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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1] [이시우작가의 편지] '사진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 1%의 영감으로 창작됩니다'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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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 1%의 영감으로 창작됩니다”
등의 맞은편에 가슴이 있습니다. 손등의 맞은편은 손바닥이라고 하지만 손가슴이라 부르는게 맞습니다. 발등의 맞은편은 발바닥이라고 하지만 발가슴이라 부르는게 맞겠습니다. 그래서 귓등의 맞은편은 귀가슴, 눈등의 맞은편을 눈가슴, 콧등의 맞은편을 코가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본다는 것은 세상의 의미 있는 것을 눈가슴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소리 중에 가치있는 소리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또한, 걷는다는 것은 대지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 본질에 있어 낯선 것인 세계와 내가 소통하는 방법은 그처럼 ‘끌어안음’을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그러나, 끌어안음은 한 사상가가 표현했듯이 ‘목숨을 건 비약’입니다. 내게 목숨같이 중요하던 관성을 성찰을 통해 뒤집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낯선 세계와 만날 수 있습니다. 낯선 세계에 대한 사람의 포옹속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낯선 세계와의 포옹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입니다. 낯선 세계일뿐인 ‘물’은 나와의 포옹을 통해 ‘물결’이 됩니다. ‘바람’은 ‘바람결’이 됩니다. ‘숨’은 ‘숨결’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는 ‘결’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결’은 금강저의 투철함과 천의무봉한 선녀옷의 한없는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습니다. ‘결’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끼새의 부리질과 밖에서 알을 깨주려는 어미새의 부리질이 정확하게 일치하여 새끼새가 세상에 태어나는 ‘즐탁동시’의 절묘함이기도 합니다.
‘결’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작업은 매체에 대한 숙련성만으로 달성되지 않습니다. 미야고프스키‘가 말하듯 ‘시어 하나가 창조되는 것은 수십톤의 흙을 걸러 1g의 라듐을 만드는’과정이며, ‘노신‘이 말하듯 ‘소가 취하는 것은 거친 풀이나 세상에 내 놓는 것은 젖’인 것처럼 감상자가 눈물을 흘리기 위해 창작자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결’은 창조되지 않습니다.
저의 창작관은 ‘90%의 학문과 9%의 실천과 1%의 영감’으로 사진은 창작 된다는 것입니다.
사진가는 혹은 예술가는 시대의 본질을 관통하는 주제를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대에 이룩된 학문적 성취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학적세계와 시대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일뿐 아직 예술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견해가 실천을 통해 확인되고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운동일 순 있어도 아직 예술일 순 없습니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는 것이 학문이라면 또 좋아하는 것이 가치를 실현하기위한 실천이라면 즐기는 것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며 체화입니다. 즐거움은 이론과 실천을 통해 이르고자하는 궁극이며 ‘결’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즐거움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술이 됩니다. 예술가가 학자의 모습으로, 운동가의 모습으로 비출 수 있는 것은 현실발전의 법칙과 예술발전의 법칙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러한 창작공정은 첫 번째 사진주제였던 ‘비무장지대’작업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작업은 ‘자본’으로 잡았으나 9.11사태로 2년동안 몰입했던 이 작업을 미루고 ‘미군’을 주제로 10년정도의 기간이 걸릴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문제에 있어 초심자에 불과한 제가 방대하고 전문적인 이 주제를 공부할 수 있도록 추동한 힘은 2003년을 기점으로 다시한번 핵문제가 우리 운명의 나침반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과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까지 우리민족의 최대 화두이자 근본문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핵무기 문제를 소 주제로 잡았습니다.
2003년에 도래할 위기는 1994년 북이 제네바합의가 기준이 되기에 북과 미국의 핵무기에 대한 검증이 가장 객관적인 위기해결의 전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학문적 성과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물론 방법조차 제게 제시해 주지 못했습니다. 제 스스로의 방법론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제가 우선 할 수 있는 것은 주한미군의 핵무기연구 일 수 밖에 없었고, 북의 핵무기 연구는 차후과제로 미루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책에서 길이 막히자 직접 미군기지를 답사해 보기로 하고 주한미군기지 전체를 거의 답사했습니다.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었지만 핵문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은 전혀 실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포기를 고민하던 시점에 다시 용기를 내기로 하고 주일미군기지까지 답사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주일미군기지를 답사했습니다. 많은 경험과 기반지식의 축적은 있었지만 이 작업역시 결정적인 단서를 주진 못했습니다. 학문은 발품만을 팔아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막막함속에 보내던중 일본인 사진가 ‘신도게이치’가 쓴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미군 탄약고의 표식을 통해 탄약고안에 있는 무기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용했을 ‘탄약표식’에 관한 원문을 찾기 위해 몇 달동안을 인터넷과 씨름한 결과 드디어 문서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의외로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개문서였습니다. 한편, 허탈하기도 했지만 감격스런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 화학무기 등도 이 방법에 의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을 알게되었습니다. 세상에 널려있는 지식도 내가 두드려야만 열린다는 평범한 진리의 확인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진해 핵잠수함에 대한 기사가 나가자 많은 반론이 댓글을 장식했습니다. 예의 그렇듯이 댓글은 일부 모독적인 경우가 있지만 그것을 걸러내고 그분들의 반론을 경청하고자 노력하다보니 댓글에 대한 답변과정에서 저는 원래기사에서 보다 더 정확한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미군에 대한 독자적인 방법론이 하나씩 찾아지게 되었습니다.
