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국제민중법정 국제토론회] 강우일 주교 인사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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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국제민중법정 제1차 국제토론회] 강우일 주교 인사말
저는 원폭과 관련된 국제토론회 개회 인사를 드리게 된 강우일 주교입니다. 저는 가톨릭교회의 주교로서 활동해오는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의 평화, 동북아에서의 평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과 연대를 펼쳐왔습니다. 세계 2차대전 막바지에 인류의 전쟁사에 큰 변화를 초래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1945년 8월 미군 항공기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일이었습니다. 이 신형 폭탄은 재래의 모든 무기를 뛰어넘는 가공할 파괴력으로 수십만 명의 두 도시 일반 시민을 일시에 살상하였을 뿐 아니라 폭탄 투하 이후 몇십 년을 두고 폭탄의 방사능은 피폭한 수십만의 지역주민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희생자들은 무기를 들지 않은 후방의 민간인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히로시마에서 죽은 3만5천여 명, 나가사키에서 죽은 1만5천여 명이 한국인이었습니다. 특히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의 합천이라는 시골 지역 출신들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공장에 강제로 동원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 합천 주민의 후손 중 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동향인들이 전쟁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노동자들이었음에도 한순간에 집단으로 살해된 비극에 저도 큰 슬픔과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피폭 후 살아남았으나 방사선 피폭 후유증으로 서서히 죽어간 이들, 또 전쟁 후에 태어났으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각종 원폭 후유증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 중에 살아온 2세, 3세 후손들을 생각할 때 원폭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무기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된 것은 전쟁의 당사국 정부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가장 오지의 농촌 마을이었던 합천의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일본 땅으로 강제 징용한 일본 정부에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원폭을 민간인 주거 지역에 무차별 투하한 미국 정부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인 신분인 이들에게 참혹한 죽음과 고통을 안겨준 국가들은 전쟁이 끝난 후 78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올바로 인정한 적도 없고, 희생자들에게 마땅한 사과나 배상을 한 적도 없습니다. 일본 정부, 미국 정부도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또한 한국 정부도 자국민이 겪은 참극과 희생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사후 지원이나 조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권력을 행사하는 지도자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국민으로부터 그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국민의 심부름꾼입니다. 국민 다수의 생명이 희생되고 짓밟힌 현실에 관심을 쏟지 않고 외면하는 국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가장 중대한 임무를 방기한 것입니다.
원폭 피폭 당사자들은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습니다. 아직 생존하고 있는 2세대 피폭자들마저 고령에 이르렀습니다. 우선은 일본과 미국의 2차대전 당사국 정부가 서둘러 국가의 책임을 명백히 밝히고 원폭 희생자들과 한 맺힌 일생을 살아온 2세대, 3세대 후손과 유가족들에게 진정한 사죄를 표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보다 먼저 자국민 다수의 아픔과 희생을 외면해 온 한국 정부의 무관심과 무책임에 정부 지도자들은 용서를 구하고 늦었으나 가능한 지원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인간적, 비윤리적 참극이 재현되는 일이 없도록 정치인들은 지상에서 모든 종류의 핵무기를 퇴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핵무기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악입니다.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영구히 살상하는 핵무기의 생산도, 보급도, 매매도 이 지상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범죄적 행동입니다.
오늘날 동북아는 국제정치적 갈등과 마찰로 강대국들이 무력 충돌할 위기가 증폭되고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 중국과 대만의 위기적 긴장에 미국과 일본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권력층에 포진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이런 국제적 위기를 자신들의 개인적, 집단적 이해관계의 지렛대로 사용하며 위기를 상승시키는 모험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동북아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민간인의 희생을 초래할 수밖에 없음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인 충돌을 예방하고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원폭 관련 국제토론회가 그러한 비극을 차단하고 평화의 버팀목을 마련하는데 유익한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국제토론회에 멀리서 와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