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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5. 18] 1951년 강화도 양민학살 사건 관련자료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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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강화도 양민학살 사건관련 자료

1. 학살 사건이 발생한 시기, 일시

일시 : 1951년 1월 6, 7, 8일(3일간)
장소 : 강화 구대교옆 갑곶 나루터와 옥림리(옥계)갯벌

2. 학살 당시 상황

1950년 9·28 수복 후 민간 청년 반공 단체인 치안대원과 대한 정의단 단원들은 가볍게 부
역한 사람이나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끌고가 고문하고 취조하면서 괴롭혔다. 그러다가
잠시 해산하였는데 1951년 1·4후퇴당시 그들의 잔당 약 22명이 12일, 18일에 향토방위 특
공대를 결성하였다. 비밀리에 강화 신문지에 있는 양조장 자리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면서
남아있는 가족들을 연행해 갔다. 저희 집에도 12월 27일경이라 생각되는데 저녁에 특공대
기동대들이 3명이 복면을 하고 들어와 이곳 저곳을 뒤지다가 애기를 업고 마루에 서 있는
어머니를 끌고 갔다. 남녀(부녀자15)모두 60명 가량을 양조장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에 관청
리 옛 곡물 검사소 건물로 데려가 가두었다. 그때는 간판을 걸고 일하다가 경찰이 1.2일 후
퇴함에 따라 경찰서를 장악하고 유치자아에 사람들을 가두었다가 1월 6일에서 8일까지 3일
간에 걸쳐 약 10여명씩 저녁에 갑곶 나루터와 옥계 갯벌에서 바다를 향해 세워놓고 뒤에서
총으로 학살하였다.
그 후 1월에서 2월말까지에 걸쳐 각 곶 해안에서 약 300명을 웃도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
다. 먼저 학살한 60명은 노인, 부녀자, 갓난아기로 양민이었고, 그 후의 학살은 부역을 하고
피난 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강화 주민들이었다고 하나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다고
한다. 그 당시 저희 아버지는 강화 교육청의 장학사였고 어머니는 개성 호수돈 여고를 졸업
하고 의학공부까지 하신 인텔리였다. 강화는 휴전선이 가깝고 갑자기 발발한 6.25로 인해 피
난 갈 틈도 없었고 나는 12살 국민학교 5학년이었을 때 공부하던 학교에서 전쟁을 맞았다.
피난을 못 가신 아버지는 지식층들을 그냥 두지 않았던 인공시절에 인민군들의 총칼에 위협
을 당했고, 일을 보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공시절 3개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9.28수복을 맞으며 아버지는 행방을 모르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어머니와 우
리 6남매는 빨갱이 가족으로 몰렸고, 그해 12월에 끌려가신 것이 어머니와 우리들의 마지막
이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5남매를 큰집에 데리고 가시던 할머니께서도 외포리 소개고개에
서 특공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3. 가해자(생존자)

최중석 - 특공대장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김동환 - 대원 인천시 강화군 관청리
박창성 - 대원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 피학살자 현황

구씨 77세(여) , 김덕임 39세(여), 서화석 1세(남), 오천용(남), 부인(여), 며느리들(여), 최진
국(남), 부인(여), 윤기항(남)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양민으로 약 300명을 웃돌 것이라 하나
유족과 연고자를 못 찾고 있는 실정이다.

