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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5] 부산 3차 평화발자국 "이제는 칼을 씻는다" 용두산 공원에서 해원공연으로 마무리.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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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찾아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심는다

     

    (동학혁명 120년 기념)

    2014 부산 평화발자국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사람들"

     

    3차 평화발자국

    "이제는 칼을 씻는다"

     

    2014년 11월 15일(토) 오전 10시~오후 5시.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던 200여 년간은 전쟁이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조선으로 출병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명대사 유정과 교섭하여 조선과의 국교를 정상화 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쇼군(일본의 가장 최고권력)의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정하고 조선통신사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부산 평통사의 3차 평화발자국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의 상징인 조선통신사의 발자국을 따라나서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참가자들은 부산진성(자성대)에 위치한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찾았다.

    조선통신사는 일본 막부의 요청으로 조선 국왕이 파견한, 평화와 선린 우호 사절단이었다. “통신(通信)”이란 신뢰를 나눈다는 의미의, 조선과 일본만 유일하게 사용하던 외교용어다.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우호를 상징한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12번 일본을 방문했으며 이 기간 동안 조일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을 막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교류와 선린과 화합이다. 북미관계, 남북관계도 대화로 풀어야 해답이 나온다. 조선통신사는 도쿠가와 막부의 경사나 쇼군 계승이 있을 때 방문했으며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400~500명에 이르렀으며 한양을 출발하여 에도(도쿄)까지 반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한양에서 부산까지 간 후, 부산에서 쓰시마(대마도)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배를 이용하고 오사카에서 에도까지는 육로를 이용하는, 왕복 3천키로가 넘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육로에는 말 1,000여 필을 포함한 약 2,000여명이 대행렬을 이루어 행진하였다. 조선통신사의 행렬이 시가지를 통과할 때 길가에는 수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통신사 행렬을 보려고 앞다투어 나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임란 때 끌려온 조선인들이 있었고 향수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통신사의 총책임자이며, 국서를 받들고 가는 정사 외에 조선통신사에는 막부의 요청으로 특별히 파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의원, 영원, 마상재인으로 지금의 의사, 화가, 서커스의 기예단원이다.

    영원들은 통신사가 가는 곳의 정경이나 의례 장면을 그렸는데 달마도로 유명한 화가 김명국은 그림을 요청하는 일본인의 수가 너무 많아 팔이 아파 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마상재는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다. 일본인들이 "조선국의 마상재는 실로 절묘하고 기묘한 기예다"며 놀라와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류는 이때부터 시작이 된 것이 아닐까?

    최광섭 목사는 특히 손문욱(孫文彧, 또는 이순욱)이라는 사람을 소개하였는데, 그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의 재개와 조일 국교 회복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손씨인지, 이씨인지 확인이 안 될 정도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전후 1607년까지 활동한 조선의 외교관이다.

    손(이)문욱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납치되었으나 일본에서 상급 무사로 승진했으며 전쟁 말기 일본 진영을 탈출하여 조선으로 귀국하였고 조선은 그를 만호(萬戶)직에 임명하였다. 손문욱은 조선, 명, 일본 3국 스파이로 오해될 만한 행보를 보인다. 

    노량진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명나라군의 추천으로 장군선에 동승하고 있던 그는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조명 연합 수군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쓰시마(대마도)번이 조선과의 관계회복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자 손문욱이 쓰시마협상을 위해 기용되었고 그는 “조선과 쓰시마의 평화는 양국 백성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안고 협상에 임했다. 그는 협상의 전제로 조선인 포로 송환과 전쟁에 대한 사죄를 못박았으며 조선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정식 명칭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다.)

    그는 3중 스파이로 간주될 만한 이력을 가졌지만 3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국제적 인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국제관계에서의 평화가 백성의 행복이라는 자각이 있던 이 외교관의 족적은, 한미일 삼각동맹의 올무에 갇혀 국제적인 대결과 항시적인 전쟁위기에 처하게 될 지금 우리 정세에서 외교당국자들이 꼭 되새겨봐야 할 역사다.

    참가자들은 조선통신사에 대해 더 잘 알아보기 위해 부산박물관으로 향했다. 부산박물관에는 오후에 둘러보기로 한 왜관에 대해서도 전시가 잘 되어 있었다.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합법적인 교역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다.”

    왜관은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通商)하던 곳이다. 행정기관을 이르기도 하며,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상업장소가 태종 때부터 여러 곳에 설치되었다. 조선은 조선의 해안가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합법적인 교역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무역을 장려하고 왜구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고자 왜관을 설치하였다.

    왜인들은 처음에 경상도의 연해안을 주로 이용하여 교역을 하였다가, 점차 그 지역을 확대하여 무질서하게 내왕하게 되자, 조선에서는 그 폐단을 줄이기 위하여 부산포와 내이포를 왜인의 교역장소로 한정시켜 출입과 교역품을 통제하였다.

    하지만 왜인들이 점차 증가하자 염포(지금의 울산)와 가배량(지금의 고성군)에도 왜관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내륙으로 들어와 상경하는 왜인에게는 한양에 동평관을 설치하여 숙소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해안가 왜구의 노략질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1419년 쓰시마정벌로 왜관을 폐쇄하였다. 그 후 쓰시마도주의 간청으로 1423년 다시 부산포와 내이포두 곳을 다시 허락한다. 1426년에는 염포를 추가함에 따라 왜관은 삼포제도가 마련되었다.

