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성명

[원폭국제민중법정 2차 국제토론회] 강우일 주교 인사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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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국제민중법정 제2차 국제토론회] 강우일 주교 인사말

 

원폭 피폭자들의 희생에 대한 산 자들의 책임

 

저는 히로시마에 온 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까운 지인들도 있고,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기념관도 몇 차례 관람했고, 1945년 8월 6일 10만여 명의 히로시마 시민들이, 8월 9일 7만여 명의 나가사키 시민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히로시마에 대해 알고 있었던 내용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 최근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죄 없는 민간인 희생자, 어린이·노약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각종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는 정도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씨가 쓴 『히로시마 노트』라는 저서를 읽으면서 히로시마인들의 원폭 피폭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전의 저의 히로시마에 대한 인식은 주로 원폭이 폭발한 당일과 며칠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로시마 노트』를 읽고 난 다음 오에 겐자부로씨의 시선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바라보면서 저는 그동안 원폭 폭발이 가져온 참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오에씨의 『히로시마 노트』는 1965년 4월에 쓰였습니다. 원폭이 폭발한 지 20년이 지난 다음입니다. 오에씨는 원폭이 폭발한 다음 피폭된 히로시마인들, 즉시 죽지 않고 생존한 피폭자들이 20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겪어 온 고통과 죽음, 절망과 침묵을 들여다보며 큰 충격과 가책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우리가 히로시마 원폭 폭발을 거론할 때 폭발 직후 사망자가 10만여 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부상자도 10만 명이 넘었다는 사실은 잘 의식하지 않습니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는 298명의 의사가 있었으나 건강한 상태로 구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의사는 28명, 치과 의사 20명이 전부였습니다. 의료진들 자신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불안과 무력감에 휩싸여 피폭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부상자가 피폭으로 화상을 입고 피부가 켈로이드 상태로 녹아내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환자들은 전신 피로, 식욕부진, 탈모, 심한 가려움증, 검붉은 피부 발진, 궤양 증세를 경험하다 결국은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얼굴과 상체에 켈로이드가 생긴 여성들은 자신의 흉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랜 세월 집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어떤 청년은 머리와 손에 켈로이드가 있어 결혼도 못하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어떤 여성은 젖먹이 때 피폭을 당했고 18년 뒤에 임신했는데, 출산 직후 골수 백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헤어지는 피폭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아가씨는 우연히 골수성 백혈병이라 적힌 자신의 진료부를 보고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오키나와 스모의 요코즈나가 될 정도로 건강했던 한 청년은 나가사키 군수공장에서 피폭된 뒤 1956년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방사능 장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서 의사와 상담했으나 의사는 당연히 원폭증에 대해 무지했고 그는 방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키나와 스모의 요코즈나를 지낸 그는 결국 앉은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이 엄청나게 부어올랐습니다. 1962년 그는 끝내 피를 반 양동이나 토하고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 대다수가 우리 집안의 고향인 한국의 합천에서 일하러 나간 사람들입니다. 피폭자 중 생존한 이들은 전쟁 후 고향으로 귀국하고 오늘날까지 몸과 마음이 골병 든 채 원폭증을 앓으며 서서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의 피폭자들은 미국·일본은 물론, 한국 정부도 아무런 관심도 돌봄도 제공하지 않는 가운데 외로운 고통과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피폭의 고통과 비극은 2세대, 3세대 후손들에게 계승되고 본인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원폭증이 지금도 그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일본과 미국 정부는 수많은 생명을 단숨에 학살하고, 숨이 붙어 있는 부상자는 몇십 년 을 두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지속하여 고문하고 괴롭히다가 죽음에 이르게 한 도의적 책임을 명백히 인정하고,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진정으로 사죄하기를 촉구합니다. 또 자국민 다수의 아픔과 희생을 외면해 온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무관심과 무책임에 사죄하고 지금이라도 가능한 지원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핵무기라는 인류 최악의 발명품을 지구상에서 퇴출시키기 위해 정치인들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동북아는 국제정치적 갈등과 마찰로 무력충돌의 위기가 갈수록 증폭되고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 중국과 대만의 긴장에 미국과 일본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국제적 긴장 관계를 자신들의 개인적·집단적 이익을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며 위기를 부채질하는 모험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동북아에 무력충돌이 발생한다면 지구 전체에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휘몰아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윤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재앙을 예방하고 저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원폭국제민중법정 2차 국제토론회가 그러한 비극을 차단하고 평화의 버팀목을 마련하는 데 요긴한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토론회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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