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8] 제3차 평화발자국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사람들' 행사(국제신문), 오마이뉴스 기사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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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평화발자국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사람들' 행사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4-11-18 19:58:05
- / 본지 25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그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조선으로 출병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명대사 유정과 교섭하여 조선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선린외교의 상징인 조선통신사를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했다.
'통신(通信)'이란 신뢰를 나눈다는 의미의, 조선과 일본만 유일하게 사용하던 외교용어다.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우호를 상징한다.
조선통신사 방문 200여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12번 일본을 방문했으며 이 기간 동안 조일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을 막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교류와 선린과 화합이다. 북미관계, 남북관계도 대화로 풀어야 해답이 나온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사실상 무기 연기시키고 미국 MD 가입을 기정사실로 만든 46차 SCM 결과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상황. 15일, 부산 평통사의 3차 평화발자국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일구어낸 조선통신사의 발자국을 따라나서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조선통신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손문욱(孫文彧, 또는 이순욱)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손씨인지, 이씨인지 확인이 안 될 정도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전후 1607년까지 활동한 조선의 외교관이다.
그는 임란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나 일본에서 상급 무사로 승진했으며 전쟁 말기 일본 진영을 탈출하여 조선으로 귀국하였고 조선은 그를 만호(萬戶)직에 임명하였다. 명나라에도 일본의 군사정보를 전달했다고 하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쓰러지자 그가 조선군을 이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쓰시마(대마도)번이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자 손문욱이 쓰시마 협상을 위해 기용되었고 그는 "조선과 쓰시마의 평화는 양국 백성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안고 협상에 임했다. 그는 협상의 전제로 조선인 포로 송환과 전쟁에 대한 사죄를 못박았으며, 이에 따라 조선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정식 명칭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다.)
그는 조선, 명, 일본 3국 스파이로 오해될 만한 이력을 가졌지만 3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국제적 인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국제관계에서의 평화가 백성의 행복이라는 자각이 있던 이 외교관의 족적은, 한미일 삼각동맹의 올무에 갇혀 국제적인 대결과 항시적인 전쟁위기에 처하게 될 지금 우리 정세에서 외교 당국자들이 꼭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400~500명에 이르렀으며 한양을 출발하여 에도(도쿄)까지 반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한양에서 부산까지 간 후, 부산에서 쓰시마(대마도)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배를 이용하고 오사카에서 에도까지는 육로를 이용하는, 왕복 3천키로가 넘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다.
부산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국내 여정과 일본에서 전개되는 국외 여정을 매개했다. 평화의 관문이었던 셈이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육로에는 말 1000여 필을 포함한 약 2000여 명이 대행렬을 이루어 행진하였다. 조선통신사의 행렬이 시가지를 통과할 때 길가에는 수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통신사 행렬을 보려고 앞다투어 나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임란 때 끌려온 조선인들이 있었고 향수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조선통신사는 도쿠가와 막부의 경사나 쇼군 계승이 있을 때 방문했으며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통신사의 총책임자로 국서를 받들고 가는 정사 외에 조선통신사에는 막부의 요청으로 특별히 파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의원, 영원, 마상재인으로 지금의 의사, 화가, 서커스의 기예단원이다.
영원들은 통신사가 가는 곳의 정경이나 의례 장면을 그렸는데 달마도로 유명한 화가 김명국은 그림을 요청하는 일본인의 수가 너무 많아 팔이 아파 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마상재는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다. 일본인들이 "조선국의 마상재는 실로 절묘하고 기묘한 기예다"며 놀라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류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이 된 셈이다.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합법적인 교역의 대상으로
참가자들은 일본인들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설치했던, 왜관을 둘러보기 전에 우선 부산박물관으로 향했다. 부산박물관에는 왜관은 물론, 조선통신사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전시물들이 많이 있었다.
왜관은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通商)하던 곳이다. 행정기관을 이르기도 하며,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이기도 하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왜관을 여러 곳에 설치했는데, 해안가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합법적인 교역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무역을 장려하고 왜구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부산포, 내이포(진해), 염포(울산)에 있던 (삼포) 왜관은 삼포왜란 등을 겪는 등 말썽이 많았다. 임진왜란 전에는 부산포에만 왜관을 두는 단일 왜관제도가 운영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관은 완전히 폐쇄된다. 임진왜란 후 1607년 국교가 재개되면서 부산포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두모포(현 부산 동구청 부근)에 왜관이 들어섰다가 점차 교역량이 늘어나고 두모포 포구의 수심이 얕고 배를 정박하기에 협소하자 1678년 초량(현 부산 용두산공원 부근)에 신관을 지어 초량왜관으로 옮겼다. 조선과 교역을 원하는 일인들은 모든 업무를 초량왜관에서만 처리하도록 엄격히 규율되었다.
