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5] 평화누리통일누리:::제66호::: <특집-허세욱 열사여! 자주와 평화의 불꽃으로 영원하소서!> 회원들의 마음에 새겨진 허세욱 열사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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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허세욱 열사여! 자주와 평화의 불꽃으로 영원하소서!]
회원들의 마음에 새겨진 허세욱 열사
5월 항쟁 이후 젊은이들을 앞에 보내고 살아남아 가신 님들의 몫까지 일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돌이켜 보면 마냥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늘 허세욱 열사의 노제와 추모식, 그리고 그분의 유서를 접하면서 헤세욱 열사야말로 이 땅 반도의 민중 모순과 민족 모순을 한 몸에 온통 안고 살면서 30여 성상을 이 모순의 해결을 위해 불철주야 분투하다 오히려 이 모순이 총체적으로 심화되는 때라고 생각되는 순간 온몸을 불살라 항거하셨습니다.
그 분의 삶! 빈농가정에서 태어나 서울에 올라와 갖가지 배달부 일, 한독택시 비정규직 노동자, 도시빈민운동의 일환인 철거민투쟁, 관악주민연대에 가입하여 주민연대활동, 참여연대에 가입하여 시민운동,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여 민중의 정치 참여 실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에 가입하여 반전평화와 통일운동 참여, 민주노총의 모범조합원 활동, 그리고 한미 FTA 저지투쟁에 참여하다가 지난 4월 1일 우리 조국의 주권이 총체적으로 미국에게 넘겨진다 생각되자 온몸을 불사르신 것 아닙니까?
우리 지도자들 중에 훌륭한 지도자가 많지만 허세욱 열사처럼 우리 민중의 수많은 삶을 몸소 살아가며 투쟁한 분을 어느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유서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으니 나를 위해 모금하지 말라”,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미군기지 주변에 뿌려 달라”, “여중생의 한을 풀자”는 당부는 누구도 추종을 불허하는 모범적 지도자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 열사는 생전 사후 철저히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국가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가족이란 사람들이 한때 치료도 못하게 하는가 하면 시체를 빼돌리고 장례는커녕 조문조차 못하게 하는 등 허 열사를 두 번 죽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의 가족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그 분의 뜻을 이어 “한미FTA 꼭 저지합시다!” “미군기지 없는 세상을 만듭시다!” “여중생들의 한을 풀어줍시다!” “비정규직노동자가 없어지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광주전남 평통사 배종렬 공동대표>
06년 7월 22일, 범국민대회 후 평통사 정리집회에서 발언하는 허세욱 열사
수줍게 웃으시던 얼굴, 어린 사람과도 두 손을 꼬옥 쥐며 허리 굽혀 인사하시는 겸손함, 노동분회 뒤풀이자리에서 술 한 잔 하시고 택시노동자의 힘겨움 또는 분열하는 운동대오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시던 모습, 집회에 참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고했다며 전화를 해오곤 했던 그 분. 허세욱 선생님은 그렇게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유인물을 받아가시면서 효순이 미선이에 관한 유인물도 거의 다 모아놨다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셨는데,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한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채 나중으로 미뤘던 것이 후회됩니다. 효순이 미선이를 죽인 미군놈들에게 평택마저 기지로 내어줄 순 없다며, 그 내용이 적힌 펼침막을 손수 맞춰와 대추분교에 걸어 놓으셨죠.
작년 5월 4일. 대추 초등학교가 무너지고, 황새울에 철조망이 쳐졌던 지옥같던 날. 도두리를 지나던 군용 트럭 대열 앞에 드러누워 아름다운 들녘에 철망이 쳐지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 나섰다가 결국 연행까지 되셨죠. 그렇게 대추리, 도두리, 황새울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보시며 절망과 분노로 얼룩졌던 선생님의 얼굴이 생각납니다.
우리 서울평통사의 노동분회원이고, 택시노동자이며, 민중과 평화를 사랑하고, 세상 앞에 당당했던 허세욱님. 아름다운 당신을 우리가 기억하겠습니다.
<서울평통사 황윤미>
04년 7월 22일, 10차 FOTA규탄 중앙청사 앞 농성에 나선 허세욱 열사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싸움이 한창이던 2006년 초여름. 평택은 철조망에 둘러 쌓여진 전쟁터와 다름 없었다. 고 허세욱 동지는 비번이셨는지 아니면 일부러 배차를 빼셨는지는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따스한 평택 햇살을 받으며 평통사의 집 앞에 앉아 계셨다. 그때만 하더라도 집회 장소나 촛불집회장에서 뵙고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고 허세욱 동지는 착한 옆집 아저씨였으며, 항상 말씀을 하실때는 존대말을 하셨던 분으로 기억이 났다.
