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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제71호::: <해외평화운동>"민족 운동이 다시 절실해졌습니다." -재미 동포 운동가 이행우 선생님 인터뷰-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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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평화운동 §

 

"민족 운동이 다시 절실해졌습니다."

-재미 동포 운동가 이행우 선생님 인터뷰-

뉴욕 최성희

“수구세력의 재집권과 청산되어 마땅한 사회가치체계로의 회귀는 민족운동이 원점으로 되돌아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략] 폭을 넓혀, 그간에 추구해온 민족의 자존문제, 민중의 참된 삶의 문제, 신자유주의를 소화할 수 있는 문화문제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바탕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간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남과 북, 해외동포와의 관계는 매우 특수합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삐걱거릴 때는 해외동포가 그 틈새에서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과 북이 잘 나가면 해외동포의 역할이 그만큼 줄어들고, 남과 북이 삐걱거릴 때는 해외동포의 역할이 그만큼 커집니다. [중략] 이민의 삶은 곧 독립투쟁이 였습니다. 이 전통은 그 후 민주화투쟁으로, 그리고 통일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역사와 전통을 우리는 이어나가야 합니다.”

                                                - 이행우, “민족 운동이 다시 절실해졌습니다.”

                                                                        ( 2007 년 12 월 30일) 중-

위의 인용 글을 통해 우리는 새해를 여는 한 재미 운동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으리라. 이행우 선배님(77)을 처음 뵌 것은 2005년 뉴욕, 유엔주도 NPT(비핵확산 조약) 연간 검토가 있던 때였다. 그 때 평통사 간부들도 처음 “뵈었는데 유엔 주변에서 열리는 행사의 비디오 기록 차 갔던 나는 우연히 이행우 선배님과 평통사를 통해 미주 동포 사회와 한국 평화 운동의 연대를 목격했다. 최근 프린스턴 정크션으로 멀리 이사를 가신 선배님을 인터뷰를 구실로 실례를 무릅쓰고 1월 7일 뉴욕까지 오시게 했다.  


△ 이행우 선생님, 뉴욕, 2008년 1월 7일

이행우 선배님은 (미주 동포 사회의 한 구심점이 되는) 미주동포전국협회(NAKA: 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s) 현직 회장이자 6·15 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이시다. 또한 오랜 기간 미 의회, 행정부, NGO 등을 상대로 한반도 평화 통일과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를 위해 그늘에서 교육과 로비, 포럼 조직활동을 왕성하게 하신 분이다. 대표적인 것이 남, 북한 대표, 미 상하원 의원들이 참석한 2004년 7월 20일 미상원에서 있었든 의원포럼, “Korean Peninsula Peace & Security Forum” 이다. 퀘이커 교도인 선배님은 AFSC(전 세계 대상 평화 봉사), FCNL(미국 정부, 국회 대상 교육 및 로비) 등 퀘이커 기관들과도 오랫 동안 일을 꾸준히 하셨다. 선배님은 항상 겸손하심과 성실함으로 철없고 게으른 나를 놀라고 자아반성하게 하시는 분이다.

설렁탕으로 간단히 저녁을 때운 뒤 커피숍 등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5시간이 넘은 인터뷰를 했다. 선배님께서 사전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충분히 주셔서 더 여쭤 볼 것이 많아진 것도 있었지만 선배님의 일생 자체가 미국 동포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아서 쉽게 끝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그 많은 중요한 활동과 중요한 역사를 짧은 지면에 다 담지 못하고 몇가지 활동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것을 이해하길 바란다.

미국에 오시기 전 삶과 미국에 오신 계기를 간단히 소개하신다면?

1930년, 전북 익산에서 자작농의 (14남 2녀 중)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문리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수학 선생으로 일했다. 한국에서 퀘이커 모임이 태동할 때 같이 일하던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퀘이커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1968년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퀘이커 교육기관인 펜들 힐(Pendle Hill)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왔고 그곳에서 주로 퀘이커 역사를 공부하였다. (펜들 힐에는 함석헌 선생님이 추천을 해서 초청하게 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펜들 힐에서는 전액 장학금으로 공부했으나 주말에는 두고 온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밖에 나가 일하기도 했다. 펜들 힐 이후 컴퓨터 공부를 했고 취직한 2년 후에 가족을 초청해서 같이 살 수 있었다. (현재 가족으로 부인, 결혼한 아들 두 분, 두 손자가 있으시다.)

미주 동포 운동을 시작하신 계기와 그 후 활동은?

1970년 유신 정권 때, 함 선생님이 미국에 오셔서 순회강연 하실 때마다 동반 안내를 해 드리면서 미주 동포 사회의 여러 모습과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1974년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된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에 참여하였다. (2대 회장역임) (그 후 80년 5·18 광주 항쟁은 미주 운동사의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때부터 미주 운동이 국내 민주화 운동 지원에서 동포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 운동으로 양적, 질적 변화를 했고,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운동의 당당한 주체로 해외(미주) 운동의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다). 당시 미주 운동권은 “선민주 후통일”, “선통일 후민주” 즉, 민주화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는 보수, 통일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는 진보, 양 진영으로 갈라져 서로 대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양 진영의 화해와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내가 관계하고 있던 AFSC주최로 Korea Conference (3회: 1981, 1982, 1983년)를 개최하도록 하였고, 책 “Two Korea One Future?”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역출판)을 발행(1987년)하도록 했다.

