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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 평화누리통일누리:::98호::: [사람] 60년 동안 외면당한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 월미도귀향대책위 한인덕 회장 인터뷰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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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60년 동안 외면당한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월미도 미군폭격 귀향대책위원회 한인덕 회장 인터뷰>

김 강 연 (인천평통사 교육부장)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각종 전쟁 기념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전쟁은 기념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와 화해를 통해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인천에서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를 하느라 온 도시가 떠들썩하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군 폭격으로 고향땅을 잃고 죽어간 월미도 원주민들의 억울한 사연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전쟁의 또 다른 아픈 역사이다.

가을 장마비가 내리는 날, 월미도 공원 입구에서 2,000일이 넘게 농성투쟁을 벌이고 있는 월미도 미군폭격 귀향대책위 한인덕 회장님을 만나 60년 한 맺힌 사연을 들어 보았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재연행사를 한다고하던데요,

 

재연행사라면 그 당시 일어났던 것 그대로 행한다는 것 아니냐. 그러면 실지 상황으로 우리 조상들 죽인거 연습한다는 것인데 말도 안된다. 월미도 주민 두 번 죽이는 짓이다. 우리가 국방부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 영혼이라고 달래게 위령제 한다고 지원해 달랬더니 못준다고 하더라. 월미도 주민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거냐. 사람 죽여 놓고, 5분 10분이면 갈 고향땅을 60년이 되도 못 가고 있는데... 참 분통 터진다.

9월 15일 월미도 위령제때“인천시장님 오십시오”전화했는데, 새벽부터 인천상륙작전 행사 뛰기 때문에 힘들다 하더라. 위령제는 오후 2시니까 가는 길에 잠깐 들릴 수 있다. 성의가 있다면 송영길 시장이 당연히 와야 한다. 재연행사는 가는데 이곳은 안온다면 말이 않되는 거지. 안되면 부시장이라도 오든가. 국민이 억울함을 당했는데 그 행사는 거대하게 치루면서 국민의 애통을 알아주고 해결해 줘야 할 사람들이 나몰라 하고 그런다면 어찌 이게 선진국이고 민주국가로 가는 정부냐.

 

인천상륙작전 당시 월미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인천상륙작전 할 때 (미군이) 월미도 주민들을 먼저 죽였다. 주민들 사는 동네부터 폭격을 했다.

월미산 높이가 2~3m정도 줄어들 정도로 퍼부어 댔는데, 자기네 미군부대는 하나도 안 건드렸다. 자기네가 군용지 만들려고 계획적으로 민간인을 죽인거다. 해방되자마자 미군 경비대가 들어왔다고 한다. 미군 경비대하고 마을하고 거리가 20~30미터 밖에 안 떨어져 있었고, 인민군은 저산 너머 지금 월미도 문화의 거리 바닷가쪽에 있었고 우리는 그 반대편(동쪽)에 있었어. 인민군은여기 마을에는 내려 오지도 않았다. 인민군이 있는 서쪽에다 먼저 폭격을 했으면 사람들이 여기 있었겠어? 다 도망갔지.

당시 동네에 80여가구 600여명이 살았는데 피란 가라는 말도 없고 삐라도 없고 사전에 아무 말도 없이 자는 사람들을 공격을 한거야. 9월 10일 새벽에 첫 폭격을 하고 11일은 안하고, 12일, 13일, 14일 내리 폭격을 했대.

이범기 아저씨는 직접 폭격장면을 봤대요. 새벽녘 급작스런 폭격에 놀라 사람들이 갯벌로 도망가니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희끗희끗 보일거 아니예요? 그 사람들에게 또 기관총을 쏘니깐 서로 뻘을 발라주고 뻘밭에 뒹굴고 납작 엎드려서 숨어있었는데, 점심때쯤 또 때리고 저녁에 또 때리고 3차례를 때렸는데 마을터는 새카맣게 타서 없어져 버렸대.

