하게 된 것이다. 
또 통일연대가 잘못된 관성에 빠지게 된 데는 정부의 반통일성에 대한 안이한 사고가 작용하고 있다. 통일연대는 정부가 7·23 합의 직후부터 8·15 민족통일대회를 관제행사로 전락시키려는 기도를 드러냈는데도 정부에 대한 대응은 민화협과 종단에 전적으로 맡겨둔 채 아무런 직접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는 정부의 반통일성에 대한 안이한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③ 통일연대는 민화협, 종단에 시종 끌려 다니며 주동성을 상실하였다.

8·15 민족통일대회가 남과 북 통일운동단체 사이의 합의대로 치러지기 위해서는 통일연대가 정부에 종속되어 있는 민화협과 종단을 견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8·15 민족통일대회를 그 역사적 의의에 맞게 치러내기 위한 주도적 책임이 민화협과 종단이 아니라 다름 아닌 통일연대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통일연대는 민화협, 종단에 시종 끌려 다니고 또 스스로 주동성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민화협과 종단이 독단과 전횡을 휘두르는 데도 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먼저 민화협과 종단이 통일연대를 배제하고 정부와 교섭하는데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통일연대가 민화협과 종단에 대 정부 교섭문제를 맡겨버린 것은 민화협과 종단에 대한 의존적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8·15 민족통일대회에 대한 통일연대의 책임감이 얼마나 결여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 남북간 실무회담에서 합의된 8·15 민족통일대회 일정과 행사들을 구체화하는 데서 통일연대는 주도적으로 내용을 제기해 들어가지 못하였고 그럴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언제나 민화협이 세부진행계획표를 작성해 내놓았고 그들은 이 과정에서 통일연대와 사전 상의 없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행사계획과 일정, 각종 연설자 등을 정하여 제시하였으며 이미 합의된 내용조차도 일방적으로 바꾸기 일쑤였다. 
가령 민화협은 사전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대회 장소를 애초 북과 합의한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펜싱경기장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민화협 측은 장소 문제나 북측 대표의 남측 단체 사무실 방문 등에 대해서도 추진본부 차원에서 합의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추진본부의 입장인 양 자신의 입장을 북측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또 추진본부 사무총국을 구성하는 데서도 민화협은 정책기획, 행사 등 주요한 팀장을 선점하였고 조직, 의전 등의 경우 공동팀장으로 운영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모든 주요부분에서 행사하였다. 
반면 통일연대는 "대회 장소는 잠실 실내체육관으로 한다", "범민련·한총련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적인 환영·환송을 한다" 등에 관한 자신의 요구를 하나도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통일연대는 정부의 '2002 민족공동행사 지침' 수용 문제에서도 민화협과 종단을 견인하여 대 정부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는데도 이 같은 주동성을 포기해 버렸다. 
8·15 민족통일대회가 관제행사로 변질된 것은 통일연대의 이 같은 주동성 상실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다. 
그런데 통일연대의 주동성 상실은 추진본부의 구조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통일연대가 각급 회의에서 8·15 민족통일대회를 정세와 대중의 요구에 맞게 치르기 위한 원칙적 입장을 마련해 놓고서도 이를 너무나 쉽게 포기해 버린 때문이다. 통일연대의 주동성이란 정세와 대중의 요구를 올바르게 반영한 자신의 원칙적 입장과 조직적 결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중의 요구를 반영하는 올바른 조직적 결정을 확고히 견지하지도 않고 또 스스로 포기해 버린 통일연대가 민화협, 종단에 대해서 결코 주동성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또 통일연대의 주동성 상실은 민화협과 종단이 주도해 온 기왕의 관행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데서도 비롯된다. 
지난 해 민화협, 종단과 함께 첫 남북교류 행사로 6·15 금강산 민족통일대토론회를 가진 이래 통일연대는 매번 민화협과 종단에 끌려 다녔는데, 이제 이러한 기형적 관행이 어느덧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남북교류를 위해 민화협, 종단과 함께 해야 한다는 사고가 이제 민화협과 종단의 독단과 전횡을 용인하는, 심히 우려스런 단계에 이른 것이다. 
당분간 남북 교류를 위해서는 민화협, 종단과 함께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통일연대의 주동성 포기를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이제 민화협과 종단에 대한 굴종적 자세를 떨쳐버리고 주체적 자세로 남북 교류에 임해야 한다. 
지난 해 통일연대는 민화협과 조직적으로 통일운동을 함께 하는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 바 있다. 그 때 통일연대는 "민화협을 견인할 수 있다", "대중성을 확대하기 위해 민화협을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며 표결까지 강행하였다. 그러나 민화협과 함께 하기로 한 바로 그 직후부터 통일연대는 민화협과 종단에 이끌려 다녔다. 민화협을 견인한다는 주장이 허세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민화협과 조직적으로 함께 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 자통협으로서도 민화협, 종단과의 연대가 오늘과 같은 참담한 상황으로 결과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이제 통일연대는 민간통일운동으로서의 중심성과 주동성을 상실해 버린 데 대해서, 그럼으로써 통일운동의 전망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는데 대해서 냉엄하게 자기 반성을 하여야 한다. 

