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4] [허세욱 회원 쾌유 기원 촛불] 값어치를 따질 수없는 "500원 동전의 사랑"
평통사
view : 1906
[한미FTA 전면 무효! 허세욱 회원 쾌유 기원 평통사 촛불행사]
"허세욱 회원 사랑해요! 힘내세요!"
2007-04-04, 한강성심병원 앞
4일(수) 저녁 8시 평통사 회원 70여명이 모여 생사의 기로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허세욱 회원의 쾌유를 기원했습니다.
△ 모두가 한마음 되어 '허세욱 동지 힘내세요'를 외쳤다
△ 병원 대기실에는 허세욱 회원의 직장 동료들인 한독운수 조합원들 수십명이 매일 밤을 지샌다.
커다랗고 뭉툭한 손을 꼬물거리며 평통사가 제안한 '쾌유를 비는 학'를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접는다.
서울평통사 김슬기 회원의 편지글을 먼저 소개합니다.
허세욱 회원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글입니다.
허세욱 회원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글입니다.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500원 동전의 사랑”
허세욱 회원님께 평소에 부르던 대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허세욱 선생님..
지금 선생님의 아픔과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병상에 누워계실 선생님을 떠올릴 때마다 저의 가슴 한 편이 아파옵니다.
4월 1일 이후,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선생님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착각에 문득 놀라곤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선생님의 분신에 관한 소식을 접하면 지금 이 현실이 꿈이었으면... ‘내가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만히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가장 최근에 선생님을 뵌 것은 3월 30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한미FTA반대 촛불문화제였습니다. 그 날 선생님은 1인 시위 피켓을 몸에 매고 계셨습니다. 1인 시위 피켓은 큰 우드락에 한미 FTA의 문제가 무엇인지 선생님께서 직접 손으로 적으신 것이었어요. 직접 피켓까지 준비 해 오신 모습에 한미 FTA반대를 위한 촛불 문화제에 나오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선생님의 지난 활동사진들이 필요하다는 주변의 부탁에 선생님의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2002년도 평통사가 여중생 투쟁에 앞장설 때부터 저희와 함께 하셨고 2004년도에 평통사에 가입하신 선생님의 사진을 찾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중생 추모집회, 김선일씨 추모집회,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막아 나서기 위해 했던 선전전을 비롯한 투쟁, 서울 평통사 노동분회 모임을 비롯한 각종 회원행사....
참여를 많이 하셨는데도 사진이 많지가 않았습니다. 사진 속에서도 거의 뒤편에 계셔서 선생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사진을 찾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한결같이 뒤에 서 계셨다는 사실을...
평택에서 강제로 미군기지를 확장하겠다고 들판과 마을에 수많은 공권력이 쳐들어올 때, 몸을 사리지 않고 앞에 나서서 싸우시던 기억이 납니다.
작년 5월 4일, 대추분교가 무너지고 그 아름다운 들녘에 철조망이 쳐질 때 평통사 회원들과 함께 싸우다가 연행까지 되셔서 고생을 하셨지요. 연행에서 풀려나오신 이 후에 괜찮으신지 전화를 드리니 몸을 다쳐서 한의원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평통사 월례집회나 투쟁 일정이 잡힐 때마다 전화연락을 드리는 제가 귀여우셨는지, 연락을 할 때마다 500원씩 주겠다고 하셨지요. 그리고는 참여하실 때마다 500원 짜리 동전을 건네주셨어요. 그 동전을 받고 500원짜리 아르바이트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저를 보고 웃으시던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택시운전을 하시다가 평통사 사무실 근처에 오시게 되면 음료수 한 병을 사들고 조용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던 선생님 얼굴도 떠올립니다.
노동 분회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하시려고 노력하시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설사 모임을 하는 날이 택시 운전을 해야하는 날이어도 잠시 짬을 내어 들러서 인사를 건네시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제게 선생님이 아니라 동지라고 부르라고 하시던 허세욱 선생님...
항상 성실하게 생활하시며 우리 회원들과 함께할 땐 조용히 뒷자리를 지키시고 투쟁의 현장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섰던 허세욱 선생님
꼭 일어나셔야합니다. 지금의 아픔과 고통 이겨내시고 다시 일어나셔야 합니다.
선생님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다시 돌아오실 거라 믿습니다.