김포 사람들도 여기가 다 보였는데“우와 인천 월미도 난리났다”이랬대요. 정지운씨는 어머니랑 송도 외할머니집으로 피란가고 아버지는 여기 있었는데, 송도에서 보니깐 여기가 불바다가 되고 시뻘것게 되니깐 정지운씨 어머니가“니 아버지가 죽었다”이러면서 달려왔는데, 사람들이 새까맣게 다 탔는데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래. 
정지운씨는 아버지가 금이빨 한 것을 보고 자기 아버지인 것을 알고 대충 가마니로 덮어 놨대. 나중에 묻을려고. 그런데 계속 들이 퍼부어대서 10일날 나왔다가 못 들어 간거지. 그게 끝이야. 그때 나와서 지금까지 못 들어 간 거지. 월미도 둑길 끝에서 미군 헌병이 총 들고 민간인 출입금지 시키니까 들어갈 엄두를 못 낸 거야. 제일 속상한 게 인천상륙하고 그냥 갔으면 시신이라도 수습했지. 그런데 자기네가 여기다 부대를 만들기 위해 여기 들어와서 불도저로 싹 밀어서 흔적도 없어. 그래서 그때 죽은 월미도 사람들은 유골도 없어.

 

회장님 가족은 어떻게 되셨나요?

 

나는 여기 시집 온 며느리에요. 우리 시댁은 돌아가신 분은 없어요. 시부모님 아홉 식구가 마을에 사시다가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누만 남고 나머지는 피난을 갔데요. 우리 시누가 봤는데 동사무소, 이발소에 폭탄이 털어져 불바다가 되니깐 뒷산의 방공호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갯벌로 도망갔는데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비행기에서 조종사가 보일정도로 낮게 떠서 다 쐈다는 거야.

우리 시댁도 그때 도망나와 고향으로 못 들어가고, 하인천, 대한제분 앞에 판자촌 치고 살았지. 맨 처음엔 얼음창고에 들어가서 살다가 그것도 못살게 하니까 가마니떼기 치고 거지같이 산거지. 피난 가는 사람들은 이불이라도 가져왔지, 월미도 사람들은 자다가 폭격당해 엉겁결에 도망나와서 빨가벗고 나온거야. 그래서 월미도 사람들이 배우지 못하고 무식하고 돈 가진 사람도 없고 다 어려워 고생 참 많이 했지. 월미도 마을이 어촌이었기 때문에 조개 캐고, 고기잡이로 먹고산 사람들인데 배운 기술도 없고 먹고 살 길이 없었던 거지.

 

전쟁 끝나고 고향마을로 왜 돌아가지 못하셨나요?

 

상륙작전 하고 미군이 마을을 싹 밀고 미군부대로 만들어 버렸지. 전쟁 끝나고 나서 53년도에 표양무 시장한테 얘기했고 63년도에 김정녀 시장한테 얘기 했고 계속 제기를 했는데도, 미군철수하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주마 하고서, 71년 미군이 가고 국방부가 들어서면서 71년부

터 75년사이에 국방부 땅으로 만든거야, 정부가 빼앗은 거지. 국방부와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기관인데 월미도 사람들 생명과 재산을 빼앗긴 거야.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킨다고 들어와서는 지네 땅으로 만들어서는 2001년에 인천시에 팔아먹고, 인천시민 세금낸 돈으로 빼앗은거 밖에 안되거지.

전쟁 끝나고 나서, 쫓겨나서 63년, 52년도에 습자지에 쓴 너덜너덜한 진정서가 아직도 있어.

사람들 이름 다 쓰고 도장찍어서 표양무 시장한테 냈어. 63년도에도 만석동 차기석 동회장이 확인서도 써 준것도 있어. 그런데 토지대장 하나 없다고 이러는 거야. 전쟁나서 군부대가 들어가 있어서 우리가 (토지대장) 못한거지 안하고 싶어서 안했나. 이건 국방부가 법 만들어서 국민의 권리를 뺏은 거야. 지금 우리보고 니들이 법 만들어서 다시 찾아 가라는건데 우리가 어떻게 법을 만들어. 법 타령만 하고 있는 거야. 전쟁이 나지 않았으면 이런 꼴을 안 당했을텐데 드러운 놈의 법.

 

2,000일 넘게 농성투쟁을 하시면서 어려운점은 없으셨나요?

 

나는 유족은 아닌데, 이 일에 대해 열심을 갖고하는 것은 영령들이 불쌍하고 억울한 마음이 나한테 들어오는 거야. 2005년에 과거사위원회가 발족해서 2006년 4월에 월미도 사건도 신고를 했어. 2007년에 조사에 들어가서 9월에 미국가서 자료조사하고, 2007년 12월부터 발표를 하려고했으나, 미군에 대한 거라 굉장히 민감하게 봐서 과거사위원회 상임위원들이 발표를 3차례 미루다가 발표를 했어. 한번 떨어지고 두 번 떨어지고 3번째 발표 때는 세수도 못하고 일이 손이 안 잡히더라고. 아주 가슴을 조리고 태운거야. 6시 넘어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너무 좋고 참기뻐서 나 혼자 박수치며 울었어. 결정문 받아 들고 너무 좋았는데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뭉겨대는 모습 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요.

