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28] 2015 마지막 부산 평화발자국 "우키시마호, 그리고 세월호의 눈물(해방과 귀환)"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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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찾아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심는다 (광복 70년, 분단 70년) 2015 부산 평화발자국 "일제에 맞선 부산사람들" 9차 평화발자국 "우키시마호, 그리고 세월호의 눈물(해방과 귀환)" 2015년 11월 28일(토) 오전 10시~오후 4시
올해 마지막 평화발자국은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부산사람들의 이야기를 돌아보았습니다.
20명 가까운 회원과 시민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열심히 메모를 해가며 평화의 발자국을 이어갔습니다.
참가자들은 귀환동포들이 감격스러운 귀환의 첫 발을 디딘 부산항 1부두에서부터 평화발자국을 시작했습니다. (귀환동포 : 일제 강점기에 이주 혹은 강제 동원으로 일본 혹은 해외에 거류하다가 일본의 패전 이후 귀환한 동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일본에 거류하고 있던 수 많은 동포들이 해방을 계기로 시모노세키[下關], 센자키[仙崎], 하카타[博多], 사세보[佐世保], 마이즈루[舞鶴] 등의 항구로 쇄도하여 귀환을 서둘렀습니다. 이들은 모든 가능한 방법을 이용하여 귀환을 감행했습니다. 어뢰나 해적, 풍랑에 의한 피해가 속출했으며 그 가운데 우키시마호[浮島丸] 침몰 사고는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근접해있고 연락선이 기항한 항구이기에 재일동포 대부분은 부산항(1부두)을 통해 귀국했습니다.
10월에 들어 점령 당국(연합군 극동 함대, 일명 맥아더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일본 후생성(厚生省)이 귀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 기관이 되자, 재일 동포의 귀환 원호와 송출 업무는 후생성 건민국(健民局) 내의 복리과가 주관했습니다. 귀환자 수송은 과거 관부연락선으로 사용되던 선박을 이용했습니다.
귀환자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정부의 자료에 의하면 1944년 말 일본에 거류하던 동포 수가 193만 6843명이었고, 1947년 9월 내무성의 조사에 의한 재일 동포 수가 총 52만 9907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대략 140만 명 정도의 동포가 해방 직후 일본에서 귀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산항의 경우 귀환자들을 실은 선박이 대체로 제1 부두에 정박했으며, 상륙한 귀국자들은 우선 소독을 받은 후 환전소에서 일본 은행권 화폐를 조선 은행권 화폐로 환전했습니다.
<우키시마호 사건>
1945년 8월 22일 밤 10시 경, 4천7백30톤짜리 화객선 한척이 아오모리 현 최북단인 시모키타 반도의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쓰가루 해협으로 향했습니다. 이 날 항구를 빠져나간 화객선은 37년에 건조된 뒤 규슈와 오키나와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다가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 해군에 징발됐던, 당시로서는 대포와 각종 무기까지 장착해 군사 작전용으로도 손색이 없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였습니다.
출항하던 날 승선했던 사람은 승무원인 일본 해군 병사들을 빼고는 모두 한국인이었습니다. 일본측 공식 집계에 따르면, 당시 배에 탄 한국인 수는 3천7백50명(7천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배가 닻을 내리도록 예정된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우키시마호는 일본 북부 지역에서 강제 노역으로 혹사당한 한국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일본이 마련한 ‘강제 징용자 송환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귀국할 꿈에 부풀어 배에 오른 한국인 대부분은 살아서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당초 부산을 향해 출항했던 배가 항로를 바꿔 45년 8월 24일 교토 근해로 들어가더니 그 곳 마이즈루 만 시모사바가 앞바다에서 원인 모를 폭발 사고를 당해 침몰한 것입니다. 승선자 대부분이 배와 함께 바다에 수장됐습니다. 5백 50여 명만이 구조대의 손길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당시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 결과는 ‘미군이 매설한 기뢰에 부딪쳐 일어난 단순 해난 사고’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인 생존자들은 ‘침몰 사고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42년 4월 홋카이도로 끌려가 그곳 비행장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하다가 우키시마호를 탔던 김종호씨(전북 진안군)는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일본 해군이 보트를 타고 배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역시 홋카이도 스미모토 탄광에서 일하다가 배를 탔던 주윤창씨(전남 여천시)는 “함께 구조됐던 헌병으로부터‘배 밑부분까지 전기선이 늘어져 있어 절단하려고 했으나 기구가 없어 절단하지 못했는데 잠시 후 폭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생존자들은 모두 일본 해군이 일부러 사고를 계획했거나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키시마호 사건을 단순한 해난 사고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일본에서 이미 60년대 말부터 사이토 사쿠치(齊藤作治·시모키타지역문제연구소장), 아키모토 료지(秋元良治·전 아오모리 대학 조교수), 와시오카 코쇼(鷲岳公彰), 나루미 겐타로(鳴海建太郞) 등 양심적인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제기되었습니다.