힘내세요. 허세욱 선생님. |
'허세욱 분신 대책위' 상황실장을 맡고 있는 민주노총 박석민 대외협력 실장의 경과 및 상황 브리핑으로 촛불행사가 시작됐습니다. 박 실장은 “허세욱 동지 분신은 한국 경제의 모든 것을 미국에 바치는 굴욕적 협상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 한 것이며, 민중의 삶을 내모는 한미FTA 막아내기 위한 투쟁”이라며 망국적인 한미FTA 강행한 노무현 정부를 규탄했습니다.
박 실장은 허세욱 회원의 상태에 대해 상세히 전했습니다. “처음 의사는 70% 사망을 예상했습니다. 오늘도 기도절제술, 박피 및 피부이식수술을 진행했으며 4시간여 걸친 수술이었습니다. 의사에 말에 따르면 장기는 괜찮은 편이고 폐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관지가 많이 손상되어 일주일 경과를 지켜본 후 2차 수술에 들어갈지 상황을 지켜봐야한다고 밝혔습니다. 치료를 하는 의사도 ‘전 사회적으로 관심이 있는 부분도 있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합니다. FTA 범국본 차원에 대책위 구성하였고 평통사 회원들도 여러 곳에서 허세욱 동지가 빠르게 쾌유될 수 있도록 실천과 모금 활동을 전개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 허세욱 회원의 상황을 설명하는 박석민 상황실장(오른쪽)과 서울평통사 테마사랑방 '한미 FTA의 문제점'에서 허세욱 회원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허영구 부위원장(왼쪽)
서울 평통사 서영석 대표는 허세욱 회원 쾌유를 바라는 이야기를 통해 “허세욱 회원이 우리에게 바랐던 점이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고민, 번뇌를 하였을까?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촛불 마음이 허세욱 회원에게 전해져 빠른 쾌유가 되길 기원하며, 우리들은 그분이 바랬던 FTA반대 투쟁과 누구나 밝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나가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동안 서울 평통사 회원으로 함께 실천했던 과정을 담은 허세욱 회원의 ‘실천 슬라이드’를 함께 보았습니다. 슬라이드를 보던 회원들은 허세욱 회원의 사진이 나오자 곳곳에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 허세욱 동지의 사진으로 만든 슬라이드를 참가자들이 같이 보고 있다.
한미FTA 반대 입장을 밝히며, 전국으로 한미FTA 체결의 문제점을 밝히는 강연을 다녔던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정태인 씨가 허세욱 님을 생각하며 쓴 글과 향린교회 나성국 목사님의 글을 부천 평통사 김현숙 사무국님의 낭독하였습니다. (아래 붙임의 글)
한미FTA 규탄의 이야기도 이어졌습니다. 민주노총 허영구 부위원장은 “허세욱 동지가 지난 3월 30일 집회 때 꿀차를 사다주시면서 몸 건강히 잘 싸워달라고 하셨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허세욱 동지가 속해 있던 4개(평통사, 참여연대, 민노동당, 민주노총)단체에서 성실히 활동한 모습을 보니 존경스럽습니다. 분신의 본질은 단순히 한미FTA 반대를 넘어 미제, 자본의 지배를 끊어내는 것이며, 현재 한미FTA는 타결된 것이 아니라 미국은 아직 합의되지 않은 많은 부분을 요구해 나갈 것 입니다. 따라서 한미FTA를 막아 낼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대차게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허세욱 동지가 고통을 벗고 우리 앞에 당당히 걸어 올 수 있도록 허 동지가 살아왔던 그 길을 따라 힘차게 나가자.”고 의지를 다져습니다.
부천 평통사 노래 소모임 분회원들이 허세욱 회원의 쾌유를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노래를 듣고 허세욱 회원이 당차게 일어나라길 바란다”는 마음 전달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쾌유를 기원하는 마음을 모아 가져온 꽃을 화병에 꽂았습니다.
△ 참가자들은 간절한 마음을 모아 꽃을 꽂았다
* 끝으로 촛불행사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협조해주신 셔틀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께 감사드립니다. 평통사 촛불행사 장소가 병원 주차장이었습니다. 그 곳은 병원 셔틀버스를 세워 놓는 곳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평통사 촛불행사로 주차를 못해, 한 시간 반 동안 퇴근도 못하셨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셔틀버스 운전기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촛불행사에 참여한 회원들의 모습>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 정태인 님의 글 1.파김치는 이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하철 탈 엄두가 나지 않아 멍한 상태로 섰는데 택시 한 대가 스르르 와서 멈춘다.