미군에 대한 공부는 비무장지대 사진작업의 경험과 만나면서 제게 새로운 화두를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유엔사 문제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저 역시 주한미군,연합사,유엔사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유엔사 문제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일본 사세보 미군기지에 게양되던 유엔사깃발을 보고나서 였습니다. 비무장지대 초소마다 걸려있던 유엔기가 일본기지에도 걸려있었던 이유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유엔사의 4가지 근본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유엔사의 이름을 걸면 북을 공격하기 위해 유엔안보리결의를 따로 얻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1950년 6월 유엔안보리참전결의가 있은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에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 북을 점령한다면 그 점령주체는 한국군이 아닌 유엔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결의에 의한 것이며, 보수적인 분들이 더 심각하게 제기해온 문제인데 북의 영토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헌법3조 영토조항이 부인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유엔사령관이 한국군,주한미군뿐 아니라 주일미군까지 작전통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세보를 비롯한 6개의 주요기지가 유엔사 후방기지로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엔사령관이 4성장군이고 주일미군사령관이 3성장군인 것은 이런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유엔사령관은 일본자위대까지 작전통제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951년 9월 일미안보조약 체결시 요시다 수상과 애치슨 국무장관 사이의 교환공문에 의해 ‘일본정부는 한국에서의 유엔군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시설과 역무를 제공한다’고 합의하였습니다. 시설제공이 앞서 말한 7개의 유엔사 후방기지이며 역무제공에는 자위대제공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유엔사는 과거 대인지뢰매설과 고엽제 살포시 작전통제권자로서의 책임이 있으며, 서해교전의 핵심주제인 북방한계선과, 경의선과 동해선지역 비무장지대의 남북관리구역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어 통일과 남북교류협력에서도 남측이 넘어서야할 관문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결심하여 추진하고 있는 연합사 해체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도 유엔사에 위기관리권을 양보하거나, 연합사 자신의 작통권을 유엔사에 재위임하면 모두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한강하구의 자유항행에서 유엔사가 관리권.허가권을 주장하고 나오는 것도 역시 유엔사 강화론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러나, 유엔사 문제는 보수진영과 일본의 평화애호세력까지, 연대를 넘어선 연합을 구성할 수 있는 의제이며 유엔차원의 국제적운동입니다. 유엔사는 평화문제와 통일문제가 겹치는 의제입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미군’으로 시작했던 저의 작업은 ‘유엔사’로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공안당국은 ‘유엔사 해체’가 북이 주장해온 선전선동에 동조하여 북을 이롭게 한다는 판단에 의해 저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였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단순논리에 저는 그저 황당할 뿐입니다. 1+1=2라는 공식은 남쪽의 학교에서도 북쪽의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1+1=2라고 말하는 것이 북에서 주장하는 것이기에 북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와 같은 것입니다. 1+1=2는 객관적 사실이며 그것은 북에도 이롭지만 남에도 이롭고 세계 모두에 이롭습니다.
‘유엔사 해체’는 이미 1975년 유엔총회에서 공산측과 자유진영측 모두의 찬성으로 통과된 객관적 사실입니다. 미국무부의 73년 회의기록에 이미 유엔사 해체가 미국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있었고 1975년 유엔총회연설에서 미 국무장관 ‘헨리키신저’가 결의안대로 76년 1월1일 유엔사를 해체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유엔사 해체는 당시 미국이 스스로에게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제가 직접 만난 주한미대사,부대사의 입을 통해서도 ‘한국정부가 결정할 일이다’라는 말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2.13 합의조치 이후 촉발될 평화협정 논의에서 한국정부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의제가 유엔사 문제임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한국정부가 설정할 수 있는 의제권한 1순위는 유엔사 문제입니다. 이미 ‘핵의제’를 통해 주도권을 잡은 북측정부에 버금가는 의제가 유엔사 문제이며 이는 우리가 원치 않아도 회담의제가 될 것은 자명합니다. 미리 국민여론을 환기하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유엔사 해체 문제를 의제로 선정하여 의제설정권을 행사해야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모두를 이롭게 할 의제를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공안당국은 구태의연한 냉전논리, 반북논리로 우리의 미래가 전진할 수 있는 길을 막아선 안 되겠습니다.
