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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 평화누리통일누리 :::제69호::: <회원마당> 대동강에 두고 온 누이 - 칠순의 투사 유호명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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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마당 - (서울)

대동강에 두고 온 누이1)
- 칠순의 투사 유호명2) 할아버지

 

 


△ 유호명 할아버지(69세)

 유호명 할아버지(69세)를 만나기 위해 난생 처음 국방부를 찾아갔다. 이날 새벽 배형규 목사에 이어 심성민 씨가 탈레반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방부 민원실 앞에선 평통사 주최 <제70차 평화군축 집회>가 열렸다. 아프간 사태 때문인지 몇몇 외신들이 집회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맞은편 전쟁기념관 정문 너머 전투병의 동상이 보였다. 집회는 점심시간에 맞춰 한 시간 가량 진행됐다. 이글거리는 뙤약볕으로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기름때 묻은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종로, 청계천, 장안동 등지의 카센터에 자동차 부속품을 납품하는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일을 멈추고 근처에 트럭을 주차했다. 짐칸은 물론이고 운전자 옆 좌석에도 부속품들이 가득 쌓여 삶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그는 장사하면서도 항상 통일 생각을 한다고 한다. 방송을 봐도, 신문을 봐도 통일 관련된 소식이 있으면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그는 할아버지라는 표현이 무색하리만큼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활기찬 표정이다. 실제 할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가 단단한 체구에서도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순박함과 천진난만함이 묻어났다. 매일 집회에 나오기가 어렵지 않냐고 여쭈었다.

 “나이 드니까 예전 같지 않고 몸이 잘 안 따르지. 힘들어서 이런 운동 이제 그만하자는 생각도 드는데, 일이 생기면 나도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절로 생겨.”

 할아버지는 지기이자 동지라고 일컫는 한상준(71세)과 함께 최루탄도 많이 맞고 경찰서 유치장도 많이 끌려다녔다. 서울에서 안 가 본 경찰서가 드물다. 집회가 있으면 만사 제치고 참여한다. 그를 만나기 위해 오늘만도 두 건의 집회에 참가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다음날도 미 대사관 앞 기자회견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길을 지나가던 70대 가량으로 보이는 한 노인과 국방부 장교가 집회자들을 삿대질하며 지나갔다. 집회 참가자들은 영어를 병기한 피켓과 손플랑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할아버지는 집회에 나오는 일이 생활의 십일조라며 겸손해한다. 십일조라는 것은 수입의 딱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첫 번째 것, 즉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에게 겨레의 하나됨을 위한 노력은 신에게 드리는 가장 첫 번째 것인 셈이다. 부인은 매일 집회에 나가 과로하는 할아버지를 걱정도 하고 원망도 한다. 
할아버지는 평택 대추리 집회에 자주 나섰는데 경찰 병력이 투입된 날 일이 생겨 대추리를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아직까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 할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집회에 빠지면 마음이 불편하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롭다. 심지어 악몽도 꾼다. 그가 다니는 교회 조헌정 목사는 FTA를 반대해 분신자살한 ‘허세욱 동지도 그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하면서 “옳은 병입니다. 옳은 병!”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언제부터 고단한 몸을 이끌고 ‘옳은 병’에 걸리게 된 걸까?

 “1989년에 임수경이 텔레비전에 나오던 때야. 한참 통일 바람이 불던 때였잖아. 그때 일하던 중에 우연히 TV를 보는데 임수경이가 ‘우리는 하나다.’라고 부르짖고 어릴 때 뛰어놀던 대동강, 모란봉, 평양시가지가 나오는데 누님 생각이 나면서 충격을 받았지. 그래서 연세대학교 집회에 한 번 가본거야. 거기서 문 목사님이 앞에 나와서 열사들 이름을 하나씩 부를 때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어. 난 그 전까지 데모하는 학생들 보면 폭도들이라고 했거든. 그날 정말 통곡을 했지. 김도향의 노래 있잖아.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내가 딱 그런 놈이었어.”

