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21] 평택 미군기지 인근에서 열린 민족민주노동열사 허세욱 동지 삼우제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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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전태일, 허세욱 열사여 - 민족민주노동열사 故 허세욱 동지 삼우제
2006-04-21, 평택시 팽성읍 황새울 일대 (평택 기지 근처)
4월 21일 오후 5시 대추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내리언덕,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미군기지확장반대평택대책위 회원들, 팽성 대추리 주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민주노동열사 고 허세욱 동지의 삼우제가 열렸다.
고 허세욱 동지가 생전에 그리 자주 찾고 아꼈던 땅인 황새울 벌판을 보여주고, 그의 혼을 달래기 위함이다.
저 멀리 보이는 대추리역사관의 한반도 조형물만이 그곳이 대추리임을 짐작하게 하고, 주민들은 '고향이 지척인데, 고향이 너무 그립다' '아직 마을을 다 부수지는 않았나봐, 4반의 파란 지붕이 보이네' 하며 안타까움을 토했다.
주민들을 대표하여 방승률 대추리 노인회장은 "허세욱님 이제야 평택 대추리, 도두리에 왔습니다. 허세욱님 그대는 이곳에 있습니다.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밝혔던 촛불속에 살아 숨쉬며 우리 곁에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허세욱님의 뜻을 마음에 새깁니다. 우리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돌아가야 할 그곳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잿더미로 변하고 전쟁기지로 변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중략)"라며 추도사를 하였다.
평통사 김종일 사무처장은 고인의 살아온 삶을 소개하였고, 평통사 김석민 회원은 '새야새야'와 '뱃노래'를 조가로 불렀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은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생명의 땅 평화의 땅을 지키는 일이 바로 자주 평화 통일의 길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한미 FTA 반대와도 같은 길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투쟁하는 것만이 바로 열사가 살아오는 방법이다"며 추모사를 하였다.
이어 시인이자 버스노동자인, 허세욱 동지와 같은 분회활동을 하던 서울평통사 김동순 회원이 자작시 "세욱이 형님께"를 낭독했다. (시 전문은 맨 아래에서 볼 수 있음)
참가자들은 서울평통사 서영석 대표가 든 영정과 피씨(플랭카드)를 차례대로 앞세우고 내리언덕을 내려와 대추리 마을 방향으로 행진했다. 열사도 살아 생전 많이도 지나갔을 그길 황새울 들녘 방향으로 말이다.
원래는 열사의 유지대로 대추리와 도두2리 지역에 열사의 유품을 태운 재를 뿌리려 했으나 국방부가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마을과 가장 가까운 내리 검문소에서 삼우제를 지내게 되었다.
내리 검문소 바로 옆은 추가로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또다시 추가로 확장되는 지역이었다. 야금야금 넓혀가는 철조망에 내리 주민들은 "내리도 포함된다는 소문이 많다"며 불안해 했고 대추리 주민들은 "그러게 우리 싸울적에 힘들적에 힘을 더 보태줬으면..." 하고 속상해 했다.
검문소 앞에서의 제사는 방승률 노인회장이 향을 피우고 술을 올렸다가 땅에 뿌리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피어 올라가는 향 연기는 하늘길을 열어 신을 모시고, 술을 땅에 뿌리는 것은 이로써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 혼을 달래는 의미다.
이어 미군기지확장반대평택대책위원회(이하 평택대책위) 이은우 상임대표가 허세욱 동지에게 바치는 제문을 낭독하고 태웠다. 그리고 서울평통사의 백차현 회원이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춤을 추었다.
허세욱 열사의 유서와 작업복을 태워 재를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하얀 국화꽃으로 헌화를 하였고, 묵념을 하며 고인의 넋을 위로하였다.
유품을 태운 재sms 검문소 근처의 철조망으로 가서 뿌려졌다. 하얀 국화꽃도 철조망에 꽂혔다. 마지막 순서는, 술과 떡 등의 제사음식을 음복하는 시간으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세욱이 형님 |
-고 허세욱 동지 영전에 부쳐 어둠 속으로 의정부행 막차는 떠났습니다.
영등포 역사에 핀 개나리 소리 없이 지는 밤 음지마다 산천으로 핀 선홍색 진달래도 핏빛을 지우며 떨어져 나갔습니다. 세욱이 형님 타는 갈증 해소하던 화요일 밤 종점 마포 집 부침개도 타들어 가고 승객이 없어 힘들었던 노동분회 오던 날 분을 삼키고 형님을 삼키던 막걸리는 아직 주전자에 남아있습니다. 촛불이 타들어 가고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는 동안 빈차 등을 켜고 가로수 사이로 헤매던 나 홀로 택시를 만났습니다. 폭발하는 고속엔진 뜨거운 심장 어디 한번 한강 모래톱에 쳐 박고 식혀보지 못한 실내 미등처럼 희미해져만 가던 형님 도심을 누비며 밤늦도록 내 달리던 택시는 어디에도 멈출 곳 없었습니다. 지하방 구석에 작은 옷장 하나 가재도구 몇 그리고 동그마니 걸려있는 속옷 두엇 세상을 향해 뚫려있는 작은 창 싸늘한 방바닥에 가지런히 남겨둔 또박 또박 써내려간 마지막 부탁의 편지를 차마 읽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하나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납금 폭력에, 조세 폭력에 반도 곳곳에 자리한 미국 놈 등쌀에도 이골이 나 견딜 만하다더니 홀로 폭력에는 눈물을 보이던 형님 자식 새끼하나 두지 않고 홀연히 떠난 형님 부디 해방세상에서 이만 2007.4. 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