5. 유족회 활동 내용

1993.10.03 - 의정부 장암아파트최중석 방문. 양민학살에 대해 물었으나 전면 부인하고 향토
사수만 했고 사람은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함.
1993. 10. 04 - 강화 박창성은 못 만나고, 강화 문화원에서 특공대 역할관련 책자 보았음.
1993. 10. 05 - 강화읍 관청리 김동환(가해자)을 만나서 자기들이 활동한 모든 일과 가족들
을 죽이고 행동한 것을 다 털어놓았다. 우리 어머니도 희생되었다고 말했다.
1995. 08. 20 - 강화읍 관청리 곡물검사소 옆에 사는 임귀술(90세)할머니가 증언함.
1995. 08. 21 - 임귀술 할머니를 만나고 김동환도 만나서 그때 상황을 더 자세히 들었다.
1995. 10. 16 - MBC PD수첩의 PD와 만남.
1995. 10. 17 - PD일행과 강화 갯벌에서 인터뷰와 촬영을 했으나 방영은 무산됨
1996. 03. 18 - 옥계, 갑곶 돛대 현장답사
1996. 12. 09 - 박용중(당시 특공대 감찰 부장)을 만났으나 식물인간인 상태여서 면담무산.
1996. - 강화 천주교회 신부님께 유족 찾기에 관련해 협조 요청.
1999. 01. 22 - {말}지 기자와 최중석 방문했으나 모든 것을 부인해서 보도 무산.
1999. 05. 21 - {말}지 기자와 김동환 만남.
1999. 06. 02 - {말}지 기자와 김동환 만나 현장에서 사진 찍고 그때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하고 고개 숙이면서 미안하게 되었다고 하였음.
1999. 07 - {말}지 7월호에 처음으로 학살내용 보도.
1999. 07. 07 - 강화 신부님과 2000년 1월 6일날 합동 위령 미사하기도 합의.
1999. 12. 19 - 학살현장 유족들과 함께 답사.
2000. 01. 04 - 10시 합동 위령 미사 준비 완료.
2000. 01. 06 - 10시 위령미사 집전
2000. 03. 01 - 유족회 총무와 최중석 만남.

언론에 보도되기 전 전면 부인하던 최중석은 그때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특공대 일을 하
면서 매일 일지를 썼고 모든 서류를 구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분실되었다고 한다. 한편
김동환은 서류를 태워 버렸다고도 하고 누구에게 주었다고도 한다. 두 사람의 말은 일치하
지 않았고 최중석은 그 후 양민 학살과 관련하여 대구 교도소에서 3개월을 복역하였다고 한
다. 그 당시 청방(청년 방위대)의 지원도 받았고 군부대들과 경찰에서도 협조하였다고 하였
다. 처음에 완강히 부인만 하던 그가 위령제 신문 보도와 {말}지 기사를 보고 살아 있는 가
해자들과 상의해서 말을 하겠다고 하여 나중에 만나자고 하였다.
2000. 01. 06 - CBC 생방송전화 대담. 그 당시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의 내용을
전화로 약 40여분 방송함.


● 학살 배후에 경찰이 있었다 -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 자행한 강화특공대원의 고백●

학살이 있었다. 그리고 49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숨겨진 치부로만 남아있다. 피해자의
아픈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못한다.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여기 49년전 강화도 양민학살에 가담했던 한 칠순 노인의 증언이 있다. 이 증언을 공개하는
것은 진상 규명이야말로 화해와 용서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판단에서다.


강화군에 사는 일흔두 살의 김동환씨는 한국전쟁 당시 활동했던 강화향토방위특공대(대장
최중석, 이하 특공대) 감찰부 소속 대원이었다. 감찰부는 부역자와 그 가족들을‘즉결처분’
하는 일을 맡았던 부서. 대부분의 특공대 대원들이 세상을 달리한 지금, 김동환씨는 49년 전
강화도에서 벌어졌던 학살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인터뷰는 지난 6월 3일 강화
읍내의 한 음식점에서 이뤄졌다.

―`특공대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지난 50년 12월 당시 강화경찰서 사찰과에 이북 출신인 박선호 형사가 있었다. 이 사람이
‘너희들 신변보호를 해 줄테니 보도연맹에 들었던 놈들, 그러다가 다시 빨갱이짓 한 놈들
을 좀 처치해 달라’고 했다.”

