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18~21] 나가사키-사세보 평화발자국 다녀온 이야기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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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 않은 상처, 되풀이할 수 없는 치욕의 역사” 나가사키-사세보 평화발자국
2016년 2월 18일(목)~21일(일)
2월 18일(목)
“군함도는 꼭 가보고싶었다”, “홍보자료를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주제라 참가했다”, “미군기지가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지 보고싶었다”, “아버님도 징용을 갔다오셨다. 일제치하 역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참가했다”, “한미일 삼각동맹에 관한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왔다”, “사드 배치를 계기로 전개될 한미일 삼각동맹의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일본 평화운동과 연대, 교류를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과거는 멈추어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으로 이어지고 지금 이 시간은 미래를 향해가는 여정에 늘 과거가 되기에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평통사 평화발자국은 더욱 그렇습니다.
2014년부터 부산평통사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심는 평화발자국을 시작했습니다. 2014년에는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사람들’이라는 주제로, 2015년에는 ‘일제에 맞선 부산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진행했습니다. 올해 부산 평통사는 일본으로 그 보폭을 넓혀 나가사키와 사세보로 떠나는 기행을 기획, 추진했습니다.
이 기획은 지난 해 아베 정권이 안보법제를 강행처리함에 따라 일본군의 한반도 재침략이 가능해진 현실에서 일제 하 조선인 강제징용의 현장―군함도―을 방문하여 과거 치욕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를 담았습니다. 이런 뜻에서 이번 기획에는 또한 안보법제 강행 처리 이후 강화되고 있는 사세보 주일미군기지를 돌아보는 일정도 포함시켰습니다. 사세보는 군함도가 있는 나가사키 현 내에 있는 도시로, 유엔사 후방기지로서 주일미군기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유사시 한반도로 출격하는 미일 해군력의 최전방이 될 사세보 기지는 과거가 과거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입니다.
아울러 이번 일정에는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재일 조선인의 처참한 역사도 만나는 시간을 담았습니다.
부산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온 20여 명의 참가자들은 2월 18일 오후 2시, 부산역에 모였습니다. 참가자들은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부산 대연동에 있는 일제하강제동원역사관부터 방문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이 역사관에서 확인한 강제동원의 실상에서 새삼 충격을 받았지만 이 역사관이 지난 해 말에야 세워졌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와했습니다.
일제하 강제동원역사관에서 최광섭 부산평통사 대표의 해설을 듣는 참가자들
강제동원역사관을 둘러본 참가자들은 부산역 건너편에 있는 국제여객선터미널로 이동하여 후쿠오카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2만톤에 달하는 카멜리아호는 옛날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분들이 탔던 배와 전혀 다르지만 참가자들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당시 식민지인의 설움을 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야했던 분들의 한숨과 고통을 되새기며 마음을 여몄습니다. 참가자들의 등에 단 ‘평화발자국’ 배너를 보고 부산 시민들은 관심을 보이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설명을 듣고난 시민들은 “참 좋은 일을 하신다”, “애국자네요~”라며 격려해주셨습니다. 평화발자국이 시민들에게 평통사를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게 해주는 좋은 사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힘찬 출발!
2월 19일(금)
아침 일찍 후쿠오카항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전세버스로 옮겨타고 곧바로 나가사키로 이동하여 오전 11시 30분 경 나가사키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통역을 비롯하여 이번 일본 평화발자국 현지 일정을 도와주신 기무라 하데토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기무라 선생님은 이번 일정을 꼼꼼하게 챙기고 헌신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나가사키항 부근의 식당에서 점심을 마친 참가자들은 기무라 선생님으로부터 군함도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나가사키항에서 19km 떨어진 군함도로 이동했습니다.
나가사키는 미쓰비시 조선소를 비롯해 수많은 군수산업 기지들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다는 ‘무사시’를 제조한 곳이 이곳 조선소였고, 이를 군함이나 함정이 사용한 어뢰를 제작한 곳도 미쓰비시의 병기 제작소였습니다. 미쓰비시 중공업사사(社史)에는 여기서 만들어진 어뢰가 진주만 공격에 사용되었고 7,343개의 어뢰가 만들어 졌다고 적혀있습니다. 미국은 이곳에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당시 강제징용되어 미쓰비시에서 노역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징용자의 규모는 13,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중 군함도(하시마탄광)에 800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시마는 지하 1km까지 파내려간 해저 탄광입니다. 10m높이의 콘크리트 제방이 담장처럼 섬을 에워쌌는데, 일본 광부들에게는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를 제공받은 근대식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하시마 탄광은 최전성기인 1941년에는 41만 톤의 석탄을 캐냈다고 합니다. 1960년에는 총 거주자가 5,30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섬이었던 하시마. 조선인들에게 이곳은 처절한 감옥이었습니다. 이곳까지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은 소모품이었고, 노예였습니다.
하시마 탄광에서 일을 하던 1000여명 중 500여명이 조선인이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가장 깊은 막장이거나 가스발생이 잦은 지역, 낙산사고가 빈번한 곳,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에 배치되었으며 언제 수몰될지 모르는 해저탄광에서 목숨을 내어놓고 일했습니다. 그들은 하루 16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혹사당했으며 먹는 것이 부실해 대부분이 영양실조에 걸려있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려야했습니다.
중노동을 견디지 못해 탈출한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총살당하거나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노동과 끔찍한 노예노동의 범죄 사실은 은폐되고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 “문화유산”으로 유엔에 등재되었습니다.
군함도를 돌아본 참가자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일본인 해설사의 유창한 설명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있을 참혹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했습니다.
군함도에서 돌아온 참가자들은 오후 6시부터 나가사키시 교육문화회관에서 이하라 도요이치(井原東洋一) 선생의 강의를 듣고 교류하는 시간을 진행했습니다. 교류회에는 평화발자국 참가자들 뿐 아니라 나가사키 대학 대학원생 등 일본분들도 참석했습니다.
이하라 도요이치 선생은 일본의 피폭1세로서 나가사키 시의회 의원을 지냈고 <나가사키 현(縣) 피폭자수첩(手帖) 친구의 회>(이하 <회>) 회장입니다. 이하라 선생은 한국이 70년간 분단되어 고통당하는 이유가 일본에 있다며 사과했습니다. 이하라 선생은 1995년 피폭자에 대한 원호법이 제정되기까지의 경과를 설명하고 최근 아베 정권의 전쟁법과 원전재가동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활동을 펼치고 있는 <회>의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했습니다.
이하라 선생은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핵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회의가 다시 확산되었고 있다고 소개하고 한국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하면 일본은 살아남을 수 없다며 “핵도,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다. 나가사키가 최후의 피폭지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를 위해 <회>는 비핵3원칙을 법제화하고 핵우산을 제거하며 동북아시아의 비핵지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면서 무엇보다 “인간에 의한 평화의 연대”를 강조했습니다. 또한 한반도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면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원칙적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일본도 북한을 고립시키지 말고 북한과 국교정상화를 이루는 데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하라 선생은 “나가사키에 군함은 필요없다. 하시마는 문화유산이 아니라 징용의 섬으로 남아야 한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평통사는 지난 해 NPT에서 유엔본부에서는 처음으로 미국과 일본 정부가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일본의 평화세력도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면 큰 힘이 될 것이기에 <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제기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아쉽게도 이하라 선생의 답은 “없다” 였습니다. 이하라 선생은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한다면서 그러한 활동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을 끝낸다는 명분으로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있는 핵폭탄을 사용한 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평통사는 미일 정부가 한국인 피폭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게 만드는 어렵고 외로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전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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