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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 평화발자국] 인천, 논산, 전주, 서울, 대전 평화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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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하반기 전국 평화발자국 일정 모아보기]

 

인천평통사 평화발자국

김일회 신부님과 함께하는 2025년 가을 평화발자국
“분단과 전쟁의 상흔에서 피어나는 평화의 길”


·일시: 2025년 11월 8일(토) 오전 8시~     
·코스: 애기봉 평화생태공원-갑곶순교성지-연미정

 

평화생태전시관 앞에서 평화발자국 참가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2025년 11월 8일(토) 인천평통사 평화발자국 - 분단과 전쟁의 상흔의 현장 애기봉 평화생태공원과 갑곶돈대 순교성지, 한강하구 연미정를 다녀왔다. 인천평통사 공동대표이자 김포 청수성당 주임인 김일회 신부가 전체 해설을 맡았으며, 청수성당과 인천교구 가톨릭 신자와 인천평통사 회원 등 80명이 함께했다.

 

애기봉 전망대에서 

 

첫 일정은 김포 애기봉 평화생태공원이었다. 애기봉은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위치한 수도권 최북단 전망대로, 불과 1.8km 앞 개성 판문군 조강리가 보이는 분단의 현장이다. 예전에 대북심리전의 일환으로 크리스마스 등탑 점등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등탑은 철거되고 이 자리에 평화의 종이 세워졌다.

 

(위) 평화발자국 참가자들이 강건너 보이는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다 / (아래) 북녘 개성땅의 모습

 

참가자들은 망원경을 통해 북측 농민들의 일상을 보면서,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도 80년째 갈라져 있는 현실에 깊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특히 참가자 중에는 부모님의 고향이 개성, 해주 등 북측 지역인 실향민 2·3세가 많아 “분단의 현장을 직접 보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는 소감이 이어졌다. 

 

 

이어 방문한 강화도 갑곳순교성지에서는 김일회 신부님의 주례로 평화미사가 봉헌되었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강화도 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1살박이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강화 전역에서 약 500-700명이 학살 당했다. 

 

 갑곳순교 성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미사와 소감 나누며 
 


순교의 기억 위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가 이어졌으며, 많은 참가자들이 “오랜만에 평화 통일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평통사가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줘 고맙다”고 인사했다. 한 분은 “아버님이 철원 노동당사 건물 설계에 참여하셨다”며 분단의 시간이 가족사에 어떻게 남았는지를 말씀해 주었다. 모두가 각자의 삶 속에서 잊고 지냈던 평화·통일의 가치를 다시 꺼내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오선근 인천운영위원은 배호의 ‘누가 울어’를 개사한 ‘애기봉 평화 브루스’를 불러 모두의 마음을 적시기도 했다. “멀리 떠나간 내 평화는 기약조차 없는데…”라는 구절은 분단 80년의 현실 속에서 평화를 바라는 모두의 마음을 담아냈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한강하구와 유도


이후 한강하구 연미정에서는 조강과 한강이 맞닿아 북녘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분단의 현실과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체감했다. 이동 중 김일회 신부님은 지역의 역사, 군사적 상황, 평화협정의 필요성 등에 대해 구수한 설명으로 들려주어 참가자들의 이해를 넓혔다. 


한강하구 비무장지대에 '유도'라는 섬이 있는데, 1996년 대홍수 때 황소 한 마리가 떠내려와 유도에 고립되었다. 표류 5개월, 하루하루 말라가는 소를 구조하여 '평화의 소'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소는 제주로 장가가 천수를 다했다. 그런데 왜 구출하는 데 다섯달이나 걸렸을까? 아마도 비무장지대라서 통행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아닐까? 지금도 이 지역을 왕래하려면 유엔(UN)기를 달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엄연한 우리 땅임에도 출입하려면 남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곳.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번 행사 과정에서 김일회 신부님은 답사 준비부터 해설·조직·진행, 그리고 평통사 활동 소개와 회원가입 권유까지 많은 역할을 맡아 주셨다. 그 결과 현장에서 11명의 신입회원이 가입하는 값진 결실도 있었다.
 

2025년은 해방 80년이자 남북분단 80년을 맞는 해다. 휴전 74년, 한반도 곳곳에는 여전히 분단의 아픔과 남북대결의 불안이 일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애기봉과 갑곳순교성지 같은 역사적 장소를 직접 찾은 이번 평화발자국은 참여자들에게 평화의 필요성과 한반도 자주평화통일의 절실함을 느끼게 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인천평통사는 앞으로도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평화를 체감하고 함께 실천할 수 있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며, 오늘의 평화발자국이 더 넓은 평화의 발걸음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논산평통사 평화발자국

전쟁과 학살의 현장, 그 치유의 길을 묻다

·일시: 2025년 11월 8일(토) 10시~     
·코스: 옛 대전형무소 터 - 옛 충남도청 - 옛 충남도시자 공관(테미오래) - 산내 골령골

 

대전형무서 터를 지키고 있는 '평화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심규상 기자

 

1950년 6월 27일 무전으로 전달 된 대통령의 특명으로 시작된 민간인 학살의 참혹한 행렬 중 한 곳 "골령골" 에 닿기 전 옛 대전형무소 터를 찾았습니다. 
 