공안당국은 저의 창작과정의 일부인 저술뿐 아니라 사진작품에 대해서까지 군사기밀유출이란 혐의를 씌우고 있습니다. 성경의 잠언에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속엔 하나님은 없다’란 구절중 한 부분인 ‘하나님은 없다’만 떼어내면 정반대의 의미로 왜곡되는 것과 같이 저들은 예술작품을 칼질하여 혐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예술작품의 탄생은 빙산의 일각처럼 물위에 뜬 작은 조각으로 보이지만 물 아래에 거대한 빙산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창작과정에서 사진을 발표한 것은 두 종류입니다. 첫째는 예술적으로 완성됐다고 생각되는 작품과 둘째는, 국민의 생명과 행복을 취하기위한 알권리를 위해 발표된 가지들입니다.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수없이 많은 촬영과 노력의 소모가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각도,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빛의 상태, 구름,. 바람, 이 모든 것이 ‘즐탁동시’의 절묘함으로 일치하는 순간 한 장의 사진이 ‘결’로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준비된 필연과 행운에 가까운 우연의 통일체이기도 합니다. ‘결’로서의 작품에는 지식과 정보., 즐거움과 감동이 하나의 완성체로서 존재하기에 거기에서 기밀정보를 얻고자하는 이는 기밀정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로서의 사진은 기밀정보만을 캐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기밀 이상의 세계로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경찰이 가장 많이 인용한 사진중의 하나가 강화고려산 미군통신시설에 일본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진에 대해 기밀유출을 목적으로 한다는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저는 이 사진을 찍기까지 대상에 대해 수집가능한 모든 정보를 확보하고 그 연관과 실체를 연구했으며 정보전쟁의 수단으로서의 전자파와 또다른 파동으로서의 평화를 상징할 빛의 극적 대비를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헛걸음을 하고 기다리며 인내하던 끝에 즐탁동시의 순간을 만났고, 원하던 사진을 얻었습니다. 제가 이 사진에 적용한 개념은 ‘전파의 기교도 빛의 장엄만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소재로 평화를 말하고자하는 저의 역설적인 사진방법을 나름대로 구현하는데 성공한 것 같고 제가 보기에 흡족했습니다.
고려산 미군통신시설은 ‘국가기밀이기에 촬영해선 안 된다’가 아니라 그것은 ‘창작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으며 창작을 통해 기밀보호보다 더 큰 가치를 국가는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헌법의 취지에 맞습니다. 창작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관점도 문제지만 기밀의 테두리에 씌워 탄압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평화의 ‘결’은 전쟁을 외면하고 성립할 수 없으며 거실에 걸어놓고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습니다.
제가 공개한 두 번째 종류의 사진은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할 권리에 속하는 사진들입니다. 핵무기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고, 화학무기 역시 국민에게 치명적인 것이기에 정부가 기밀의 테두리에만 둘 일은 아닙니다. 열화우라늄탄은 우발적 사고에 의해 사람에게 피폭되었을 때 핵무기에 의한 내폭증상과 똑같은 질환을 일으키는 무기입니다. 설령 그것이 기밀일지라도 공개되어야 할 것인데 저의 발표는 합법적인 경로를 거쳐 획득된 자료들입니다. 이는 제게 취재를 허용한 당사자들이 더 잘 아는 문제일 것입니다.
기밀과 창작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얀’이란 세계적 사진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지구’란 사진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하늘에서 찍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전협정 상으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군사기밀 보호법 때문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사군정위 비서장인 ‘캐빈 매튼’ 대령은 그를 헬기에 태워 한국의 사진가들에겐 한번도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지역에 대한 고공촬영을 했고 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아마 그는 한국의 DMZ를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무장지대를 대상으로 10년 넘게 사진작업을 해온 저의 사진은 군사기밀보호법의 혐의가 씌워진 채 어쩌면 ‘모내기’그림으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당하셨던 ‘신학철화백’의 그림처럼 철창에 갇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 운명에 있습니다. FTA를 반대하는 예술가들에게 대통령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소수 공안세력들은 창작의 자유 대신 기밀의 족쇄를 채워 손발을 묶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깝습니다.
낯선 것을 온가슴으로 포옹하여 한시대의 ‘결’을 만들어내는 자로서의 예술가의 본성은 마치 잠수함에 독가스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넣어지는 토끼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낯선 것이 위기와 도전과 고난일 때도 있기에 시대의 위험을 감지하고 끌어안는 예술가의 혼으로 인해 한 시대는 위기를 예감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저의 사건이 이시대의 위기를 예고하는 사건이 아니길 바랍니다.
‘사람몸 중에 중심이 어디일까요?’라는 질문에 ‘데모크리토스‘는 ‘심장’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아픈 곳’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아픈 곳이 치유될 때까지는 온통 신경이 거기에 집중되는 때문입니다.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 사회의 중심도 아픈 곳입니다. 세계의 중심 또한 전쟁과 기아와 빈곤으로 인하여 ‘아픈 곳’ 입니다. ‘아픈 곳‘에 사회의 모순과 세계의 모순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하는 예술가에게 그것은 숙명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제가 머무르고 있는 장소가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결‘, 평화와 통일의 ’결‘을 만들어 가야하는 시대의 요구에 더 이상 국가보안법이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들께 번거로운 수고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며, 정성과 사랑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07. 5. 1.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이 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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