친분을 믿어서适?일정을 확인해 주지 않는 바람에 부랴 부랴 부산 강연 일정을 조정해서, 쫓기듯 두 건을 연달아 하고 비행기로 김포, 그리고 택시로 숭실대까지 허둥댄다. 언제나 그렇듯 일단 마이크를 잡고 말을 시작하면 어디 피로를 느낄 겨를이 있을까.
학생들, 시민들, 철거민들... 질문을 받고 인사를 하고, 동작구 위원장의 뒷풀이 제의를 정중하게 사양하고 교문을 나선다. 휘청... 몸이 잦아 드는데 택시가 스르르 와서 멈춘다.
끌리듯 문을 열고 뒷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정태인 선생님, 저 방금 강의 들었습니다” “저는 택시노련 아무개입니다” 꿈 결인듯, 차분하달까 어눌하달까 저음으로 사근 사근 말을 붙인다.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은 하얗게 센 머리... 그러나 다부진 몸의 그는 필경, '내내 수줍어 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투사로 나타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고 혼자 상상한다.
FTA에 대한 질문에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덧 오목교를 건넜다. “아...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죠” “아닙니다. 이렇게 강연을 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데요. 저 같은 사람도 인사는 할 수 있어야죠”
그가 떠나고 난 또 다시 멍하니 교차로에 서 있다.
신림 4거리 4번 출구로 나오니 요지경이다. 여기가 그 추레했던 신림4거리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이 어지럽다. 계속 가다 보면 관악복지관이 있다고 했다. 휘황한 조명은 잠깐, 다리를 건너며 갑자기 30여년 전의 신림동이 나타난다.
대도시건, 시골이건 구나 군 단위에 문화회관, 복지회관, 또는 여성회관이 생긴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좋을 필요가 있을까, 할 정도로 시설도 괜찮다.
강연을 마치자 한 분이 질문을 하는데 어쩐지 낯이 익다. “민주노동당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심상정 의원은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서 FTA 얘기 많이 합니다” “그러지 말고 당원이 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웬지 집요해 보여서 말을 끊으려 농담을 한다. “그 뭐죠? **파가 없어지면 들어갈게요” (이 농담이 인터넷에서 ‘찻잔 속의 태풍’ 정도의 논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다)
복지관 문을 나서니 한 분이 다가 선다. “오늘도 모셔 드리겠습니다” 아... 그였다. “아니요. 오늘 근처에 약속이있어서요”
언제나 성실한 후배가 신림 4거리 쪽에 기다리고 있다. 옛 시장 쪽을 찾아 가니 다닥 다닥 붙어 있던 곱창집은 기업이 되어 있었다.
2.문성현 대표는 없었다. 100만명의 서명 용지가 담긴 상자로 쌓은 벽 앞에 앉을 자리가 마련돼 있는데 임자는 어디로 갔을까. 혹 병원에 실려 간 건 아닐까? 걱정을 하면서도 잠시라도 청와대가 보이는 자리가 싫은 나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에게 전화를 건다. “대표는 안 보이고 바로 옆에 있던 천막도 없어졌는데 무슨 일인지”, 연락을 해 달라며 경찰의 검문선을 넘어 간다.
잠깐 길가에 멍하니 서 있었더니 전화가 온다. 황사 때문에 천막으로 자리를 옮겼고. 천막은 선물 가게 뒤쪽을 살펴 보란다. 다시 검문선을 넘는데 경찰이 제지를 한다. “문성현 대표 만나러 갑니다” “당원이신가요?” 잠깐 머뭇거리던 나, “네”
문대표가 로터리에 나와 있다. 사진이나 찍으려고 일부러 나오셨단다. 천영세의원과 나란히 사진을 찍으며 “당원 되자마자 대표하고 사진 찍으니 벼락 출세했네요” “...?...” 잠깐 전의 단막극을 이야기하니 형편없이 말라버린, 검은 색의 얼굴로 문대표는 파안대소 한다.