대전형무소는 1919년 일제가 만들어 애국 독립운동가들을 가두었고, 해방 후에는 역대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가를 정치사상범으로 몰아 가두었던 곳입니다. 이 대전형무소는 1950년 한국 전쟁 때 무고한 민간인 수천 명이 학살된 비극의 현장입니다. 당시 대한 군경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이 4천에서 7천명, 이후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이 1,500명, 이 두 개의 엄청난 학살의 현장이었던 이곳에 자유총연맹이 자리를 잡았고 반공애국지사를 추모하는 우람한 탑이 세워져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1천 500명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주검에도 색깔을 입혔다”라는 해설가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의 제안에 따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채로 인민군에게 희생당한 무고한 영령들을 위해 묵념을 하였습니다.

 

참가자들은 대전형무소 터를 둘러보며, 민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온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대전이 충남권의 명실상부한 중심도시로 떠오르게 한 옛 충남도청사를 방문했습니다. 1932년에 준공된 이곳엔 조선총독부의 문양이 여전히 남아있고 해방 후에는 미 군정청이, 한국전쟁 당시에는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임시중앙청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충남도청사에서 걸어서 1km 남짓 거리에 한국전쟁 발발 직후 피난 길에 이승만이 임시거처로 사용했던 옛 충남도지사 공관이 있습니다. 1950년 6월 27일 밤,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방송된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서울을 방어하고 있으니 안심하라....함께 서울을 사수하자”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만적인 연설을 녹음한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2시 30분 한강대교를 폭파했던 것이지요. 한강 대교를 건너던 자들의 비명소리와 남은 자들의 피울음이 들리는 듯 해 잠시 정신아 아뜩했습니다. 이곳에서 미군의 참전을 요청했고, 재한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협정(대전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미군정4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그 이후로 지금까지 굴욕적인 한미관계가 단단히 매듭지어진 장소가 이곳 옛 충남도청관사입니다.

 

골령골 민간인 학살 추모비 앞에서 묵념하는 평화발자국 참가자들

 


구수한 보리밥을 먹으며 아뜩해진 정신을 추스르고 마음 단단히 먹고 닿은 곳은 오늘의 목적지 산내 골령골입니다. “암매장지” “팔을 앞으로 모으고 쪼그려 앉은 채로 유골이 발굴” 심규상 기자의 해설도 차마 들을 수 없어 귀를 막고 전시된 당시 사진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가 이를 악물고 귀를 열고 눈을 부릅떴습니다.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20여일간 대전형무소 재소자들과 충청남,북도 일원의 보도연맹원등 민간인들 약 7,00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학살되어 암매장 당한 곳이 이 골령골입니다. 학살 사건 직후에 산내 골령골을 방문한 영국 일간지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는 “6개의 구덩이는 6피트 깊이에 6~12피트 너비로 파여 있었다”고 했는데 이 6개의 구덩이를 모두 이으면 1km에 달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골령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진과 기록을 살펴보았다

 

위닝턴 기자의 기록에 의하면 미국장교들이 지프차를 타고 ‘도살장’을 감독했고 땅 위에 있는 모든 탄약통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즈 중령이 작성한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보안이 가장 높은 A-1등급의 고급정보 문서가 1999년에 18장의 사진과 함께 공개되었는데 이 사진은 위닝턴 기자의 기록이 진실임을 확인해주었습니다. 대전형무소터에서는 지우려 애를 썼던 산내 골령골의 영혼들이 수십년의 세월을 모아 학살 특명을 내린 자가 누구인지 이를 방조하고 감독한 자들이 누군인지를 우리에게 똑똑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운 가을을 담은 국화를 헌화하고 감히 이 참혹한 상처를 치유할 길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2026년에 이곳에 <진실과 화해의 숲>을 조성한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길 희망하는 <평화 역사 공원>으로 완성될 거라고 합니다.  

지우고 또 지우려해도 기억하는 이들의 연대가 있는 한 기어이 되살아나 민중 속에서 회자되는 진실을 마주하는 자리, 찢긴 상처를 마주하고 화해와 평화를 기도하는 곳이 대전 산내 골령골이었습니다.