④ 통일연대는 조직적 결의를 지키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대중에 대한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결속력과 대중적 신뢰에 큰 손상을 입었으며 향후 통일운동 발전에 어려움을 조성하였다. 

대중들은 통일연대가 중심적으로 나서 8·15 민족통일대회를 그 의의에 맞게 성사시킴으로써 통일운동의 전환을 가져올 것을 간절히 기대하였다. 
통일연대가 "5,000명 규모로 잠실 펜싱경기장에서 개막식과 민족단합대회를 치른다", "범민련·한총련은 기존의 방식대로 통일연대 이름으로 대회 참가를 보장받는다", "북측 대표단을 대중적으로 환영·환송한다"는 등의 입장을 대표자회의, 상집, 전국집행책임자회의 등 각급 회의에서 조직적으로 결의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세와 대중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연대는 이 같은 결정을 추진본부에서 관철하기 위한 노력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쉽게 포기함으로써 통일운동의 발전을 바라는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또한 통일연대는 잠실 펜싱경기장에서 5,000명 규모로 8·15 대회를 치른다는 조직적 결의에 따라 2,000명 이상에 이르는 참관단을 모집하였다. 그런데 통일연대는 남쪽 대표단 400여명 밖에 참가가 허용되지 않는 워커힐 행사를 받아들임으로써 이 같은 대중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다. 
또 통일연대는 자신이 주도하여 7·23 평양 합의를 이끌어 내고서도 스스로 그 합의를 훼손시키는 결정을 주도함으로써 8·15 민족통일대회를 민족의 합의대로 성사시키기를 바랐던 민족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⑤ 민간통일운동을 길들이기 위한 정부의 '지침'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앞으로 정부와 극우세력의 반통일 공세를 저지하고 통일운동의 자유를 쟁취해 나가는 데서 어려움이 조성되었다.

'지난 해 평양 행사 파문'이니 '극우보수세력과의 충돌'이니 '경호·안전'이니 하며 정부가 내세우는 간섭 명분이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오로지 민간통일운동을 길들이고 옭아매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통일연대가 이 같은 정부의 부당한 논리를 그대로 용인함으로써 통일운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간섭을 정당화, 합법화시켜 주는 한편 스스로 자신의 통일운동 입지를 좁히는 결과가 되었다. 또 통일연대가 범민련·한총련의 배제를 받아들이는 결과가 됨으로써 범민련·한총련의 합법화는 더욱 어렵게 되었으며 남북 민간교류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간섭도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통일연대가 정부와 극우보수세력의 반통일 공세를 돌파하기가 더욱 어렵게 된 것이다.