1980년 9월 AFSC 대표가 미국 민간단체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였고 나는 1982년 AFSC 2            차 북한방문대표로서 방북하고, 점점 통일운동에 빠지게 되였다  

1986년 한겨례미주홍보원(Korea Information & Resource Center)을 워싱턴 DC에 설립(이사            장)하고, 1987년Korea Support Network 을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90년 범민족대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조직하는데 참여 일조 하였다.

1994년 미주동포전국협회(NAKA)를 결성하고,

1995년 미주평화통일연구소(98년 통일학연구소로 개명)를 설립하고, 북미주조국통일동포회의            (98년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으로 발전)를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남북이 공동            행사를 위한 준비모임, 소위 말하는 95년 베이징(Beijing) 회담, 96년 바르샤바            (Warsaw) 회담을 조직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6.15민족공동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 2007 남북정상회담 축하 재미동포 통일시대 한마당(2007년 10월 13일,뉴저지)

NAKA(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s) 의 창설계기와 활동은?

미중 국교 정상화, 월남전 종식 등에 퀘이커가 중재자(Mediator) 역할을 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남북통일에 퀘이커가 중재자가 될수 없을가 고민하던차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친분이 있는 한완상 박사가 통일원 장관이 되었다. 이때다 싶어 서울에서 퀘이커 모임을 함께 시작한 조동설 형이 서울에 가서 통일원 장관을 만나고 나는 평양에 가서 조평통의 해당 일꾼을 만나 우리의 뜻을 전하였다. 양쪽이 똑 같은 뜻으로 “여러분들이 미국에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바꾸도록 운동하는 것이 현재 여러분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값 있는 일입니다”라고 하는 말만 듣고 돌아 왔다. 그때 미국교회협의회 회장이던 이승만 목사와 상의, 재미동포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운동단체를 창립하기로 합의하고, 1년 5개월동안의 조직작업 후 94년 10월29일, 뉴욕에서 미 전국에서 150여명의 대표들이 모여 NAKA의 창립총회를 가졌다.

NAKA는 1. 재미동포 권익 신장, 2. 한국 문화 알리기, 3. 타 민족과의 연대, 4.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이바지하는운동을 그 목적으로 내세우며 미의회와 행정부가 대한반도 정책을 올바로 세우도록 교육, 홍보, 로비 활동 등을 주로 하고있다.

[NAKA 웹사이트 www.naka.org를 보면 미국 내 아시아 인은 전체 미국인 인구의 3.6%, 그 중 재미 한국 동포는 11%로 100만 여명에 이른다 한다. (2000년 미국 인구 통계) NAKA는 2001년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자주연합), 재미동포전국연합회(동포연합)와 재미민족운동단체협의회(민협)을 결성한 재미민족운동단체 3대주류의 하나이다.]

평통사 회원들에게 새해 인사 말씀과 당부는?

평통사는 평화통일운동, 대미자주운동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던 당시 기치를 우뚝 세웠고 지금도 가장 모범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을 방문 할 때마다 회원이 늘어나고 실천, 연구 활동이 더 활발한 것을 보고 감탄했으며 고맙게 생각했다. 계속 초심을 잃지 말고 매진해 주길 바란다.

(2006 년 6월, 선배님은 큰 교통 사고로 무의식에 이르시고 머리에 15 바늘땀을 하셔야 했다. 선배님은 그것을 더 주의하고 더 부지런하라는 신의 경고로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죽음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현재의 남은 삶은 보너스로 주어진 것으로 보시며 더 열심히, 감사히 삶을 살게 되셨다고 한다. 선배님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 6.15 공동선언 실천 민족 공동위원회 미국 위원회 개최로 2007년 10월 13일, 뉴저지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실천 2007 남북 정상회담 축하 재미동포 통일시대 한마당에서 남, 북한의 술로 축하주를 나누시는 이행우 선생님(비디오 스틸)