 할아버지는 그날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고 최근까지 헌신적으로 봉사해 왔다. 유가협에서 공로패도 수여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요즘은 유가협에 관심을 갖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의 부모는 일제하 조선 땅에서 살기 어려워 일본에 건너갔다.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에서 살았는데 원폭 당시 산에 굴 파고 숨어 다행히 원폭피해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광복을 맞이해 귀국선을 타고 한국에 들어왔다. 부사에서 평양으로 올라오는 길에 둘째 누님은 일본 교포 남자의 고향인 당진에서 내려 살림을 차렸다. 누구도 그것이 가져올 아픔을 짐작할 수 없었다. 
고향으로 올라간 가족은 사동 탄광지대에 살았다. 아버지가 탄광에서 석탄 캐는 일을 했다. 전쟁이 났고 국군이 진격해 들어올 때의 일이다. 그때 그의 나이 열세 살이었다.

 “언제나처럼 대동강 옆 개천에서 동무들과 미역도 감고 놀고 있는데 군복에 총을 메고 우리 쪽으로 군인들이 오는 거야. 국군 간호장교 대위인 여군 한 명이 앞서고 남자 호위병 서넛이 카빈 총을 들고 뒤따르고. 무서웠지. 우리 쪽으로 와서 우리 어머니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는거야. 자세히 보니 당진에 살던 둘째 누이야. 어이구 이 녀석 많이 컸네 그러면서 껴안더라고. 반갑기도 하고, 총을 보니까 무섭기도 했지. 그러고 나서 집에 함께 들어가는데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오더라. 그때 셋째 누님이 둘째 누이가 들어오는 걸 봤대.”

 이때 인민군 간호장교 소좌인 셋째 누님은 인민군과 함께 후퇴하지 못하고 집에 숨어 살고 있었다. 인민군 누이는 군의관 장교인 사귀는 남자의 영향으로 간호장교가 되었고, 군국 누이는 어릴 때부터 나이팅게일을 존경해 간호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빨리 숨어라 그래서 작은누이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로 장롱과 벽 사이 좁은 틈에 숨었단 말야. 혹시라도 장롱 속이 안 보이게 셋째 누님이 가로막고 있었지. 어머니 아버지는 딸이 오니까 반가우면서도 한편 불안한 거야. 서로 반가워하고 인사하고 있는 와중에 인민군 누이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거야. 둘째누이를 핏줄보다 적으로 생각했나봐. 국군을 보니 반동분자들이란 생각이 들었겠지. 죽여버리겠다고 외치면서 권총을 들고 탁, 나와서 국군 누이를 향해 겨눴어. 국군 누이는 멍하니 서 있고 뒤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인민군 누이를 향해 총을 겨누었지.”

 “나는 누나들 다릴 붙잡고 엉엉 울었지. 금방 누구라도 죽을 것 같았으니까. 자식들은 울면서 바짓가랑이 잡고 말리고, 어머니는 왜들 그러냐고 통곡을 하면서, 절대 방아쇠 당기지 마라, 니들 중 하나는 죽는다, 하나라도 죽는 거 원치 않는다, 당장 총을 내려놓아라, 말리셨는데 그게 어머니 마음이고 우리 마음이야. 동네 사람들 몇몇은 방에 들어와 있고 문 밖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방 안 상황이 그렇게 험악했지. 이게 딱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현실이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국군누이가 호위병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럴 수 없다고 머뭇거리자 단호하게 재차 외쳤다. “당장 내려놓지 못하겠어!” 그제서야 호위병들이 총을 내려놓았다. 작은 누이도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모님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둘째누이에게 말했다. “오늘 이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작은 애를 도망가게 하자. 동네 사람들도 다 못 본 거다.” 국군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누이는 치마저고리 차림 그대로 뒷간으로 난 쪽문을 박차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이 가족이 목격한 누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 국군과 인민군 그런 차이도 몰랐어. 인민군 누님은 완전 독기가 올랐었지. 원래 누나가 좀 사상성이 있었거든. 형제들 중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특히 산수를 참 잘했고 미모도 빼어났어.”