3. 통일연대 경축 한마당(건국대 행사) 평가



1) 의미와 성과

① 통일운동의 대중적 지반이 꾸준히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지난 해에는 노동, 농민, 빈민, 청년, 학생, 여성, 종교인 등 여러 부문행사들이 치러졌다. 그런데 올해에는 노, 농, 빈, 청년, 학생, 여성 외에도 청소년이 독자적인 부문행사를 가졌으며 빈민의 경우 지난 해보다 훨씬 참가자 수가 늘어난 3,500명의 대오가 모인 가운데 부문행사를 가졌다. 이는 통일운동의 대중화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② 8·15 민족통일대회 서울개최를 통해서 남측 대중들의 민족대단결 의지, 통일의지를 높일 수 있었다. 

대중들의 참여가 봉쇄됨으로써 북측 대표단과 직접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함으로써 통일의지, 민족대단결 의지를 높일 수 있었다.
특히 민족단합대회에서 우리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고 외세의 전쟁책동을 저지·파탄시키자고 호소하는 북측 대표의 당당하고 우렁찬 연설은 남측의 대중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③ 미군의 두 여중생 살인사건에 관한 사진 선전전, 통일선봉대의 반미투쟁 등이 이뤄짐으로써 대중들에게 반미 투쟁 과제들을 제시하였다. 

두 여중생 관련 사진 선전전이 자통협, 두 여중생 범대위, 전노련 등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이뤄졌고 두 여중생 추모극이 공연되어 참여한 많은 대중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투쟁의지를 높였다. 또 통일선봉대가 용감하게 각 지역에서 반미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대중들의 반미의식을 고취하였다. 

2) 한계와 오류

① 8·15 민족통일대회가 정부의 부당한 탄압과 간섭으로 원래 남북간 합의대로 치러지지 못하고 관제행사로 전락되었는데도 이를 규탄하지 않았다.

처음 통일연대 경축한마당은 8·15 민족통일대회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로 마련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부당한 간섭과 통제로 인해 8·15 민족통일대회가 민간통일운동의 자주적 행사로서의 성격을 잃고 관제행사로 전락된 만큼 통일연대는 정부의 부당한 탄압과 간섭을 규탄하고 이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결의도 모아야 하였다. 이는 정부의 처사에 강력히 규탄하기로 한 8월 12일의 통일연대 대표자회의 결정에 비추어서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통협 연설자를 제외하고서는 정부의 간섭과 탄압을 규탄하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여기서도 정부의 간섭과 통제에 순응해 온 통일연대의 관성적 작풍과 태도, 정부의 반통일성에 대한 안이한 사고가 그대로 드러났다. 

② 통일연대가 대중들에 대한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대회 참석자 수가 줄었으며 열기도 떨어졌다. 

14일 통일연대 경축 한마당에 1만 명이 넘는 수가 참여하였는데 이는 작년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이처럼 참여 대중 수가 준 것은 학생대오가 예년에 비해 줄었기 때문이다. 
15일 낮 건국대에서 8·15 민족통일대회 개막식과 민족단합대회 모습을 동영상으로 볼 때는 참석자 수가 5천명에 불과하였다. 분단 사상 처음으로 남측에서 민족공동의 행사가 치러졌는데도 집단적인 감동과 흥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처럼 대회 규모와 열기가 예년에 비해서도 떨어진 것은 8·15 민족통일대회의 관제행사화와 대중들의 참여 봉쇄로 대중들의 실망이 컸던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③ 통일연대 자체 행사를 과도하게 잡음으로써 문예행사의 내용과 짜임새, 숙소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8·15 민족통일대회를 통일연대가 주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통일연대의 주체 역량이 제한되어있다는 점에서 통일연대는 당초 8·15 민족통일대회를 위주로 하는 가운데 통일연대 자체 행사는 단합대회 수준에서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당초 결정과 달리 통일연대의 경축 한마당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에서 문예행사를 배치하는 등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통일연대 행사는 행사대로 부실하게 준비되어 대회의 열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으며 8·15 민족통일대회는 대회대로 통일연대의 역량을 집중하지 못함으로써 주동성을 제약하는 한 요인으로 되었다. 

