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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21] 민족민주노동열사 허세욱 동지 삼우제 - 허세욱 열사 약력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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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민주노동열사 故 허세욱 동지 약력


● 1953년 5월 9일, 경기 안성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출생
  중학교 때 서울로 상경, 막걸리, 꽃, 박카스 등 온갖 배달 일을 함.

● 1991년 한독운수 입사, 택시 운전 시작

● 1994년 40이 넘어 봉천동 철거투쟁으로‘운동’시작

  서울 봉천6동 철거민으로 지내던 시절, 강제철거에 맞서 세입자 대책을 행정당국에 요구하는 빈민운동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관을 갖게 됨.
  허세욱 열사는 “참 부끄러운 기억이 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요. 1995년 봉천6동 철거촌에 살 때였죠. 그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 때라 그날이 그날 같았죠. 빈민운동을 하던 강인남이라는 여자 간사가 용역깡패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냥 구경만 했었죠. 그 뒤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라고 회상하곤 하심.

● 이 사건을 계기로 1995년 관악주민연대 가입하여 활동하고 이후 1998년에는 참여연대, 2000년에는 민주노동당 입당하여 사회운동을 적극 펼침

● 2002년 한독택시 노조의 민주노총 가입에 앞장섰으며, 민주택시연맹 한독분회 대의원 겸 통일부장을 역임

● 2002년 6월 13일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후, 살인미군 처벌과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전면개정 투쟁에 적극 참가하셨고, 살인 미군들이 무죄선고 후 범국민촛불행사에 매일 참여

  열사는 또한 주위의 지인들에게 “나중에 미군이 세운 추모비 대신 내 퇴직금으로 꼭 두 여중생 추모비를 세우고 싶다”고 말씀하심

● 두 여중생의 죽음 이후 반미, 민족문제에 눈을 뜬 열사는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에 가입하고 용산기지이전비용 한국부담 반대,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등 반미투쟁에 적극 참가

  열사는 2004년 용산기지 이전 협상이 진행되는 시기, 외통부, 국방부 앞에서 농성장을 찾으시곤 하던 열사께서 ‘손님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며 용산기지 이전협상의 문제점을 담은 유인물을 1 천부 씩 얻어 가고, 며칠 후 다시 찾아와 사이다 1병을 슬며시 내밀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유인물을 또 얻어갈 수 없냐?”고 묻곤 하셨다. 이렇듯 열사는 용산기지 이전비용 한국부담과 평택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시면서 평통사에 가입, 회원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셨다. 

  열사는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도 불구하고, 또 때론 근무 중 차를 세워두고 서울 평통사 노동분회에서 활동하셨고, 2006년 5월 4일에는 평통사 회원들과 평택 황새울 벌판 철조망 설치 반대 투쟁 전개하다 연행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외에도 열사는 주한미군의 전략적유연성 반대, 방위비분담금 삭감 및 폐기를 위한 기자회견, 농성, 1인 시위에 적극 참가하셨다.

● 망국적인 한미 FTA를 저지하기 위한 학습과 투쟁을 전개

  열사께서는 고된 노동과 박봉의 일상을 실천의 장으로 삼으셨고, 잠을 쪼개 실천하고 공부하셨다. 신문에 빨간 사인펜으로 줄을 쳐가며 공부한 열사의 흔적과 꼼꼼하게 모아든 FTA 관련 자료들은 열사의 피나는 학습과정을 보여준다..
  운전을 하다가도 화장실 갈 일이 있으면 참았다가, 미 대사관 옆 열린 시민공원에 있는 화장실을 들르고 농성중인 대표단들을 찾아, 농성 천막을 손 보곤 하셨다. 또한 한미 FTA 타결이 임박한 3월 29~30일, 직접 만든 1인 시위 피켓을 메고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전개하셨다.

● 2007년 4월 1일 오후 3시 55분, 협상 최종 시한을 넘겨가며 강행되고 있는 한 한미FTA 타결을 저지하기 위해, 열사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불사름

● 2007년 4월 15일 오전 11시 26분 민중들의 절절한 쾌유염원에도 불구하고 열사께서는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 2007년 4월 18일 민족민주노동열사장으로 마석 모란공원 열사 묘역에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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