―`그런 일을 왜 당신들에게 시켰나.
“경찰관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직접 처단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때 박 형사는 특
공대 부대장을 했던 홍종택네 집에 하숙을 들고 있었고, 종택이 친구인 우리들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또 우리들은 50년 11월 초에 치안대를 조직해서 이른바 ‘부역자’를 색출해 경
찰에 인계하는 일을 한달 남짓했는데, 그 경력도 참작된 것으로 안다.”

―`학살 사주는 박선호 형사 혼자서 내린 것인가.
“당시 강화경찰서 김병국 서장도 이북사람이었는데, 박 형사와 잘 통했다. 서장과 의논해서
시킨 것이겠지, 그런 일을 어떻게 일개 형사가 개인적으로 시킬 수 있겠는가.”
김동환씨는“특별히 좌익에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면서 다른 대원들의 경우에도 그때
좌익으로부터 피해를 본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젊은 혈기에 그저
주먹질이나 하고 다니던 친구들과 함께‘저놈들이 지라알하는데, 우리도 거기 맞서서 한 번
해보자’하는 차원”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24명의 20대 초반 청년들은 1950년 12월 18일 강화향토방위특공대를 비밀리에
결성했다. 경찰서에서 1백m 정도 떨어진 양조장 건물에 본부를 마련한 이들은 강화경찰서
로부터 소총 몇 자루를 지급받았다. 야간통행증도 발급받았다. 경찰이 이른바 부역자들을 취
조한 뒤 한밤 중에 내보내면 경찰서 정문 앞에서 다시 붙잡아 해변가에서 처치해야 하기 때
문이었다. 특공대는 경찰로부터 신병만을 넘겨받았기 때문에 학살된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
로 알지 못했다.

학살을 위해 야간통행증까지 발급

특공대의 조직 목적이 참전이나 향토 방위보다는 양민학살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은 이 지역
향토사료인『강화사』(강화문화원, 1988)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당시 강화향
토방위특공대의 초기 활동 내역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특사령을 받고 석방된 사람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려는 자들을 찾아내어 처단 … 부역행위
를 하다 북괴군과 후퇴하여 달아난 자들의 가족들의 동태를 살핀다.”
『강화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학살은 이른바 부역자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까지도 자행
되었다. 50년 12월 말부터 전황이 나빠지자 특공대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거나 종적을 감
춘 사람들의 가족을 읍내 양조장 건물에 잡아 가두었다. 서영선씨(62세, 서울시 양천구 신월
동)는 자신의 어머니 김덕임씨도 그렇게 끌려간 후 학살되었다고 말했다.
“12월 27일경이라고 기억한다. 저녁 7시쯤 되었는데, 검은 보자기로 복면을 한 세 사람이
집으로 들어와 여기저기를 뒤졌다. 그리고선 8개월 된 애기를 업고 있던 어머니를 잡아 갔
다. 그게 내가 마지막 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양조장 건물에 감금된 사람들은 모두 60여 명. 김동환씨는“남산 절 밑에 오씨네 부부와 며
느리들, 양조장 옆에 최진국씨 부부, 차부 옆 윤기향씨 등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들을
잡아가뒀던 김씨의 말이다.
“그 때 여자가 한 스무 명 정도였는데, 이북으로 간 사람의 가족들이었다. 남자는 부역했다
가 피난 못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직접 잡아온 것도 아니고, 기동대가 나가서 잡
아왔다. 동네 유지들한테 물어봐서 누가 악질으로 굴었다 하면, 밤에 가서 잡아온 거다.”

―`이후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가 어디 취조하는 방식에 대해 뭘 아나. 그냥 한두 명씩 불러다가‘너 이놈의 새끼
그러지 않았나’하며 두들겨패곤 했다. 1·4후퇴 나고 경찰이 철수한 뒤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겼는데, 먹일 것도 없고 해서 즉결처분했다. 그때가 아마 1월 7·8일쯤 될 거다.”

―`재판 같은 것도 안 했다는 말인가.
“그렇다.”