 맏누이는 지금 부산에 있는 성당에서 노인들 목욕봉사를 하며 살고 있다. 마음이 인자하고 온유해 남을 위한 봉사를 좋아한다고 한다. 북쪽 누이는 지금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국군 점령지역을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전투병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는 누이들-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간호사들도 서로 총을 겨누어야 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국군 누님은 중공군이 물밀듯이 내려오고 있으니 남으로 내려가자며 가족을 재촉했다. 누님을 따라나서면 안전하고 빠르게 대동강을 건너 피난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인민군 누이를 두고 내려갈 수 없었다. 결국 누이는 국군과 함께 남쪽으로 먼저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은 인민군 누이를 기다리기 위해 부러 사동 집에서 평양 집인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만든 공동 방공호로 옮겼다. 지금 평양의 지하철도 전쟁 시 대피하기 위한 방공호로 지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인민군과 중공군이 사리원까지 남하하고 평양 시가지를 돌며 국군 찦차에서 이승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돌아올 테니 3일치 식량만 들고 피난하라는 것이었다.

 “3일만 후퇴하면 된다고 했는데 3일이 어느새 60여 년이 되었어. 이승만에게 속았어. 중공군이 물밀듯이 내려올 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우린 살기 위해서 가재도구를 고스란히 남겨두고 피난했지.

 결국 누님만 두고 내려왔다. 
공기중에도 살얼음이 끼는 동지섣달 한파 속에서 한밤중 대동강을 건넜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다시 보지 못할 대동강을 그때 건넜다. 그 위에서 팽이도 돌리고, 썰매도 타고, 연도 날리고, 발가벗고 헤엄치던 대동강과 칠흑의 어둠 속에서 헤어져야 했다. 
그 길로 영등포까지 걸어내려갔다. 가는 길에 국군 낙오병을 만나기도 했다. 미군 전투기, 일명 쌕쌔기가 쌕쌕쌕 소리를 내며 갑자기 나타나 민간인에게 총을 갈겼다. 눈 앞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을 직접 목격했다. 길에서 죽어 있는 피난민들도 많았다. 
영등포에 도착해 기차 지붕에 올라탔다. 피난민 중엔 비탈진 지붕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떨어지는 것보다 배고픔과 추위가 더 무서웠다. 밧줄이 없어 보따리며 이불 등을 끈으로 이용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했다. 가족 단위로 굴비처럼 엮어 추락에 대비했다. 그는 아버지 곁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기차 지붕 위에선 일주일 동안의 ‘지붕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피난민들은 개성김치며 주먹밥 등을 서로 나눠 먹었다.

 “그게 밥상공동체고 지붕공동체야. 서로 추락하지 않게 잡아주고, 먹을 것 있으면 나눠 먹고 도와주면서 내려왔어. 그때는 서로 자기 것을 아끼지 않았어. 요즘 사람들 자기 것 챙기고 먼저 먹으려고 얼마나 영악해. 문명은 발전했지만 완전 헛것이지.”

 더러 예고 없이 기차가 떠나 잠시 정이 쌓인 사람들과 헤어지기도 했다. 객차 후미를 분리시키고 기차가 출발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가족은 기차 앞 쪽에 탔기 때문에 부산까지 갈 수 있었다. 낮과 밤들이 지붕 위에서 흘러갔다. 드디어 부산에 도착했다. 새벽에 부산에 도착하자 “재첩국 사이소”, “오징어 사이소”란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음식 이름이었다. 
부산에서 삶의 주춧돌을 맨바닥부터 쌓아올리는 일이 시작됐다. 그 짐은 부지런한, 아니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에게 대부분 돌아갔다. 그 전까지 부지런했던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그때부터 허구한 날 술만 마셨다. 지금도 아버지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전쟁의 화마가 그에게 무엇을 남겼던 걸까? 아버지는 누이를 한 번만 보고 죽었으면 하고 말하곤 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할아버지는 형과 함께 절대 술을 마시지 말자는 약속을 하고 지금도 지키고 있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그래. 그 대신 어머니가 빼빠지게 일만 하고 살았지. 메리야스 보따리 장사를 했던 어머닌 결국 길에서 장사하다 쓰러져 죽었어. 고혈압이었지. 66년도였을 거야. 유언도 못 남기고 죽었어. 어머니도 작은 누이 한 번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

 그도 어머니 속 많이 썩여 후회가 많다고 한다. 사동에서의 일을 꺼내지 않던 맏누이에게선 딱 한 번 영숙이(북한 누이)가 보고 싶다는 얘길 들었다. 매형 장례식 때였다.

