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증언] TPNW 3차 당사국회의 부대행사 - 민중법정 원고 박정순 선생 증언
관리자
view : 446
지난 3월 3일~7일, 핵무기금지조약(TPNW) 제3차 당사국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회의 기간에는 당사국 정부 대표단이 참가하는 회의 외에도 각국의 반핵평화 단체가 주최하는 많은 부대행사가 개최됩니다.
지난 4일(화), 평통사가 공동 코디네이터로 참여하는 원폭국제민중법정 국제조직위원회도 유엔본부 인근에서 민중법정을 주제로 부대행사를 개최했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날 행사에서는 민중법정 원고로 참여하는 피해자분들의 증언을 듣고, 2026년 민중법정에 대한 홍보와 참가자 조직 방안 등을 중점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아래는 민중법정 원고 중 한 명인 박정순 선생의 증언입니다.
저는 1934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히로시마시 우치코시쵸에서 피폭을 당했습니다. 이곳은 폭심지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공습경보가 울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번갯불처럼 눈이 부신 빛이 비치더니 바람이 일고, 온 천지를 진동하듯 엄청난 폭음이 들렸습니다. 폭음과 함께 집 전체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무너진 집은 우리 가족을 덮쳤습니다. 아수라장 속에서 어머니는 자식들을 하나씩 꺼내 주었습니다. 저는 무너진 기둥으로 인해 뒤통수가 깨져 피가 흘렀습니다. 허리도 다쳐 지금까지 그 통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12살이었습니다.
무너진 집 밖으로 나와보니 동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길에는 죽은 사람, 화상을 입고 피 흘리는 사람, 한쪽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우리 가족은 급하게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총사령부에 의해 가져갈 수 있는 돈마저 천 엔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 돈으로는 한국으로 귀국해 수개월도 생활하기에 어려웠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힌 건 가난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줄곧 일본에서만 생활했기에 한국말을 전혀 사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 사람이라면서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살았는데 고국에 와서도 주변에서 왜놈이라며 우리 가족을 멸시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올해로 제 나이 벌써 92세입니다. 80년간 피폭으로 인해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일찍 떠나보낸 슬픔, 고통, 억울함, 분함 속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식들까지 질병과 정신적 고통으로 겪는 것을 보니 도저히 내가 입을 다물고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핵무기를 투하한 미국은 한국원폭피해자와 그 후손들에게 책임 인정과 사과, 배상해야 합니다.
얼마 남지 않는 생에 꼭 이 말을 하고 가는 것이 원폭 2세, 3세에게 조금이나마 1세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폭국제민중법정의 원고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법정을 통해 우리 미래의 자녀들이, 그리고 젊은이들이 전쟁 없고, 핵없는 세상에 살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