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고 서창호 전 공동대표 회지 인터뷰: '덕(德)있는 삶', '더불어사는 삶'을 만들어야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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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4월 14일(일), 새벽 3시 27분 경 서창호 전 평통사 공동대표님이 소천하셨습니다. 평통사를 아끼고 지지해주셨던 서창호 전 공동대표님을 추모하며, 평화누리 통일누리 제92호(2010.2월호)에 실린 2010년 평통사 공동대표 선임 당시 인터뷰 글을 소개합니다.
[제92호 평화누리통일누리 인터뷰]
'덕(德)있는 삶', '더불어사는 삶'을 만들어야
- 서창호 신임공동대표를 만나다
2010년 2월 6일, 제16차 운영위원 총회가 있었다. 회의에서는 광주전남의 서창호 대표가 평통사 공동대표로 추대되었다. 서창호 공동대표를 만나이야기를 들었다. 서창호 대표는1942년 3월생이다. 전남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1981년 목포대학교에서 정치학 강의를 시작, 2007년 8월, 정년퇴임 후 지금은 명예교수로 계신다. 슬하에 두 아들이 있고, “덕(德)이 있는 삶”, “더불어 사는 삶”을 좌우명으로 삼고 계신다.
4·19 당시 함평학다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서창호 대표는 서울대 법대 진학을 목표로3학년을 두번째 다니고 있었다. 사상계 등을 탐독하며 학내문제로 시위를 주동(대의원의장)하고 이로인해 학교를 자퇴하게되어 목포 문태고등학교로 전학, 전남대에 입학을 하였다. 서창호 교수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비판은 했지만 실천에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5·18을 계기로 미국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고, 장학금을 받고 미국연수의 기회가 생겼음에도 연수를 영국으로 가는 결단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던 중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그로인한 공안탄압이 서창호공동대표가 사회문제에 직접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공안탄압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개인이름으로 발표하고 분신정국에서는 삭발투쟁을 하게 된다. 이후 전교조가 결성되고, 탄압이 가중되자 한편에서는 민교협 회원들을 전교조로 가입시켜내고 전교조 내에 대학 위원회 부위원장(위원장 오세철 교수)을 맡게 된다. 이후 전교조 전남지부 대학위원장, 민교협 광주전남지부장, 전교조 탄압저지 대책위와 이를 계기로 목포 민주시민단체협의회를 결성한다. 1995년에는 민교협의장도 맡게 되었다.
서창호 교수는 2003년 당시 목포 대학교 대학원장을 맡고있던 시절 평통사에 대해서 주변의 소개로 알게되고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통사 참여를 결정하게 된 계기는 미국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차에 평통사가 반미운동에 대해서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평통사 활동이 넓어지고, 광주전남에 회원도 많이 확대되면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하시는 서창호 교수는 평통사에 대해 많은 자긍심을 가지고 계신다. 서창호 교수는 강정구 교수가 2000년 평양에 갔을 때 같이 갔었다고 한다. 방북 이후 강정구 교수가 공안기관의 탄압을 받는 과정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있었는데, 강정구 교수와 같은 훌륭한 교수와 같이 평통사 활동을 하고 공동대표를 맡게 된 것에 대해 보람을 느끼신다고 한다.
“평통사는 주한미군 철수 운동에 가장 실천적이고, 이론적이고, 체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보람있는 조직의 한 사람으로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 “평화협정 실현운동에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며 자긍심을 느낀다” 특히, “이런 조직에 공동대표로 추대된 것에 부족한 점이 많아 갈등도 하고, 고민도 했지만 열심히 해보고자 한다”며 결의를 밝혔다. 또 “홍근수 목사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건강이 좋지 않고, 실무자들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활동하는데 이를 타개할 방안”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가지고 계셨다.
지난 2월 6일 운영위원 총회에 대해서는 “많은 남녀노소가 참여를 해 유익했고, 평통사의 희망도 보았다”는 소감과 함께, “젊은이들이 통일, 반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반통일정책을 타개하고 민족의 자주, 평화협정 체결에 힘을 합쳐 매진하자”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