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3. 29] 뜨거워지는 ‘양심적 병역거부’ 논란, 징병제 논쟁으로 비화될까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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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워지는‘양심적 병역거부’논란, 징병제 논쟁으로 비화될까
김승국(자통협 홍보위원장)
인터넷상에 '자살 사이트', '폭탄 사이트'에 이어 이번에는 '병역기피 조장'사이트까지 등장, 충격을 주고 있다는 기사(연합뉴스 3. 22)를 읽고 해당 사이트에 접속했으나 이미 폐쇄된 뒤였다.
경찰이 밝힌 대로 이들 사이트가 병역거부를 얼마나 선동했는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기사를 쓴 기자의 관점과 경찰의 발빠른 수사·사이트 폐쇄 조치는 또 다른 충격을 주고 있다. 병역제에 이의제기 하는 사이트를 자살 사이트나 폭탄 사이트와 같이 취급하는 기자의 의식과 이단자로 단정하고 박멸하려는 경찰의 대응이 한 뿌리임을 알 수 있다.
징집제 신화에 도전하는 자들을 이단자로 모는 데 경찰과 기자가 합세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과 기자는 징집제를 수호하려는 국방 당국을 이심전심으로 대변하고 있다. 징집제에 토를 다는 자들은 감옥행이나 사회로부터 '왕따' 당할 것을 각오하라는 경고장을 내비치고 있다.
지난 해 '군 복무 가산점 제도'에 관한 위헌 판결에 이어 최근에는 여호와 증인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에워싼 논란이 진행중이다.
군 교도소행을 결행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군 체제의 이단자들이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와 병역의무가 어긋나는 한복판에 서있다.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집총을 거부한다. 현재의 분단상황에서 이웃은 북녘 땅의 군인이다. 여호와가 보기에 북한의 군인도 이웃이며 형제인데 그들을 향하여 총부리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동족을 향해 총구를 겨눌 수 없다'고 병영입소를 거부한 80년대의 학생들이나 양심선언 군인들의 행태와 비슷하다. 다만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것이냐 민족적 양심에 따른 것이냐의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두 부류 모두 분단의 희생양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한 여호와 증인은 분단의 희생양-
분단은 전쟁체제·사회의 군사화를 강요했다. 남북 대결 아래에서 국방의 신성함에 도전하는 것은 이적행위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여호와 증인의 집총 거부를 이적행위로 쉽게 단정하는 고정관념이 형성된다.
이 고정관념 역시 분단이 낳은 산물이며 여호와의 증인들이 개인의 양심과 무관하게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관점에 따라 어떤 적대적인 싸움에도 개입하지 않고 철저히 중립을 지킨다고 한다. 이렇게 중립을 지키는 행위가 집총 거부로 나타난다. 그런데 아직도 냉전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분단의 현실에서는 나와 적 사이에 중립지대란 없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이 설 땅이 없다. 바로 여기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희생양으로 바쳐진다.
우리와 똑같은 분단국가이었던 서독은 동독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면서도 1949년에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헌법에 보장했다. 분단의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대만도 지난해 대체 복무 제도를 도입했다. 이 두 사례는 분단 상황에서도 병역거부에 대한 관용의 폭이 넓어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혹시 한국군의 집단적 사고유형인 반공주의의 그늘에 가려 관용을 베풀 수 없는지도 모른다.
-네티즌들의 문제 제기-
최근 징병제를 에워싸고 논란을 벌이고 있는 네티즌들은 수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도대체 군대란 무엇인가? 국가권력의 폭력장치라고 규정되는 군대가 시민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나? 군대가 제공하는 '힘에 의한 평화'란 가능한가? 이 힘에 의한 평화와 집총 거부하는 여호와 증인의 평화관은 어떻게 다른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개인의 양심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나? 국방의 신성함과 신앙의 자유의 신성함이 어긋날 때 시민 개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하나? 이 때 시민 개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인간 안보' 개념이 성립할 수 있나? 국가권력 중심의 안보관이 시민사회에 평화를 가져다주나? 북한을 주 적으로 상정한 군 당국과 북한을 이웃으로 감싸안아야 한다는 논리의 상충이 개인의 희생(여호와 증인의 교도소행)으로 마감되어야 하나? 여호와 교를 이단시하는 기독교계 일부의 호국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군 복무를 신성시하는 잠재의식에 남성 우월의 가부장적인 상무정신이 있지 않나? 여호와 증인과 같은 소수자의 인권을 도외시하는 군 집단의 집체주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국가권력의 수호'라는 거대 담론과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미세 담론이 엇갈릴 때 어느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하나? 공공재로서의 국방이 시민 개개인의 인권을 억누를 때 어떤 대응을 해야 하나?
네티즌들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시민의식의 성장을 대변한다. 냉전 의식에 짓눌려온 기성세대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네티즌들은 병역문제에 개방적이다.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할 줄 아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므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결단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데 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논란 자체가 시민사회의 성숙이며 군 당국의 유연한 사고를 요구한다. 군 당국은 이러한 시민의식의 성장에 주목하여 징병제 운용의 탄력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군 당국은 징병제 운용의 탄력 모색하길-
네티즌들은 '군대에서 일방적으로 나를 부리는 게 아니라 내가 군대를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이러한 발상 전환은 모병제를 대안으로 떠올린다. 병역기피는 가볍게 처벌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는 냉혹하게 다루는 불균형이 네티즌들로 하여금 징병제 논란을 유발하고 있다. 누구는 군대에 끌려가고 누구는 법망을 피해 병역을 면제받는 부조리가 '꼭 군대에 가야 하나?'는 질문을 낳게 한다. 군 입대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모병제 선호로 이어지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진 것 같다. 네티즌들의 이러한 탄력적인 발상에 걸 맞는 병역제도의 개선이 요구된다.
군 당국은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다양한 징병제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 청춘의 낭비라는 것이다. 군 당국은 젊은이들이 군 입대를 꺼리는 의식의 흐름을 간파해야 할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측은지심이 발동되는 사회 저변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지원병 제도를 확대하는 등 징집제의 획일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모병제를 검토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참으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군이라면 군비축소나 감군에 대비해야 하고 감군의 일환으로 모병제를 상정해야 할 것이다. 모병제는 평화통일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될 관문이다.
젊은이들에게 군 입대는 실존의 문제이다. 여호와의 증인과 달리 실존의 결단에 따라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할 젊은이들이 나올 수 있다. 이들을 또 다시 '아웃사이더'로 만들지 않기 위한 병역제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2001년 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