―`즉결처분은 어디서 했는가.
“이삼십 명씩 갑곶리 나루터와 옥계 갯벌에 나누어 끌고 가서 처형했다. 포승으로 묶지 않
은 상태에서 끌고 갔는데, 도망가지 못하더라.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면‘저기 아군 함대 와
있어서 타러 간다’고 둘러댔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은 없었나.
“다들 체념했는지, 그런 사람은 없었다. 간혹 바다로 뛰어들어 도망가는 사람은 있었지만
추운 겨울이라 얼마 못가서 물 밑으로 가라앉더라.”
김씨는 의미있는 기억을 되살려 냈다.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을 묻자 딱 한 사람
이“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고, 나머지는 다“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다. 이른바
‘악질 공산당원’이 아닐 수 있다는 추측도 들었다.“과연 이들을 모두 죽여야만 했는가”
하고 묻자 김씨는“그 땐 저 놈들을 두면 또 지라알할 거고, 어차피 죽을 놈이라고 생각했
다”고 대답했다.

개가 갯벌 나가면 사람 다리 하나 물고 올 정도

경찰이 철수한 강화도에서 특공대는 유일한 무장 권력기관이었다. 이들은 섬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과 월북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색출작업을 계속했고, 심지어는 가족
들의 권유로 자수한 부역혐의자들까지도 모두 처형했다. 경찰과 인민군 모두 물러가고 특공
대만이 남았던 51년 1·2월 동안 부역자 가족들은 극도의 공포에 시달렸다. 언제 특공대에
끌려가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주민들도 부역자 가족을 가까이하길 꺼려했다.
이들과 가까이 지냈다가는 특공대에서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따라 강화도를 들어가면 섬 초입의 강화역사박물관 옆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당시 전적지인 갑곶돈대가 있다. 그 돈대 아래로 보이는 갯벌이 당시 학살 현장
중 하나인 갑곶리 선착장 자리. 특공대는 51년 1월 초 이곳에서 부역혐의자 가족들을 학살
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악질 공산당원’들을 처형했다. 날이 갈수록 과감해진 특공대는
1월 하순 경 아예 백주대낮에 집단학살을 벌였다. 당시 김포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인민군
에 대한 일종의 무력시위였던 셈이다. 당시 불과 3백여m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인민군측은 갑곶리 선착장을 향해 박격포를 쏘며 공격하기도 했다.
당시 강화에서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학살은“개가 갯벌 나가면 사람 다리 하나 물고 들어온
다”는 말까지 낳을 정도였다. 특공대는 썰물 시기에 맞춰 해안가로 끌고가 처형을 한 뒤,
시체를 바닷물 속으로 처넣었다.
김동환씨에게 특공대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은 모두 몇 명이나 되는지 물어보았다.
“그때 처형한 사람이 대략 2·3백명은 될 것이다. 정확한 수는 따로 집계하거나 그러지 않
아서 모른다. 게다가 강화특공대 말고도 면 단위로 조직된 특공대들이 있었다. 이들이 자체
적으로 처형한 사람들까지 합친다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억울하게 당한 사람은 없었느냐”고 질문하자 김씨로부터“많겠지”라는 짧은 답변만 돌
아왔다.

식량 문제도 있고 해서 학살?