그 때문에 초량왜관은 조일간 교역이 늘어나면서 점차 내부 시설이 넓어지고 규모가 확대되어 부지면적이 11만 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초량왜관은 높이 6자, 둘레 1273보의 돌담으로 읍성처럼 쌓았고 일인들이 담을 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6개의 감시 초소를 두어 지켰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공사관이 초량왜관에 설치되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거주지와 교역은 초량왜관에 한정되지 않게 된다.
부산박물관 경내에는 당시 초량왜관에 대한 조선의 통제와 감시 정도를 잘 보여주는 약조제찰비(約條制札婢)가 있다.
왜관이 설치되어 대마도 관인(官人)과 왜인이 상시 거주하게 되고 또한 일본 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조선법이 무시되고, 밀무역·잡상행위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따르자 조선은 일본측과 여러 차례 약조를 맺어 위반자를 엄중히 단속하였다.
그래도 피해가 줄어들지 않자 168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尹志完)이 돌아올 때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교섭관계를 위임받고 있던 대마도주와 전문 5개조에 달하는 약조를 체결하고, 이것을 한문과 일문(日文)으로 각각 비석에 새겨 조선측은 수문(守門) 안에, 일본측은 왜관의 경계 지역에 세워서 알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금하고 있는 경계선 밖으로 함부로 나오는 일이 있으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② 노점상의 자릿세를 주고받는 것을 현장에서 잡으면 준 자와 받은 자 모두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③ 저자를 열 때 각방에 몰래 들어가 비밀리에 물건을 사고 파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할 것. ④ 조선 관리들은 일본인들을 끌어내어 구타하지 말 것. ⑤ 피차에 죄를 범한 사람은 모두 관문 밖에서 집행할 것.
조선의 기세가 아주 등등하다. 왜관 내에서 저질러진 범죄를 조선 내에서 치리하겠다고 규정한 5번을 보면 범죄를 저지른 주한미군에 대하여 수사권도, 재판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지금 우리 처지와 선명히 대비된다.
해설사 최광섭 목사는 "자주권이 있어야 평등해질 수 있다"며 부산 사람들의 왜관 운영 경험을 이어받아 부산이 앞장서서 이 땅의 자주와 평등의 기운을 일으키자고 고무하였다.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해원 공연
참가자들은 초량왜관 터가 남아있는 용두산 쪽으로 이동하여 그곳 일대를 둘러본 후 용두산 공원 상설 무대로 이동했다.
부산평통사는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연 올해 평화발자국을 마감하며 전쟁에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해원 공연을 마련했다. 경성대 하연화 교수와 한사랑교회 방영식 목사가 동참해주셨다.
사회를 맡은 최광섭 목사는 그동안 진행된 평화발자국을 소개하고 전쟁이 만든 도시 부산을 평화의 도시로 만들어내고 통일 실현에 기여하자고 호소했다.
주말을 맞아 공원을 찾은 부산 시민들이 쌀쌀한 날씨에도 공연에 동참하여 뜻 깊은 행사가 되었다.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부천 평통사 신정길 대표는 "임란 때 부산진성에서 옥쇄하신 저의 14대조께서도 오늘의 위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부산에 기행 프로그램이 많이 있지만 평화발자국은 테마를 정하고 그것을 일관된 흐름으로 진행하며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평화발자국 코스들을 모아 한반도 평화지도를 만들어내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내년 부산 평화발자국의 테마는 일제강점기를 이겨낸 부산 사람들이다. 더 풍부하고 더 알차며 더 재미있는 모습으로 부산 시민들을 만날 것을 약속드린다.
(*이 글에서 다룬 내용들은 해설사 최광섭 목사가 제공한 자료에 근거한 것입니다.)
'통신(通信)'이란 신뢰를 나눈다는 의미의, 조선과 일본만 유일하게 사용하던 외교용어다.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우호를 상징한다.