또 협상 마감 시한이 연장될 수 있다는 얘길 어떻게 할까? 50 중반의 사내에게 24일의 단식은 이미 생명의 위험선을 넘나 들게 하고 있을 것이다. “힘들지 않아요. 아니, 힘은 좀 들지만 타결이 되든, 결렬이 되든, 거기까진 가야지” 그의 인생을 버텨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이 바로 이런 책임감에서 나온 것일까.
..쇠고기는 별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5월 국제수역사무국 발표를 빌미로 우리 정부가 뼈있는 쇠고기도 수입하려고 이미 마음 먹은 것 같으니까요. 단지 문서로 약속하느냐, 구두로 하느냐인데, 이면 합의를 한 전례가 적지 않으니, 그렇게 합의가 되겠지요.
.. 의회가 나서서 자동차 마지노선을 그었는데, 80가지 이상을 요구한 것 같습니다. 자동차 관련 우리나라 제도는 모두 바꾸라는 거지요. 그런다고 미국 차 수입이 늘어날 것 같지도 않은데 시장점유율과 관세인하를 연계시킨 겁니다. 우리가 관세를 포기할테니, 너희도 잡다한 요구를 접어라. 이 선에서 자동차 분야 협상은 접자... 애초에 서로 균형잡힌 요구를 했다면 똑같이 거둬 들이면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나가면 걔들도 할 말이 없을텐데, 우리 협상단한테 이런 배짱은 없겠지요?
주섬 주섬 상황을 설명하며, "따라서 협상 마감이 이틀 정도 또 연기될 수도 있다”고 예방주사 놓는 의사처럼 말한다.
“예? 분신이요? 민주노동당원, 허...세...욱이라구요?” 전화를 받는 대표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한강 성심병원으로 그가 떠났다. 허... 세... 욱... 어디서 들은 이름이더라.
인권연대 오창익국장이 천막으로 들어선다. 오늘 하이야트 호텔에서 나오다 잠깐 마주쳤는데 내가 이리로 간다고 하니 들른 모양이다.
“분신 장면 봤어?” “예. 경찰이 휴대용 소화기로 바로 꺼서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키는 작고 50대쯤 되어 보이던데...택시노련 소속이래요”
문성현 대표에게 말한다. “제가 제일 두려워 하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빨리 성명 내세요. 절대로 아무도 죽으면 안 된다고... 살아서 이 긴 싸움 을 끝까지 싸워내야 한다고...”
허세욱 동지. 꼭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겨야 합니다. 이 말도 안되는 싸움을... |
향린교회 나성국 목사님이 작성한 글입니다. 작년 가을쯤 평택 대추리의 촛불집회와 문화행사가 다 끝나고 밤늦게 이 분을 차로 데려다 드린 적이 있습니다.
밤 12시가 다돼서 다른 분들은 다 내리고, 봉천동이 댁이시라는 이 분을 집까지 태워다 드렸습니다. 택시운전을 하신다면서, 평택에서 서울까지 오는 내내 제게 말을 붙이시고, 이런저런 살아오신 얘기들을 하셨습니다. 그 분의 얘기를 들으며, 그렇게 순박하고 친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고달픈 도시노동자의 삶을 살며 사회에 대한 가파른 분노도 있을 법 했지만, 웃음짓는 얼굴 어디에도 그런 독함은 없었습니다. 그저 농촌에서 농사지으며, 허허롭게 마실다니며, 아이들과 놀아줄 우리네 민중들의 전형이셨습니다. 민주노총 택시연맹에서 활동하신다고, 평통사 회원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것 속에는, 자신의 삶이 혼자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의미와 자부심이 묻어났습니다. 봉천동 이 골짜기까지 태워다 줘서 너무 고맙다고, 다음에 택시 타실 일이 있으면 자기를 꼭 불러 달라고 몇 번을 얘기하시며 명함을 건네주셨습니다. 저는 그 명함을 명함카드철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택시 탈 때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마음로 만난 민중의 한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착한 분이 분신이라는 끔찍함으로 자신을 불살라 지금 한강성심병원에 누워있습니다. 평통사에서는 오늘 저녁8시 병원에서 그 분의 쾌유를 비는 촛불집회를 엽니다. 그리고 내일(목) 7시에는 생명선교연대회의와 인권센터에서 촛불기도회를 엽니다.
하느님께서 부디 허세욱 님의 생명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