이들은 우키시마호 사건을 직접 목격했거나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서, 처음부터 촉뢰설에 의심을 품고 사건에 접근했습니다. 이들은 연구모임을 만들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채록하는 등 의혹을 푸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키시마호 사건은 한꺼풀씩 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물기둥’이 우키시마호 사건에서는 목격되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우키시마호가 가라앉은 지 4개월이 지난 45년 12월 한국인 생존자들이 우키시마호 사건을 ‘일본군에 의한 계획적인 폭거’라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를 진주군(미군) 사령관에게 고발한 문서도 발견됐습니다. 더욱 의심스런 사실은 9년간 방치했던 문제의 배를 54년 갑자기 인양한 뒤, 세밀한 조사 없이 해체하여 하루아침에 고철로 처분해 버렸다는 점입니다.
진상 규명에 나섰던 사람들은 사고 원인에 대해 ‘촉뢰’가 아닌 ‘자폭’일 가능성이 높다며, 이 사건이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에 의한 진상 규명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온 반면, 국내에서는 언론보도를 통해 사건의 존재만 어렴풋하게 알려져 왔을 뿐 체계적으로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일부 유가족들이 일본 법원에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등 부분적인 움직임은 있었습니다. 92년 일본에 거주하는 사고 유가족들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공식으로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촉구하는 재판을 추진하는 회’(대표 송두회)를 구성해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사고 생존자가 일본에 직접 건너가 생생한 증언을 했지만, 재판부는 명백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지금까지 재판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우키시마호 진상규명위원회는 “우키시마호 사건은 이미 일본에서조차 한국 징용자에 대한 대량 학살 사건의 하나임이 입증됐다. 남은 일은 일본 정부가 공식 시인하고, 더 정확한 조사를 위해 관련 자료를 공개하는 등 협조를 아끼지 않는 것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해방이 되었어도 돌아오지 못한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습니다.
총독부 대신 권력을 쥔 미 육군사령부 군정청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해방되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 9월 2일 미군정과 소련 군정 주둔 후 행정권 인수인계 기간을 거쳐 9월 28일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승전국 미군은 9월 17일 부산에 들어왔습니다. 부산에서도 미군정이 시작된 것이죠.
지금 시민공원 자리에 설치된 미 군정청은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들어서면서 '캠프 하야리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미군정 기간 내내 미군은 한국에 대해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고, 한국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맥아더 사령부는 포고령을 통해 일방적으로 최고통치권과 입법권, 행정권을 가진다고 선포하고 주민들은 이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군정만이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언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국가건설 노력을 무시하고 상해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미군정은 한반도에서의 사회주의 확산저지, 대륙진출의 교두보 확보라는 미국의 대한정책에 따라 정책을 수행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하여 민족의 뜻대로 국가가 건설되고 운영될 줄 알았던 한국 민중에게 미군정이라는 존재는 지배자, 압제자일 뿐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부산에 온 미군들이 숙소로 사용하다 나중에 미 문화원이 된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자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 투하됩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15만 9천여 명이 사망합니다. 3일 후인 8월 9일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에 떨어져 7만여 명이 사망합니다. 6일 뒤,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일본에 투하된 2개의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세계 제1의 원폭 피해국이 됐습니다. 그럼 2위는 어디일까요? 바로 한국입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조선인 징용 노무자들이 많이 거주했습니다. 일제가 침략전쟁을 벌이며 부족해진 본토의 노동력을 조선인으로 충당했기 때문입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의 '히로시마 기계제작소','히로시마 조선소','나가사키 조선소','나가사키 제강소'등에서 고되고 위험한 일을 주로 했습니다.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조선소와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밀집해 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거주 조선인들은 강제로 동원된 것도 모자라, 남의 전쟁에 어이없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전체 피폭자의 대략 3분의 1 정도가 사망했는데, 조선인의 경우 7만여 명의 피폭자 중 절반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조선인 사망자가 피폭자 수에 비해 현저히 많았던 이유는 초기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조선인보다 일본인을 먼저 치료했습니다. 가난했던 조선인들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피폭지 주변에 방치됐습니다.
귀환동포들 중에는 피폭자들이 있었고, 이곡지 여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피폭 1세인 이곡지 여사 댁을 방문했습니다.
이곡지 여사의 아들 김형율씨는 피폭 2세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면역글로브린결핍증'이라는 희귀증세로 고통당하다가 10년 전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피폭 2세임을 세상에 알리고 한국인 피폭자 문제의 해결을 미국과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활동을 혼신을 다해 전개하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고 김형율의 삶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됐다가 얻은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2세에게도 대물림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입니다.