조선통신사 방문 200여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12번 일본을 방문했으며 이 기간 동안 조일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을 막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교류와 선린과 화합이다. 북미관계, 남북관계도 대화로 풀어야 해답이 나온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사실상 무기 연기시키고 미국 MD 가입을 기정사실로 만든 46차 SCM 결과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상황. 15일, 부산 평통사의 3차 평화발자국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일구어낸 조선통신사의 발자국을 따라나서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조선통신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손문욱(孫文彧, 또는 이순욱)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손씨인지, 이씨인지 확인이 안 될 정도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전후 1607년까지 활동한 조선의 외교관이다.
그는 임란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나 일본에서 상급 무사로 승진했으며 전쟁 말기 일본 진영을 탈출하여 조선으로 귀국하였고 조선은 그를 만호(萬戶)직에 임명하였다. 명나라에도 일본의 군사정보를 전달했다고 하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쓰러지자 그가 조선군을 이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쓰시마(대마도)번이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자 손문욱이 쓰시마 협상을 위해 기용되었고 그는 "조선과 쓰시마의 평화는 양국 백성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안고 협상에 임했다. 그는 협상의 전제로 조선인 포로 송환과 전쟁에 대한 사죄를 못박았으며, 이에 따라 조선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정식 명칭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다.)
그는 조선, 명, 일본 3국 스파이로 오해될 만한 이력을 가졌지만 3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국제적 인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국제관계에서의 평화가 백성의 행복이라는 자각이 있던 이 외교관의 족적은, 한미일 삼각동맹의 올무에 갇혀 국제적인 대결과 항시적인 전쟁위기에 처하게 될 지금 우리 정세에서 외교 당국자들이 꼭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400~500명에 이르렀으며 한양을 출발하여 에도(도쿄)까지 반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한양에서 부산까지 간 후, 부산에서 쓰시마(대마도)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배를 이용하고 오사카에서 에도까지는 육로를 이용하는, 왕복 3천키로가 넘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다.
부산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국내 여정과 일본에서 전개되는 국외 여정을 매개했다. 평화의 관문이었던 셈이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육로에는 말 1000여 필을 포함한 약 2000여 명이 대행렬을 이루어 행진하였다. 조선통신사의 행렬이 시가지를 통과할 때 길가에는 수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통신사 행렬을 보려고 앞다투어 나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임란 때 끌려온 조선인들이 있었고 향수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 <조선통신사 경로> | |
ⓒ 조선통신사 역사관 |
조선통신사는 도쿠가와 막부의 경사나 쇼군 계승이 있을 때 방문했으며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통신사의 총책임자로 국서를 받들고 가는 정사 외에 조선통신사에는 막부의 요청으로 특별히 파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의원, 영원, 마상재인으로 지금의 의사, 화가, 서커스의 기예단원이다.
영원들은 통신사가 가는 곳의 정경이나 의례 장면을 그렸는데 달마도로 유명한 화가 김명국은 그림을 요청하는 일본인의 수가 너무 많아 팔이 아파 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마상재는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다. 일본인들이 "조선국의 마상재는 실로 절묘하고 기묘한 기예다"며 놀라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류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이 된 셈이다.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합법적인 교역의 대상으로
참가자들은 일본인들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설치했던, 왜관을 둘러보기 전에 우선 부산박물관으로 향했다. 부산박물관에는 왜관은 물론, 조선통신사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전시물들이 많이 있었다.
왜관은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通商)하던 곳이다. 행정기관을 이르기도 하며,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이기도 하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왜관을 여러 곳에 설치했는데, 해안가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합법적인 교역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무역을 장려하고 왜구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부산포, 내이포(진해), 염포(울산)에 있던 (삼포) 왜관은 삼포왜란 등을 겪는 등 말썽이 많았다. 임진왜란 전에는 부산포에만 왜관을 두는 단일 왜관제도가 운영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관은 완전히 폐쇄된다. 임진왜란 후 1607년 국교가 재개되면서 부산포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두모포(현 부산 동구청 부근)에 왜관이 들어섰다가 점차 교역량이 늘어나고 두모포 포구의 수심이 얕고 배를 정박하기에 협소하자 1678년 초량(현 부산 용두산공원 부근)에 신관을 지어 초량왜관으로 옮겼다. 조선과 교역을 원하는 일인들은 모든 업무를 초량왜관에서만 처리하도록 엄격히 규율되었다.