 “이산가족 문제는 말야,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민족 모두의 문제이지. 이산가족이 아니라도 당연히 만나서 함께 살아야 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거잖아. 난 우리 가족만 찾겠다는 생각은 없어. 7천만 겨레가 만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니까. 7천만이 다 이산가족이야.”

 금강산에 가봤냐는 질문에 갈 생각도 없다고 한다. 민족이 갈라서 있는데 무슨 염치로 가냐며 민족이 하나된 이후에 가보겠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교회 주보에 적힌 ‘분단 65년’이란 글자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분단을 유지하는 통일의 장애물은 무엇일까?

 “장애물을 치워야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듯 분단 장애물을 치워야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거야. 부시가 북한을 미사일 공격하면 내 동무들을 향해 쏜다는 것이잖아. 미군 철군 없는 평화는 없어.”

 할아버지는 왕십리 유리공장에서 일할 때 만난 아내와 딸 둘과 함께 가족을 이뤘다. 큰딸은 시집가고 작은 딸은 데리고 있다. 자식들이 대선 지지자가 다 다르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어보려고 애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포기했다. 생각이 다르면 다른 대로 만나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반공주의자인 넷째 누이와도 지금은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교회에 다닌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방부제나 핸드폰 밧데리 충전하듯 온다. 올해 3월 문익환 목사 추모를 위해 교회에서 모란공원에 갈 때 할아버지에게 참석을 종용하는 문자가 왔는데 ‘고(故) 문익환’이란 이름자가 적혀 있었다.

 “문 목사님은 돌아가신 분이 아냐. 땅 속에 묻힌 분이 아니야. 故자를 떼어 내고 대신 늦봄이란 그분의 호만 붙여야지. 문 목사님의 거룩한 뜻은 내 가슴에, 그리고 우리들 가슴에 살아 꿈틀대고 있으니까. 열사들도 모두 살아 우리들 가슴에서 부활했잖아. 살아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변해도, 죽은 자는 그 뜻 그대로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변하더라도 열사들은 세월이 흘러가도 변함이 없어.”

 유가협에서 후원활동을 하며 자주 만난 문 목사에 대한 애정은 각별해 보였다. 두 분은 몇 가지 점에서 닮은 모습이었다. 예수를 시대적 예언자로 인식하고 그 뜻을 따라 실천한 점과 늦은 나이에 투사의 삶을 시작한 늦봄들이란 점, 열사들에 대한 애정과 통일에 대한 의지가 각별하다는 점이 그렇다. 할아버지는 종종 열사들의 묘지를 혼자서 찾아간다. 
할아버지의 통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통일운동 단체 총회 때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한반도기를 걸어야지 왜 갈라진 민족의 국기인 태극기를 거냐고 항의한 적이 있다. 몇 년 전엔 인천에서 ‘8․15민족통일대회’가 열렸을 때, 할아버지는 친구 한상준과 함께 북쪽 대표단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뛰쳐나갔다. 안기부 요원들이 막아도 소용없었다. 서로 반갑다고 손을 잡고 얼싸안으며 대뜸 “야, 이 새 꺄!, 빨리 오지 않고 왜 이제 왔냐?”, “야,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냐?” “야, 이 새끼 너, 손 한 번 만나보자.” 순식간에 자신들도 모르게 이뤄진 상봉이고 대화였다. 그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생면부지였지만 서로의 이름은 ‘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저녁에 <파병반대 국민행동>에서 주최하는 집회에 참석해 다시 할아버지를 만났다. 길 건너로 미 대사관 건물이 보였다. 스피커에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 들려왔다. 시위자들은 이번 아프간 사태의 근본적 책임은 미국의 아프간 점령을 도운 현 정부에게 있다며 철군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촛불집회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하는데 열사들이야말로 자기 몸을 불태워서 제사로 자신을 역사 앞에 바친 거잖아. 촛불을 봐. 어둠을 바쳐서 시대를 밝히잖아. 열사들도 자기 몸을 희생해서 수많은 생명을 살린 거야.”

 할아버지는 작년에 교회 목사의 권유로 유언장을 미리 써두었다. 그의 유언장엔 물론 민족 통일의 염원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통일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분단체제를 물려줘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할아버지 살아생전에 평양 동무들을, 생사를 알 수 없는 누이를, 대동강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길 건너 미 대사관 건물에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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