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26] 11차 부산 평화발자국 "루핑 지붕 위에서 피어난 평화의 꿈"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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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찾아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심는다
2016 부산 평화발자국
"전쟁에 맞서 평화를 일군 부산사람들"
11차 평화발자국
"루핑 지붕 위에서 피어난 평화의 꿈"
2016년 6월 26일(일) 오전 10시~오후 3시
6.25전쟁 66년을 맞아 전쟁이 가져온 고통과 가난을 꿋꿋이 이겨낸 피난민의 일상사를 보듬어보기 위해 나선 11차 평화발자국은 참가자들이 당시 피란민 ‘평화氏’가 되어 그의 하루를 걷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16명의 참가자들은 양화니 해설사의 인도로 영도다리에서부터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평화氏’는 전쟁통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는 오늘도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했던 아내와의 약속을 기억하며 빼곡하게 붙어있는 전단지를 일일이 들쳐봅니다. 당시 피란온 사람들은 기존 부산 인구의 두 배가 넘습니다. 가족을 찾으려고 나선 피란민들이 발디딜 틈 없을 정도로 몰려나와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애끓는 심정으로..... 피란민들은 한켠에 늘어서있는 점쟁이들에게 가족들의 안위를 물어봅니다. 살아서 꼭 만나리라는 다짐을 점쟁이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겁니다.
부산은 교전지역은 아니었지만 영도다리에는 전쟁의 흉터가 진하게 남아있습니다. 이 영도다리를 ‘부산의 명물 도개교’라고만 한다면 반쪽만 이야기하는 일입니다. 새로 지은 영도다리에는 현실감 떨어지는 피란가족 동상들이 서있을 뿐,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아내를 찾지 못한 ‘평화氏’는 자갈치 아지매들의 땀방울과 눈물방울이 켜켜이 쌓인 좌판 노점상과 골목을 지나 남포동 극장골목으로 터덜터덜 발길을 옮깁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중앙동에 일본인들이 세운 영화제작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해방 후 극장이 밀집했던 남포동 극장골목은 피란민들에게 잠시나마 참담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휴식처이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볼 엄두는 내지 못한 채 간판그림만 구경한 ‘평화氏’는 극장골목을 지나 국제시장으로 들어섭니다. 국제시장은 해방 후 전시 물자를 팔던 자리에 피란민들이 합세하면서 도깨비 시장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온갖 밀수품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공급되기도 했습니다.
‘평화氏’는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에서 다리쉼을 하며 들고나온 책을 챙겨봅니다. 한 피란민 부부가 좌판을 깔고 헌책을 팔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곳이 이곳 보수동 책방골목입니다. ‘평화氏’는 한 책방에 들러 가져온 책을 팔고 몇 푼의 돈을 주머니에 챙겨넣습니다.
동아대 뒤편, 지금은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조성된 곳은 이승만 대통령이 피란을 와서 살던 사저입니다. ‘평화氏’같은 피란민들이 범접할 수 없는, 고기가 없으면 빵을 먹으라던, 그래서 민중들에 의해 타도된 베르사이유 궁전같은 곳이죠. 이승만을 비롯한 당시 위정자들은 그 전쟁 통에도 권력을 쥐기 위해 아귀다툼을 했습니다. 피란민들의 고통과 한숨, 죽음 같이 처참한 가난은 이들에겐 남의 이야기였죠. 이들은 대통령 관저가 검소했다고 기록합니다. 개울가에 판자로 집을 짓고 비는 피할 수 있지만 불은 견딜 수 없던 루핑으로 지붕을 만들어 새우잠을 자면서 산비탈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누울 곳을 마련하려고 발버둥쳤던 피란민들의 삶 앞에서 말이죠. 천벌을 받을 일입니다.
전두환 정권 하 1984년 6월 25일에 맞춰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지정된 이 건물은 1926년에 경남도지사 관사로 지어졌습니다. 건축양식, 정원의 조성양식, 담벼락까지 전형적인 일본근대건축물입니다. 조선인의 피땀을 착취해서 내지인의 식민통치행위를 위해 지은 식민지시대 건축물이, 대한민국에서 스스로를 ‘國父‘라 믿었던 초대대통령의 피란관저로 쓰인 것입니다.
‘평화氏’가 된 참가자들은 임시수도기념관 뒤뜰에 전시된 당시 천막교실을 배경으로 같이 사진을 찍어 이 역사적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책 판 돈으로 자갈치 시장에서 꽁치 몇 마리 사든 ‘평화氏’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미동 비석마을까지 산비탈을 걸어 오르면 저 멀리 오륙도까지 보입니다.
아미동 산 19번지. 1905년 일제는 이곳 토지를 징발해 공동묘지 부지를 확보하여 1906년에 공사를 시작합니다. 1909년에는 화장장이 이곳으로 이전하여 일본인 공동묘지가 완성됩니다. 화장장 연기가 아미골을 뒤덮고 제물로 차린 음식이 까치들을 모여들게 해서 지금도 까치고개라고 부릅니다.
살 곳 없는 피란민들이 이곳까지 밀려나 일본인 무덤 위에 집을 짓고, 비석과 상석으로 축대와 주춧돌을 쌓고 계단을 놓으면서 만들어진 아미동 비석마을. 어깨를 마주하듯 옆집과 한 벽을 반씩 나눠가졌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꽉 차는 좁은 골목을 마당삼아 이웃이 된 사람들은 서로의 상처를 싸매주고 의지하며 참담한 시절을 함께 기어코 살아냈습니다.
비석마을 맨 꼭대기 집에서 오늘 하루 ‘평화氏’로 산 참가자들은 전쟁이 절대 다시는 일어나선 안된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한반도는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 미국과 일본이 사드 한국배치와 한일 군사협정체결을 밀어부치며 삼각동맹을 구축하려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절실하게 원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먼 미래로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협정체결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는 뜻에 공감하며 서로의 느낌을 나눴습니다. 무덤 위에 집을 짓고서라도 억척스럽게 오로지 살아남아야만 했던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이렇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전쟁위기라니. 결코 안 됩니다.
다 같이 살기위해 평화, 다같이 사람답게 살기위해 통일!
* 덧붙임
아미동 고갯마루에 있는 '아미문화학습관'은 최민식 작가의 갤러리가 있는 곳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렌즈에 담아낸 다큐 사진가로서 권력자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평생 고초를 겪으면서도 작가는 결코 민중의 삶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최민식 사진가의 사진 몇 장을 공유합니다.
부산평통사 까페에서 사진과 같이 다시 보기 : http://cafe.daum.net/bsspark/k2ar/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