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15]노동열사 고 이병렬 민주시민장 엄숙히 치러져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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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열사 고 이병렬 민주시민장이 6월 14일 치러졌습니다. 서울대 병원 발인식을 마친 운구행렬은 종묘→광화문을 거쳐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박석운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시작된 영결식은 묵상,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공공노조 전북평등지부 이창석 지부장의 약력 및 경과보고의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병렬 열사 약력> 1967년 8월 10일 전북 정읍군 산외면 출생 1986년 칠보 종합고등학교 졸업 2006년 2월 민주노동당 가입 2006년 10월 전북택시일반노조 범국민운동본부, 해고자 투쟁 2007년 10월 전주방송 농성장 사수 2008년 서해안 기름피해 100일 행사 참여, 한미FTA반대운동, 한반도 운하 백지화운동 참여 2008년 2월 공공노조 전북평등지부 가입 2008년 5월 (주)창성상품 전주공장 입사 2008년 광우병 투쟁이 시작되자 ‘이명박 탄핵투쟁연대 범국민운동본부 전북지부’에 참여하고 촛불시위에서 홍보활동 2008년 5월 25일 오후 6시 전주 코아백화점 앞에서 미국산 쇠고기 반대, 이명박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뿌리고 분신 2008년 6월 9일 오전 12시 30분 운명 장례위원장을 대표하여 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가 조사를 낭독하였습니다. 정 대표는 “며칠만 더 참았어도 서울광장 광화문, 종로, 청계천, 서대문, 부산, 광주, 대구, 해남, 철원에서 촛불을 든 수많은 민중들의 물결과 꿈과 희망을 보았더라면, 너의 죽음을 포기했을 것인데”하면서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이어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 연대 회원들이 작성한 추모편지가 낭독되었습니다. 편지는 “거친 생존의 들판으로 내몰린 분노한 민심에 켜진 뜨거운 촛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는 가족과 일신의 행복보다는 대의를 위하여 한 몸을 아낌없이 바치신 이병렬 님의 높은 뜻을 기리며, 소리없이 들불처럼 파도처럼 아름답게 번지고 있다”고 고인을 기렸습니다. 편지는 이어 “동지를 잃은 슬픔에 가슴은 무너지지만 지금은 울지 않겠습니다. 새 날이 왔음을 웃는 얼굴로 님의 영전에 고하는 날까지 뜨거운 촛불로 살겠습니다.”라고 산 자들의 결의를 밝혔습니다. 중학교 3학년 황금령 양의 추모편지가 이어졌습니다. 황 양은 “저 먼 곳에서도 우리를 내려다 보며 마음으로 격려해 주고, 응원해 주세요.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이미 한마음이 되어 이병렬 님의 마음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고인과의 작별을 가슴 아파하면서 "여기 모인 우리들 끝까지 촛불을 들고 싸울겁니다."라고 다짐했습니다. 민중가수 박 준 씨가 애절한 마음으로 그날이 오면 등 2곡의 노래를 불러 영결식장을 숙연하게 했습니다. 시민 장을규 씨는 조시로 고인을 애도했습니다. 동지여 편히 쉬게 (전략) 동지여 자네를 죽인 저 반역자를 처단한 후에 자네에게 와서 통곡하며 울겠네 동지여 잘가게 독재와 부패와 궤변이 없는 그곳에서 동지가 그토록 맡고 싶어했던 흙냄새 따스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시 눈 좀 붇이고 있게나 내 시간 내어 자네가 느꼈던 온도 그 이상이야 가겠냐만은 동지가 묻힌 자리에 돋아난 새풀위에 내 가슴 속의 뜨거운 눈물 흘리러 가리니 동지여 편히 쉬게 긴 헌화 행렬이 이어졌고 프레지덴트호텔 앞에서 운구차가 떠날 때까지 참석자들은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고 고인의 뜻을 기리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특히 이 날 많은 청소년들이 참석하여 "고 이병렬 님. 편히 잠드세요. 우리가 해낼게요."라는 피켓을 들고 진심으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추모엽서를 써서 거는 의식도 진행되었습니다. 이 날 영결식에는 500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하여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을 떠난 운구행렬은 고인이 분신하신 전주 코아백화점 앞 노제(4시)를 지낸 후 광주 삼복서점 앞 노제(7시)를 거쳐 광주 망월동 묘역 하관식(9시)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녁 7시에는 전국동시다발로 ‘범국민 촛불 추모의 밤’이 진행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