<이행우 선생님 글 전문>

민족운동이 다시 절실해졌습니다

이행우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친북좌파정권’ 이라고 내내 몰아붙이던 한나라당이 집권하였으니 민족운동이 다시 절실해졌습니다. 그 동안 남과 북의 꾸준한 노력에 기대어 느슨해진 우리들 자신을 바짝 다잡아 다시 시작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식입장은 아니었지만, 한나라당은 남과 북의 정상(최고위급)이 처음으로 만났던 역사적인 2000년 6월 15일을 ‘국치일(國恥日)’이라 험하게 깎아 내리면서 ‘반북, 반김 대회’를 서울 한복판에서 열어 북조선의 국기와 김정일 위원장의 허수아비를 불태우길 서슴지 않았습니다. 상호주의를 들먹이며 남북협력을 비방하고 거부해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때라 싶게 미국과 일본은 한나라당의 집권을 환영하면서 동맹관계를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민족의 자존과 자주성 문제,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있는 통일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과 접근을 조심스럽게, 때로는 단호하게 보여 온 터 여서 한반도 문제를 자기네 국익에 맞게 조정해 온 미국으로서는 당황해왔던 게 사실입니다. 한민족의 자존과 한반도 통일을 전혀 원치 않는 일본으로서도 앓는 이가 빠져 이 참에 이를 악물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한 마디로 한미일 동맹을 이제야 말로 확실하게 다져 북조선을 몰아가면서 한국을 요리하려는 속셈입니다. 한미일 동맹이란, 기실 군사독재정권을 떠받혀주던 지렛대 아니었습니까? 그때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2012년으로 약속된 군권(軍權)회복마저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을 대통령 당선자가 하고 있습니다. 민족자존의 기본인 군권을 미국이 갖고 있어야 나라가 안전하다는, 군사정권의 논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 지난 두 정권의 10년은 분단독재정권, 군사독재정권이 짜놓은 사회구조를 해체하는 데 온 힘을 기우려 왔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권력과 재벌과의 검은 고리(정경유착)를 끊고, 권력과 언론과의 밀월관계(권언유착)를 청산하고, 사회를 짓누르던 권위주의를 없애는 일을 해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단구조를 통일지향적 평화구조로 바꾼 일은 크게 평가 받아야 마땅합니다. 물론 아쉬움도 많지만, 50년 동안 굳어져 온 독재사회체제를 해체하는 데 쓴 10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 아니며 결코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 전제 작업 없이는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민족국가를 다시 세우고, 문화국가로 거듭 나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 설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한 발짝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가치체계를 정립하여야 할 중요한 시기에 수구 세력인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습니다. 그간의 해체작업이 결실을 맺지 못 하고 다시 정경유착, 권언유착, 권위주의, 남북대결의 시대로 되돌아 갈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엉뚱한 역사적 회귀(回歸)는 미국자본주의의 세계화 욕구, 즉 신자유주의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날로 깊어 가는 외국자본 의존도, 점점 심해지는 수출의존도, 깊어 가는 부의 양극화 현상, 일자리가 줄어드는 산업구조 등은 경제성장정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심각히 고민해야 할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경제제일주의로 사회를 몰고 가고 있으니 앞으로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당장 재벌의 돈벌이가 좋아지고, 권력과의 갖가지 유착으로 사회가 부패하여 검은 돈이 그전처럼 돌고, 얼토당토않은 토목사업(운하공사)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푼돈이야 돌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습니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명박 정권이 통일문제를 전적으로 비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미국과 일본이 그린 그림 속에서 그간에 힘들게 이루어낸 성과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생색을 내려 들 것입니다. 통일문제를 필요에 따라 국민을 통치하는 방편으로 교묘하게 써온 그들 아니었습니까? 미국과 일본의 후원, 비교적 튼튼한 당, 보수 층의 절대적인 지지, 두터운 영남의 지지기반, 군부와 재벌의 지원을 등에 업고 그전 식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른바 ‘강력한 리더십’을 내세워 민족과 민중, 민족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제쳐두려 하겠지만, 저항 또한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어쩌네 저쩌네 해도 통일의 당위성과 평화의 맛에 익숙해진 국민을 대결구도로 다시 몰고 가기도 힘들 뿐더러 민주화운동, 민족운동을 통하여 개발, 발전시킨 사회가치와 문화가 나름대로 대중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수구세력의 재집권과 청산되어 마땅한 사회가치체계로의 회귀는 민족운동이 원점으로 되돌아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6월 15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하자는 데까지 남북관계가 발전했지만, 이제 더 이상 6.15공동선언 실천운동에만 매달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폭을 넓혀, 그간에 추구해온 민족의 자존문제, 민중의 참된 삶의 문제, 신자유주의를 소화할 수 있는 문화문제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바탕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이 마땅하기에 우리는 가야 합니다.

   그간의 역시를 뒤돌아보면, 남과 북, 해외동포와의 관계는 매우 특수합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삐걱거릴 때는 해외동포가 그 틈새에서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과 북이 잘 나가면 해외동포의 역할이 그만큼 줄어들고, 남과 북이 삐걱거릴 때는 해외동포의 역할이 그만큼 커집니다. 이제 다시 해외동포의 역사적 역할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 재미동포는 아주 훌륭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민선조는 비단 삶의 터전을 미국으로 옮긴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민의 삶은 곧 독립투쟁이 였습니다. 이 전통은 그 후 민주화투쟁으로, 그리고 통일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역사와 전통을 우리는 이어나가야 합니다.    

역사란, 인생살이와 마찬가지로 순조롭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비틀거리고, 때로는 뒷걸음질을 치기도 하지만, 끝내는 앞으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각오와 투쟁으로서 희망을 다시 현실화 시키는 데에 우리의 힘을 다시 모을 때입니다.       

12/30/2007      이행우 <미주동포전국협회 회장>  <6.15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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