그 때문에 초량왜관은 조일간 교역이 늘어나면서 점차 내부 시설이 넓어지고 규모가 확대되어 부지면적이 11만 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초량왜관은 높이 6자, 둘레 1273보의 돌담으로 읍성처럼 쌓았고 일인들이 담을 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6개의 감시 초소를 두어 지켰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공사관이 초량왜관에 설치되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거주지와 교역은 초량왜관에 한정되지 않게 된다.
부산박물관 경내에는 당시 초량왜관에 대한 조선의 통제와 감시 정도를 잘 보여주는 약조제찰비(約條制札婢)가 있다.
▲ <약조제찰비> 높이 140cm, 너비 68cm의 이 비는 왜관 운영에 대한 조선인의 당당한 기세를 잘 보여준다. | |
ⓒ 박석분 |
왜관이 설치되어 대마도 관인(官人)과 왜인이 상시 거주하게 되고 또한 일본 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조선법이 무시되고, 밀무역·잡상행위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따르자 조선은 일본측과 여러 차례 약조를 맺어 위반자를 엄중히 단속하였다.
그래도 피해가 줄어들지 않자 168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尹志完)이 돌아올 때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교섭관계를 위임받고 있던 대마도주와 전문 5개조에 달하는 약조를 체결하고, 이것을 한문과 일문(日文)으로 각각 비석에 새겨 조선측은 수문(守門) 안에, 일본측은 왜관의 경계 지역에 세워서 알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금하고 있는 경계선 밖으로 함부로 나오는 일이 있으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② 노점상의 자릿세를 주고받는 것을 현장에서 잡으면 준 자와 받은 자 모두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③ 저자를 열 때 각방에 몰래 들어가 비밀리에 물건을 사고 파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할 것. ④ 조선 관리들은 일본인들을 끌어내어 구타하지 말 것. ⑤ 피차에 죄를 범한 사람은 모두 관문 밖에서 집행할 것.
조선의 기세가 아주 등등하다. 왜관 내에서 저질러진 범죄를 조선 내에서 치리하겠다고 규정한 5번을 보면 범죄를 저지른 주한미군에 대하여 수사권도, 재판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지금 우리 처지와 선명히 대비된다.
해설사 최광섭 목사는 "자주권이 있어야 평등해질 수 있다"며 부산 사람들의 왜관 운영 경험을 이어받아 부산이 앞장서서 이 땅의 자주와 평등의 기운을 일으키자고 고무하였다.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해원 공연
참가자들은 초량왜관 터가 남아있는 용두산 쪽으로 이동하여 그곳 일대를 둘러본 후 용두산 공원 상설 무대로 이동했다.
부산평통사는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연 올해 평화발자국을 마감하며 전쟁에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해원 공연을 마련했다. 경성대 하연화 교수와 한사랑교회 방영식 목사가 동참해주셨다.
사회를 맡은 최광섭 목사는 그동안 진행된 평화발자국을 소개하고 전쟁이 만든 도시 부산을 평화의 도시로 만들어내고 통일 실현에 기여하자고 호소했다.
주말을 맞아 공원을 찾은 부산 시민들이 쌀쌀한 날씨에도 공연에 동참하여 뜻 깊은 행사가 되었다.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부천 평통사 신정길 대표는 "임란 때 부산진성에서 옥쇄하신 저의 14대조께서도 오늘의 위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 <용두산 공원 해원 공연>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그리운 금강산'을 열창하는 한사랑교회 방영식 목사. | |
ⓒ 박석분 |
▲ <용두산 공원 해원 공연> 해원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부산 시민들 | |
ⓒ 박석분 |
부산에 기행 프로그램이 많이 있지만 평화발자국은 테마를 정하고 그것을 일관된 흐름으로 진행하며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평화발자국 코스들을 모아 한반도 평화지도를 만들어내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내년 부산 평화발자국의 테마는 일제강점기를 이겨낸 부산 사람들이다. 더 풍부하고 더 알차며 더 재미있는 모습으로 부산 시민들을 만날 것을 약속드린다.
▲ <2014 부산 평화발자국 일정을 모두 마치며> 추운 날씨에도 끝까지 함께 한 참가자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 |
ⓒ 박석분 |
(*이 글에서 다룬 내용들은 해설사 최광섭 목사가 제공한 자료에 근거한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참가 문의 : 070-7809-4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