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아저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참 배운것도 없고, 가진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것인데 미군기지 확장을 막아내던가 어쩌던가, 무언가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떠나야되지 않겠어?”
그때는 잘 몰랐다. 그저 열심히 투쟁 하겠다는 말씀이겠거니...했다. 나는 기억력이 참 나쁘다. 내가 기억하려고 긴장하고 애를 써야 간신히 놓치지 않고, 그것도 모자라 수첩에 적어 놓아야 겨우 기억할 수 있는 내가 어찌 그 당시에 말씀 하셨던 고 허세욱 동지의 말이 내 기억에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허세욱 동지여!
세상에 한번, 단 한번뿐인 인생.
다시는 되돌아 오지 않는 인생.
저도 동지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세상에 의미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편히 잠드세요
<인천평통사 유정섭>
내가 허세욱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다살이 풍물행사인지 집회인지에서부터인 거 같다. 그 후 항상 먼저 이름을 부르시며 악수를 청하시곤 하셨다.
작년 늦은 봄 내가 대추리 평통사 집에서 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을 때, 허 선생님이 “윤영일 동지가 지킴이 활동을 하느라 수고가 많으시죠?”하시면서 생닭 몇 마리와 술을 사오셨다. 악수를 청하셨다. 닭을 삶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이웃에 있는 들소리 방송국(성공회대 학생들) 사람들을 불렀다.
함께 술과 고기를 나눠먹으면서 허세욱 선생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택시운전을 하시는 허세욱 선생님이라고 소개를 하자 허세욱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하시던 기억이 난다.
<서울평통사 윤영일>
대추분교가 무너지던 06년 5월 4일. 투쟁에 앞장선 허세욱 열사
내가 아는 가장 겸손함과 순수한 미소를 가지셨던 사람, 허세욱 선생님.
허세욱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작년 초 평통사 사무실에 처음 갔을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노동분회 모임이 있어 잠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잠시 택시 일을 한 적이 있어서 힘드시지 않으시냐고 물었는데 “그냥, 그렇지요 뭐” 하시며 조용히 미소지으셨습니다. 지금 그 분을 떠올리며 생각나는 표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때 보았던 그분의 그 선한 미소입니다.
그 후 마주칠 때마다 그 분은 항상 그 미소를 보여주셨습니다. 당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린 실무자에게조차 단 한번도 하대를 하지 않았던 그 분. 그 겸손함과 그 선한 웃음은 너무나 잘 어울렸습니다. 그 분의 분신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그 조용하면서도 선한 미소였지요.
그분을 마지막 본 3월 30일 저녁, 시청집회에서 몸에 FTA의 문제점을 적은 대자보를 두르시고 시위를 하시는 것을 보고 “선생님, 항상 보고 배웁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손사래를 치시며 겸손해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참 하실 말씀이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때 들을 수 있던 말씀을 얼마 뒤 피와 절규로 쓰여진 유서로 만났을 때...... 그 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하는데......가슴속에 가득 차 있었을 그 말씀들을 들었어야 하는데......
이제 다시 선생님의 그 선한 미소는 다시 볼 수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 한독택시노조 조합원들과 함께한 집회에서
없지만, 제 가슴속에는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제 마음 속 선생님의 미소가 환한 웃음으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선생님 편히 쉬세요.
<부천평통사 박석진>
지난 2002년 여중생범대위 사무실에 파견되어 일할 때 조용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면서 이 내용을 알려야 한다며 유인물을 찾으시던 모습, 택시노동자로 일하시면서 손님에게 나누어 드리며 설명을 해드린다고 수줍은 미소를 띠우시던 동지.
택시운전으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아무런 행사도 없는데 대추리 마을에 찾아와 주민들과 지킴이들을 걱정하고, 행사 때마다 얼굴을 마주치면 항상 열심히 못해서 “미안하다”, “죄송하다” 말씀하시던 동지. 추운 겨울, 추위를 걱정하며 검은 비닐봉지를 묵묵히 건네던 동지. 그 속에는 너무나 따스한 조끼가 들어있었습니다. 감기에 걸리지 말고 건강하게 열심히 투쟁하라고 격려하시던 동지.
저는 그 분을 허세욱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동지라 불러주길 원했고 허세욱 동지의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은 그의 동지였습니다.
동지여! 당신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럽고, 초라해집니다.
동지여! 이제는 당신을 내 가슴속에 새깁니다.
동지여! 동지여! 이제는 목놓아 불러봅니다.
부디 험난한 세상 모든 짐을 내려놓으시고 고이 가소서.
<미군문제팀 장도정>
관악주민연대 김장나누기 행사에 참가한 허세욱 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