 

 

광복80년, 원폭80년 전주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평화발자국
일제 수탈에 맞선 전북지역 사람들


·일시: 2025년 11월 9일(일)     
·코스: 삼례문화예술촌 → 춘포역 → 대장촌(호소카와 농장) → 군산미군기지 → 군산뜬다리부두

 

전주평통사 평화발자국에 참가한 회원들

 

11월 9일(일), 전주평통사 회원들은 광복80년, 원폭80년을 맞아 일제 수탈에 맞선 전북지역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평화발자국을 진행했습니다. 전북 완주에 위치한 삼례문화예술촌, 춘포역, 대장촌, 군산미군기지, 군산 뜬다리부두 등 전북일대를 돌아보며 일제의 전북지역 수탈에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눴습니다.

이번 평화발자국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현장을 돌아보는 것이 아닌 한반도를 중심으로 대결과 적대가 판치는 지금의 현실을 과거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보고자 마련했습니다. 회원들은 현장을 돌아보며 청일, 러일전쟁을 거쳐 한반도를 식민지화 했던 일제가 왜 전북지역에 쌀수탈, 토지매입, 철도 건설을 진행하려고 했는지 알아보고, 현재 일본이 북한을 넘어 중국, 러시아와 대결하겠다는 군국주의적 야망을 다시 꿈꾸며,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민을 가지고 평화발자국에 참여했습니다.
 

전주 회원들은 가장 먼저 삼례문화예술촌을 둘러본 후 춘포역을 방문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전라북도에 건설된 철도 노선은 침략과 수탈이라는 ‘식민지성’을 띠고 있습니다. 일제는 한반도를 침략하고 수탈하는 도구로 철도를 부설했으며, 특히 전라북도 철도는 이 지역 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수탈선’이었습니다. 특히 군산선, 호남선, 전북경편철도가 모두 부설된 후, 군산항은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최대 항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전주평통사 사무국장이 평화발자국 해설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 회원들은 군산미군기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군산미군기지는 1914년 후지이 간타로가 설립한 불이흥업(不二興業)주식회사가 군산에 들어와 3년간(1920년~1923년까지) 약 760만 평(약 2,512만㎡)을 간척 사업을 진행하며 쌀경작지로 만든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1940년에 비행조종사 양성을 위한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군산분교로 사용했는데, 가미가제를 훈련시킨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 51년 미공군부대가 배치되어 지금까지 군산미공군기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1958년에 남한에 미국의 핵무기가 600개 정도 배치됐는데, 군산미군기지에도 핵무기가 1991년까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 핵무기가 철거되긴 했지만, 군산미군기지는 핵전쟁을 위한 3개의 기지 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

특히 현재적 의미에서 군산은 중국의 중요함대가 배치된 칭다오까지 550km, 베이징까지 980km, 대만까지 약 1,200km밖에 되지 않습니다. 최근 이곳에 미군 F-35를 상시적으로 배치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양안분쟁시 이곳 군산미군기지는 중국과의 전쟁의 전초기지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항구와 철도를 이용한 경제적 수탈의 장소였던 군산, 일제가 군사적으로는 중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던 전라북도가, 현재는 중국과 대결하고, 한반도에 핵전쟁을 불러올 핵심적인 곳이 바로 이곳 군산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군산 뜬다리 부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번 전주아카데미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평소 알지 못했던 지역의 역사를 돌아보고 아픈 우리의 역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과거 우리나라 역사적 사실들을 듣고 마음이 아팠고 지금도 영향을 받는 부분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맘속에 분노와 울분이 끓어올랐다. 대한민국을 위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고 소감을 남겨주었습니다.

 

 

 

서울평통사 평화발자국 
 

·일시: 2025.11.9(일), 오전 10시    ·장소: 민주화운동기념관 - 미군기지 고가차도 - 녹사평역 - 옛 미군 장교 숙소

 

평화발자국에 나선 서울평통사 회원들이 민주화운동기념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11월 9일(일) 오전 10시, 남영역 근처에 있는 민주화운동기념관 둘러보기를 시작으로 서울평통사 평화발자국을 진행했다. 6.10항쟁을 기념해 올해 6월 10일에 새롭게 개관한 민주화운동기념관을 방문해 옛 남영동 대공분실과 새롭게 지은 건물을 살펴봤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학예사 분이 해설을 해주어서 전시해놓은 취지나 뷰 포인트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가둬 고문하며 수 많은 조작 사건을 만들어냈던 가슴 아픈 역사를 다시금 상기해본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전쟁기념관으로 이동하면서 메인 포스트였던 용산기지와 캠프킴 자리를 보았다. 기자회견이나 평화행동을 하러 전쟁기념관 앞에 자주 오면서도 전쟁기념관 안을 들어가볼 기회가 없었는데, 평화발자국을 준비하다보니 전쟁기념관 마당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광개토대왕릉비도 함께 살펴 보았다. 전쟁기념관 안 벤치에서 용산기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듣고, 용산기지 고가차도와 녹사평역을 지나 미군 장교 숙소로 이동했다. 불평등한 한미관계와 미국에게 줏대있게 나서기는커녕 오히려 굴욕적 모습을 보이는 이재명 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동하면서 보니 반환된 유엔사 부지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반환 부지는 결국 부자들을 위한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는 모양이다. 
 