일본은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른 것으로서 원천무효입니다. 불법적인 일제침략과 식민지배에 면죄부를 주고 위안부 성노예, 강제 징용, 징병, 원폭피해 문제 등에 대한 배상을 외면한 한일협정은 폐기되어야 마땅합니다.
지난 2012년 한국 대법원이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 및 배상 회피를 한국 헌법에 위배되는 불법적이고 반인도적인 것으로 판결함으로써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에 조종을 고한 만큼 일본으로 하여금 한반도 침략과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배상 책임을 지는 새로운 조약과 협정을 체결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한일관계를 바로잡는 첩경입니다.
참가자들은 고 김형율의 유지를 따라 한국인 피폭자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는 김봉대 아버님으로부터 원폭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평통사와 함께 올해 5월에 NPT 회의에 참가하여 유엔본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와 미국,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연설을 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앞으로 한국인 피폭자 문재 해결에 힘을 보태겠다고 부모님께 약속드리고 물러나왔습니다.
조국에 돌아왔지만 갈 곳은 소막뿐
우암동(우암포)은 소의 얼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개항 후 일본에 소를 대량수출하게 되면서 이곳에 소막사와 검역소가 들어선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검역을 마친 소는 배편으로 일본, 철도로 만주 등지로 반출되었습니다.
1910년 당시 부산검역소를 통해 일본으로 보낸 한우는 1312마리였으나, 10년 후인 1920년에는 3만6208마리, 일제 말기인 1939년에는 5만2586마리로 폭증하였습니다. 전국 소의 70% 정도가 부산항을 통해 반출되다 보니 부산진 우시장을 비롯한 부산지역 우시장의 규모와 거래량은 전국 최고 수준에 달했습니다.
이렇게 소 수탈의 현장이던 우암포는 1934년 매축사업이 시작되면서 소 바위와 함께 포구도 사라졌고 포구 입구의 붉은언덕(赤崎, 아카사키)라는 지명만 남았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소 막사는 오갈 데 없는 귀환동포의 주거지가 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피난민을 수용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이북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수용된 이곳은 부산에서 가장 큰 구호시설로서 적기(붉은언덕) 수용소라 불리워졌습니다. 피란민의 애환이 스민 우암동 디아스포라(Diaspora)마을이 된 것이죠.
귀환동포들은 부두 창고에서 가마니나 널빤지로 칸막이를 해서 살다가 부산시 이주계획에 따라 우암동으로 이주하여 소막에 살게 되었습다. 그들은 공터만 있으면 천막이나 판잣집을 짓거나 우사, 소막 등을 주택으로 개조해서 살았습니다. 100마리의 소를 키우던 소막 한 동에 평균 100여명이 살았으며 그나마도 터가 없어 심지어 닭과 돼지를 키우던 곳에 칸을 나누어 생활을 할 정도였습니다.
죽음을 넘어 귀향한 동포들에게는 가족도, 갈 곳도 없었습니다. 다만 가난이 앞을 막고 있었을 뿐입니다.
도시코가 이용수가 될 때까지
"세상을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끌려간 곳은 일제가 점령한 대만의 신주 가미가제 공군부대입니다. 그 부대에서 21살 일본군인이 도시코(年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치욕의 성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날 부대내에서 비행기 청소일 등을 하는 대만 노무자가 담너머에서 전쟁이 끝났다고 알려주었어요. 그후 수용소를 거쳐서 1946년 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마지막 일정으로 수영에 있는 민족과여성역사관을 방문하여 김문숙 관장을 뵙고 귀환한 위안부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용수 소녀가 행방불명되자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중풍이 재발하여 돌아가시고 후에 어머니마저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렇게 고명딸의 행복을 누릴 천부적 인권을 일제는 처절히 짓밟았다."
김문숙 관장의 안내에 따라 참가자들은 역사관에 전시되어있는 위안부 어머님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참가자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킨 것은 이용수 할머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이웃나라 일본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 자라나는 한일 젊음이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원한과 원망을 뛰어 넘기 위해서 일본은 고개를 숙이고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인 배상을 평화적으로 하여야 한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일본이 안보법제를 제, 개정하여 한반도에 재침략할 수 있게 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일본이 평화헌법을 수호하고 우리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인 배상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힘을 모으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도시코를 이용수로 만드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이겠지요.
- 이 글은 최광섭 대표를 비롯하여 김욱, 권영주 해설사가 준비한 자료에 토대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매 회 평화발자국을 기획, 해설해주신 해설사들께 감사드립니다.
- 이번 평화발자국을 끝으로 올해 평화발자국을 마무리하고 내년에는 '6.25를 이겨낸 부산사람들'을 주제로 진행합니다.
- 올 한해 동안 평화발자국에 참가하고 성원해주신 회원과 시민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진과 함께 부산평통사 까페에서 다시보기 : http://cafe.daum.net/bsspark/k2ar/36
한겨레 기사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19506.html
오마이뉴스 기사보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648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