    삼포왜란 이후에 왜관은 제포에만 두었고 제포에서 조선 관병(官兵)과 쓰시마인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제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모두 추방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이후에도 왜관에서 계속 문제가 발생하자 1544년 다른 곳의 왜관은 모두 폐쇄하고 부산포에만 단일 왜관제도를 설치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관은 다시 완전히 폐쇄되었다가 임진왜란 후 1607년 국교가 재계되면서 부산포가 개항되었고 이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두모포(현 부산 동구청 부근)에 왜관이 들어섰다가 점차 교역량이 늘어나고 두모포 포구의 수심이 앝고 배를 정박하기에 협소하자 1678년 초량(현 부산 용두산공원 부근)에 신관을 지어 초량왜관으로 옮겼다. 조선과 교역을 원하는 일인들은 초기처럼 내륙으로 이동하거나 한양으로 상경이 허락되지 않았고 모든 교역업무를 초량왜관에서만 처리해야 했다. 

    그 때문에 초량왜관은 점차 내부 시설이 넓어지고 규모가 확대되어 부지면적이 11만평에 이르렀다.

    초량왜관은 높이 6자, 둘레 1273보의 돌담으로 읍성처럼 쌓았고 일인들이 담을 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6개의 감시초소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공사관이 초량왜관에 설치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거주지와 교역은 초량왜관에 한정되지 않게 된다.

    당시 초량왜관에 대한 조선의 통제와 감시 정도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 있다. 부산박물관 경내에 있는 약조제찰비(約條制札婢)다.

    왜관이 설치되어 대마도 관인(官人)과 왜인이 상시 거주하게 되고 또한 일본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양국 상인들의 접촉도 많아지면서 조선법이이 무시되고, 밀무역·잡상행위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따르게 되자 조선 조정은 일본측과 여러 차례 약조를 맺어 위반자를 엄중히 단속하였는데, 피해가 줄어들지 않자 168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尹志完)이 돌아올 때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교섭관계를 위임받고 있던 대마도주와 전문 5개조에 달하는 약조를 체결하고, 이것을 한문과 일문(日文)으로 각각 비석에 새겨 조선측은 수문(守門) 안에, 일본측은 왜관의 경계지역에 세워서 알리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금하고 있는 경계선 밖으로 함부로 나오는 일이 있으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② 노점상의 자릿세를 주고받는 것을 현장에서 잡으면 준 자와 받은 자 모두 사형으로 다스릴 것. ③ 저자를 열 때 각방에 몰래 들어가 비밀리에 물건을 사고 파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할 것. ④ 조선 관리들은 일본인들을 끌어내어 구타하지 말 것. ⑤ 피차에 죄를 범한 사람은 모두 관문 밖에서 집행할 것.

    조선의 기세가 아주 등등하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우리는 수사권도, 재판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주한미군의 치외법권적 지위와 선명히 대비되는 내용이다. 최광섭 목사는 “자주권이 있어야 평등해질 수 있다”며 부산사람들의 왜관 운영 경험을 이어받아 부산이 앞장서서 이 땅의 자주와 평등의 기운을 일으키자고 고무하였다.

    참가자들은 박물관을 나서기 전, 그 동안 빠지지 않고 평화발자국에 참가한 분들에게 선물을 나누는 순서를 가졌다.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해원 공연을 열다”

    참가자들은 초량왜관 터가 남아있는 용두산 쪽으로 이동하여 그곳 일대를 둘러본 후 용두산 공원 상설무대로 이동했다.

    부산평통사는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연 올해 평화발자국을 마감하며 전쟁에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해원 공연을 마련했는데, 경성대 하연화 교수와 한사랑교회 방영식 목사가 동참해주셨다.

    사회를 맡은 최광섭 목사는 그 동안 진행된 평화발자국을 소개하고 전쟁이 만든 도시 부산을 평화의 도시로 만들어내고 통일 실현에 기여하자고 호소했다.

    주말을 맞아 공원을 찾은 부산 시민들이 쌀쌀한 날씨에도 공연에 동참하여 뜻 깊은 행사가 되었다.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부천 평통사 신정길 대표는 “임란 때 부산진성에서 옥쇄하신 저의 14대조께서도 오늘의 위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부산에 기행 프로그램이 많이 있지만 평화발자국은 테마를 정하고 그것을 일관된 흐름으로 진행하며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평화발자국 코스들을 모아 한반도 평화지도를 만들어내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내년 부산 평화발자국의 테마는 일제강점기를 이겨낸 부산사람들이다. 더 풍부하고 더 알차며 더 재미있는 모습으로 부산 시민들을 만날 것을 약속하며...

     

     * 공연해주신 방영식 목사님, 하연화 교수님, 그동안 해설해주시느라 애쓰신 최광섭 목사님과 쌀쌀한 날씨에도 끝까지 함께 한 참가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에서 다룬 내용들은 해설사 최광섭 목사가 제공한 자료에 근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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