인천시에서는 정부에서 먼저 해결 방안을 내놔야 한다고 하는데, 중앙정부는 인천시로 미루고 절로 밀구 일루 밀구 계속 미루면서 일을 하지는 않아. 이런 행정을 바라보고 힘없는 사람은 이러다가 끈기 없는 사람은 때려치고 말겠어. 남자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 때려쳤을꺼야. 내가 여자니깐 악착같이 억울하고 분해서.. 이 억울함은 풀어줘야 된다. 이 맘만 먹고 여기까지 왔어요.

여기 천막치고 농성한지 7년째인데, 사람들이교대하면서 잠을 자는데 차 때문에 얼마나 시끄러운지 잠을 못 잔다. 처음에는 천막을 쳤는데 비는 새고 금방 해결은 안 되고 그래서 철거촌에 가서 판자를 뜯어다가 이걸 지었는데, 화물차가 몇번 들이 받았다. 7년이 넘게 농성하는 사이에 다섯분 유족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김현수 어르신은 공원 생기고 나서 2007년도 첫 위령제 하는날‘우리 집터에 저렇게 잘 지어났네’그러시고 쓰러져서 1년 내내 병원에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 지금 살아계신 분들도 암에 걸리고 아프셔서 무척 힘들어요.

그래도 내가 감사한 것은 내가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데도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고 우리 마음을 같이 동조하고 나하고 똑같은 마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도와주는 시민단체나 주변 분들이 힘이 되어주어요.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내셨는데 답은 있었나요?

노근리나, 경주 기계촌이나 울산에도 미군 폭격 많았데요. 그런 데는 미군폭격이 우발적인 것으로 나와요. 그런데, 우리는 우발적인 것이 아

냐, 다른 지역은 북한군과 민간인이 섞여 있었다고 핑계를 대지만, 월미도 사건은 인천상륙을 하기위해 미국 정부가 사람들을 계획적으로 죽이고 내쫓고, 살아서 도망가는 사람들 기관총으로 쏴 죽이고 한거지. 인민군에게 새나갈까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사전에 아무 예고도 없이 주민들한테 폭격한거야. 실수로 죽인것과 계획속에서 살인한것은 다른거지. 미국 정부라 할지라도 민간인들 죽인 것은 자기들이 불법을 행한거야. 월미도 사건은 국제법 인도법에 다 걸린다. 불법 한것을 책임지고 사과를 하고 60년 동안 고향도 못들어가는 이 모든 한을 미국이 풀어줘야 된다. 그래서 미대사관에 진정도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도 보내고 하는데 답이 없어요.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월미도 문제 해결될 때까지 싸워야지. 귀향대책 수립될 때까지. 15일 위령제도 있는데, 그날 인천시와 국방부가 월미도에서 인천상륙작전 재연행사 한다는데 가만 있을 수가 없다. 그 자리에 가서 1인시위라도 해서 우리 맘을 표현해야지 안된다. 억울해서.

사람들이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월미도 미군폭격 주민들 이야기는 몰라요. 앞으로 많은 사람들한테 알려져서 월미도 주민과 함께 해 주시길부탁드립니다.

<양권식 76세, 당시 월미도 주민>

“10일날 새벽에 휘발유를 끼얹는 줄 알았어. 그게 네이팜 탄이래. 그게 떨어지고 나면 완전히 불바다가 되는거야. 비행기가 서쪽에서 떠서 북쪽으로 가는데 우리 동네만 폭격하고 가는거야.. 그 옆에 미군부대는 놔두고. 그 다음에 기총사격하고... 나도 그당시 팬티바람으로 갯벌로 기어 도망갔어. 낮에 도망 갔던 사람들이 꾸역꾸역 왔지, 가보니 집이 다 탔어. 아무것도 남은게 없어. 가족들은 다 죽은거야.

자는 사람들은 모두 몰살한거야. 우리는 몇 백명이 죽었는지 몰라. 양놈들이 시신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렸지. 그 사람들 한 풀어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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