당시 특공대 대장을 맡았던 최중석씨(77세, 의정부시 장암동)는 학살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우리가 무슨 학살을 하는 사람들이냐”면서“당시 체포했던 사람들은 모두 경찰에 넘
겨 줬다”고 말했다. 최씨는 그러나『중앙일보』에 연재된「민족의 증언」(1972년 7월 17일
자)을 통해“1월 7일 인천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석방된 공산당원 1백여명을 생포, 그
중 악질당원 60여명을 식량문제도 있고 해서 처형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강화로 쳐들어오는 인민군에 맞서 수차례 전투를 벌여 오다가 51년 2
월 말경 육군본부 소속 을지제2여단 특별연대로 보충개편되었다. 이후 김포, 개풍, 연백, 개
성 등지에 침투, 후방 교란작전 등을 벌여오다가 창설 7개월째인 51년 7월 자진해산했다. 이
후 특공대는 국토 사수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회의장, 경기도 경찰국장, 육군 4863 부대장으
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대장 최중석씨는 이후 감사원에 취직, 87년 정년퇴직한 것으로 알
려졌다. 현재 강화읍내에는 강화특공대 의적비도 세워져 있다.
당시 특공대에 참여했던 24명의 대원 중 대부분은 세상을 떠나고, 현재 생존이 확인되는 사
람은 김동환씨와 최중석씨 정도다. 학살을 지시했던 박선호 형사는 한국전쟁 와중에 사망했
으며, 당시 서장을 지낸 김병국씨는 전쟁 이후 타 지역으로 전출갔다가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졌다. 학살과 관련된 사람들은 이제 몇 사람 남지 않은 상태다. 그리고 학살 사건에 대
해 알고 있는 강화 지역의 원로들도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해 언급을 피하고 있었다. 강화
문화원 이호경 향토사연구위원장(75세)는“서로 원수만 질 일인데, 자꾸 거론하면 무슨 이득
이 되겠는가”하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인민군은 더 많이 학살했다”면서 특공대의
양민학살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양민학살의 피해 유가족들은 대부분 고향을 등지고, 오랜 세월을 경찰의 감시와 연좌
제의 고통 속에서 숨죽여 지내야만 했다.‘빨갱이 집안’이라는 세간의 손가락질과 함께.
전쟁이 끝나자 버스회사에 취직해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서울­강화간 직행버스를 몰아 온
김동환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동안에는 먹고사는데 바빠서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내왔다. 결과적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경찰에 이용당한 거다. 그래도 말은 국가를 위해서 했다고 해야지….”


● 강화 학살사건 유가족 서영선씨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잘못은 인정해야”

지난 5월 21일 오후 1시. 강화 읍내의 조그만 다방에서 한 60대 여성이 특공대 출신의 김동
환씨와 마주앉았다. 서영선씨(62). 한국전쟁 당시 12살 소녀였던 서씨는 장학사였던 부친이
부역자로 몰려 소식이 끊긴 뒤, 어머니마저도 특공대원들에 의해 끌려가 학살되었던 유가족
이다.
그는 김씨에게 특공대가 어떤 사람들을 잡아갔는지, 잡아간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사람들을 죽인 것은 정당했는지를 연이어 질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청 교육과장을
지낸 서정구씨의 아내 김덕임씨를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바로 그 분의 딸”이라는 말
과 함께. 이 말을 들은 김동환씨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다른 데로 피난만 갔더라도 살 수
있었을 텐데…”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때 저희 어머니만 살려 주셨더라도 평생 은인으로 모시고 살았을 건데…”라고 말하는
서씨의 눈에는 물기가 번졌다. 1시간 남짓 대화를 나눈 뒤 “솔직히 다 말해 줘서 고맙다”
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서씨에게 가해자에 대한 원한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서영선씨로부터 49년 전의 잊혀진 사건을 들추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 동안 과거를 숨기고 살아왔다. 옛날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 내력
때문에 또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더 늦어지면 진상 규명은
영영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어떤 일을 해 왔는가.
“92년부터 당시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 다녔는데, 쉽지 않았다. 특공대장을 만나 보
니 학살을 부인하고 있었다. 유치장까지 끌고는 갔는데, 그 다음은 모른다는 거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물론 특공대가 강화를 지킨 역할은 인정한다. 그러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데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당시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최소한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라도 확인
해서 제사라도 지내고 싶다. 그리고 다른 피해 유가족들도 찾을 수 있다면 함께 위령비라도
세워서 원혼을 달래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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