미군 장교 숙소는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데이트를 하거나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들이다. 사진을 찍으면 외국처럼 보여서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많이들 오는 모양이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젋은 부모들도 많았다. 실제 미군이 살았던 집안을 살펴보니 80년대 중반에 이렇게 고급 주택에서 살았을 미군이 얼마나 흡족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 화가났다. 현재 한미관계의 불평등함이 주택만 봐도 느껴지는데, 이곳에 온 수 많은 청년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씁쓸했다.


장교숙소 벤치에 둘러앉아 오늘 평화발자국을 하면서 느낀 소감을 나누는 것으로 평화발자국 일정을 마쳤다. 평화발자국에 처음 참여한 관악의 서인호 회원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고통을 당한 분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고, 미군기지나 미군 숙소를 보면서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씁쓸함을 느꼈는데, 바로 이런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의미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이 날 진행을 맡은 김정미 회원은 특히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고문에 관한 전시를 보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며 정말 우리가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대전평통사와 함께하는
평화 올레 제8회 대전의 미군기지를 찾아서
 
 

·일시: 2025.11.1(토), 오전 10시    ·장소: 판암역 1번 출구 - 식장산(캠프 리치몬드) - 구정리터널, 증약터널 - 세천 미군저유소 - 정동(캠프 에임스)

 



11월 1일(토), 오전 10시, 지하철 판암역에 대전평화발자국 참가자들이 모여 준비한 간식과 자료집을 나눈 후 평화발자국을 출발 합니다. 12명의 대전지역 회원과 시민, 서천 회원 2명, 보령 회원 5명이 함께 차량에 나누어 타고 식장산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이번 탐방에는 중도일보의 임병안 기자도 취재를 위해 동행하였습니다. 주차장에 내려 빙 둘러 서서 자기소개와 인사를 나눈 뒤 전망대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리치몬드 사이트는 캠프 험프리스(평택 위치)에 본부를 둔 제41통신대대가 관리하는 통신 중계 시설부지로 1954년 경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방문한 옛 미군 저유소 부지와 마찬가지로 대전의 식수원인 대청호가 가까워 석유계총탄화수소가 기준치를 십 수배 초과하는 등 환경적 문제도 많았다고 합니다. 유영재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질의응답이 오간 이후, 헬기장에서 대전 시내 조망을 보고 기념 촬영도 했습니다.

 

6.25 전쟁의 상흔이 총탄자국으로 남아 있는 증약 터널 앞에서  



다시 차량을 나누어 타고 근처 세천의 구정리터널과 증약터널을 들렀습니다. 두 곳 모두 6.25 전쟁 당시 교전으로 인한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조현중 해설사의 당시 교전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긴박했던 작전 상황을 상상해봅니다. 구정리터널은 2003년까지도 실제 선로가 사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증약터널은 전후 젓갈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인 흔적이 있는데, 그대로 방치된 상태여서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잘 보존해서 시민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대전시 차원의 관리를 촉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토양과 지하수 오염이 심각한 반환된 세천 미군저유소 부지에 잠시 들른 후 장동으로 이동해 보리밥과 묵무침 등으로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 후 화창한 하늘 아래로 낮은 건물들만 있는 한적한 장동의 마을길을 걸으며 미군 상대 클럽 건물 등 옛 미군부대의 흔적들을 살펴봅니다. 이 공여구역(장동 탄약창)에서 미군부대는 1997년 공식적으로 완전 철수했지만, 전체 100만평 정도의 육군 탄약창 안에 약 2만4천평의 미군전용 탄약을 관리하기 위해 수시로 미군이 출입하고 있는 ‘실질적 주한미군 주둔지역’입니다. 한국이 제공하는 방위비분담금으로 미군 탄약을 저장하고 관리하는 행위는 마땅히 중단해야합니다. 이 곳에는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됐었다는 사실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대전에 미군기지가 있다는 생각은 특별히 해보지 않았습니다. 우리 곁에 가까이 늘 있어왔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 하던 것 뿐, 그 실체를 보고 장동 주민들의 피해 상황과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현장들을 보고나니 현재의 문제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최근의 관세협상 관련한 미국의 행태까지 살펴보면, 이제는 정말로 ‘헤어질 결심’을 생각할 때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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