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11. 7] [한겨레신문] 핵확산금지체제 토대 ‘흔들’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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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확산금지체제 토대 ‘흔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4일 다른 나라들이 유엔의 승인없이 무력을 계속 사용할 경우 러시아도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지난달 말에는 프랑스 정부도 이런 움직임에 가담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냉전이 무너진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의 핵 선제공격 전략 표방에 뒤이은 핵강국들의 잇따른 전략수정으로 핵 무기가 ‘사용 가능한 무기’로 재등장하면서 핵확산금지체제의 토대가 허물어지고 있다.
번지는 선제공격론=푸틴 대통령은 이날 로마 방문에 앞서 이탈리아 기자들과 만나 “만약 예방적 무력사용 원칙이 국제관행으로 지속된다면, 러시아도 국익수호를 위해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행동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달 2일 러시아 국방부가 내놓은 전략무기 현대화계획 보고서에서 밝힌 내용을 재확인 한 것이다. 당시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핵무기를 억지력이 아닌 위협용으로 바꾸려는 위험한 경향이 이어지고 있다”며 “미국의 핵정책이 공세적으로 바뀜에 따라 러시아의 핵정책 변화도 불가피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은 지난달 27일 프랑스가 억지력 중심의 핵정책을 바꿔 미국이 이른바 ‘깡패국가’로 분류하고 있는 나라를 직접 겨냥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익명을 요구한 군 고위관계자의 말을 따 “이런 전략수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중국의 위협에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대해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튿날 성명을 내어 “억지력 중심의 핵정책에 변화는 없다”고 부인했다. 그럼에도 <로이터통신>은 국방부 고위장성의 말을 따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핵정책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또 <리베라시옹>도 후속보도를 통해 “프랑스는 미국이 2002년 1월 내놓은 핵태세검토보고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저강도 지하시설 파괴용 핵무기 개발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핵 확산 부추기는 미국=러시아와 프랑스의 이런 움직임은 부시 대통령 취임 뒤 바뀐 미국의 핵정책 때문이다. 부시 정부는 2001년 말 △신형 저강도 핵무기 개발 △비핵보유국에 대한 핵 선제공격 △핵실험 재개 준비기간 단축 등을 뼈대로 하는 ‘핵태세검토보고서’(NPR)를 내놓아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지난해 6월에는 북한 등의 위협을 들먹이며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미사일방어(MD) 구축작업에 본격 나섰다.
또 같은 해 9월 발표된 국가안보전략과 12월 내놓은 대량살상무기대응전략 등을 통해 부시 정부는 테러와 관련이 있는 나라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려 할 경우 선제공격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지난 9월16일 미 상원이 신형 핵무기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법안을 53대 41로 통과시키면서, 이른바 ‘벙커버스터’로 불리는 소형 핵무기 연구를 공식화했다.
미 ‘군축·비확산 센터’의 몰리 피케트 소장은 “이란과 북한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해 나서라고 국제사회를 압박하는 미국이 정작 자국에선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지속하는 건 위선”이라며 “이번 법안 통과로 세계적 비확산 노력에 치명적인 재난을 초래하게 됐다”고 개탄했다.
국제사회, 혼란 속으로=핵 비보유국들은 199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무기한 연장하면서 핵무기 사용 또는 사용 위협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른바 소극적안전보장(NSA) 조항을 핵강국들이 위반했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핵금조약 체제의 근본적 변화와 유엔의 역할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모하메드 앨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3일 전세계의 모든 무기급 우라늄과 플루토늄 처리를 다국적 통제 아래 둘 것을 제안함으로써 핵확산금지조약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촉구했다. 그는 이날 유엔총회 연설에서 “핵무기 제조에 관한 정보 입수가 더 쉬워졌기 때문에 무기급 핵물질에 대한 접근 통제가 특히 중요하게 됐다”며 무기급 핵물질 처리과정을 다국적 통제를 받는 시설에 한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은 요지부동이다. 오는 7일 폐막되는 제58차 유엔총회 제1분과(군축·평화)위원회에 제출된 핵 군축관련 결의안 초안 10여건 가운데 미국은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 관련 결의안 등 7건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