4. 향후 과제와 전망



1) 민간통일운동은 그 간 정부의 통제와 간섭에 순응해 온 관행과 태도를 혁신하고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해야 한다.

올해 8·15 대회는 민간통일운동이 자주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경우 어떤 후과가 초래되는가를 심각한 교훈으로 주고 있다. 통일연대는 정권에 대해서 자주성을 지키지 못하고 정권의 간섭과 통제를 허용한 결과 남북 통일운동단체들의 합의도 온전히 지킬 수 없었고 남측 대중들의 통일의지도 모아낼 수 없었다. 
통일운동의 유일한 주체인 민간통일운동이 자주성을 상실하고 정권의 간섭과 통제 밑에 놓인다면 통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으며 흡수통일을 허용하게 된다. 민간통일운동이 자주성을 포기하는 것은 곧 통일운동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통일연대가 자주성을 확고히 틀어지기 위해서는 정부의 통제와 간섭에 순응해 온 그 간의 관성적 태도를 혁신하고 정권의 반통일성에 대한 안이한 시각을 떨쳐 내야 한다. 

2) 통일연대는 그 간 민화협과 종단의 전횡과 독단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 온 잘못된 관행과 태도를 혁신하고 민간통일운동의 중심성과 독자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3) 민화협과 종단의 되풀이되는 독단과 전횡을 극복하면서 민족대단결운동에로 나날이 진출하고 있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렴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민화협과 종단의 전횡과 독단을 막고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의 주도성을 높일 수 있는 방향에서 남북교류기구의 재편을 꾀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특정의 몇몇 인물이 좌우하는 기구가 아니라 다양한 통일운동세력의 의사가 민주적으로 수렴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 
통일연대, 민화협, 종단까지를 포함하여 각계각층 인사들을 망라하는 방식으로 하되 정부에 대한 독립성이 강화될 수 있도록 새로운 남북교류기구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4) 통일운동을 가로막는 정치군사적 조건들을 대중의 힘으로 돌파하기 위한 대중투쟁 중심의 사고를 확고히 하는 가운데 남북교류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그 동안 통일연대는 통일운동을 가로막는 정치군사적 조건들을 대중의 힘으로 돌파하는 투쟁을 중심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민화협, 종단과 함께 하는 남북교류 사업을 위주로 해 왔다. 
그러나 통일운동의 주력군을 이루는 기층 대중들을 통일운동의 주체로 세우지 못하는 한 반통일 세력의 공세를 저지할 수 없고, 통일을 가로막는 정치군사적 조건을 돌파할 수 없다. 또 그렇게 되면 남북 교류사업도 정부의 통제와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민간통일운동은 남측 대중들을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정치군사적 조건을 타파하는 통일투쟁의 주체로 세워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가운데 남북교류 사업도 추진해야 한다. 

5) 민간통일운동의 자주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민간통일운동의 조직적 재편, 강화가 이뤄져야 한다. 

지금 민간통일운동세력은 대부분 통일연대로 모여 있다. 그런데 현재 통일연대는 주로 남북민간교류 사업을 벌이고 있다. 반면 4대 정치적 과제를 과제로 하고 있는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세력은 조직적으로 분산된 가운데 각자 반미, 반정권 투쟁을 벌이고 있다.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세력에게는 반미·반정권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정치군사적 제 조건을 타파하고 연방통일조국의 길을 열어나가는 한편 통일연대가 민간통일운동으로서의 중심성을 지키면서 남북교류 사업을 해나가도록 추동해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다.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이 이 같은 임무를 온전히 해내기 위해서는 개별 분산적으로 있으면서 반미·반정권 투쟁을 벌이고 있는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진영이 조직적 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이번 8·15 민족통일대회는 자주적 민간통일운동대오 모두가 정부의 통제와 간섭 그리고 그에 굴종하는 민화협과 종단의 전횡을 피부로 느낀 중요한 계기였다. 이 점은 자주적 민간통일운동대오가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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