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3. 30] [펌]주한미군의 기지 사용의 실태와 문제점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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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의 기지1) 사용의 실태와 문제점
노 정 희
1. 문제제기
해방 직후 점령군의 지위에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6.25동란시 유엔군의 일부로 참전하고, 휴전협정 체결의 와중인 1953. 10. 1. 작성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둔을 허여받고 미군은 이를 수락'하여 계속 주둔케 되었다. 주권국가에 외국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그에 따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마찰이 없을 수 없을 것이고, 우리는 가까이는 일본과 필리핀, 괌 등 아시아지역에서부터 멀리는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지역에서 외국군대의 주둔으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을 전해들어왔다. 주한미군의 경우에도 미군정시대를 논외로 하더라도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범죄와 사건 사고, 기지주변의 자연적·인문적 환경의 파괴, 면세특혜 등으로 인한 경제질서의 혼란 등을 야기시켜왔다. 거기에 점령군으로 시작된 주한미군의 과거 역사와 그후에도 지속된 예속적 정치구조, 그러한 가운데 터져나온 광주항쟁시의 미군의 역할 등으로 인하여 한국민들은 주한미군의 존재의의를 되뇌어보고 있다. 주한미군 기지 사용의 실태와 문제점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하여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행정협정2)의 전체적인 내용 및 형사재판권, 민사청구권, 한국인노무자의 처우 등 제반 문제점을 짚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제반 문제점들에 관하여는 기왕에 다루어진 바도 있고, 한편 1980년대 후반부터 용산 미군기지, 을지로 5가 미공병단, 부산 하야리아부대, 미군 제55보급창, 부산 미문화원 등 도심지역에 위치한 미군기지 및 미국사용시설에 대한 이전 및 사용료 문제가 떠오르고 거기에 주한미군 주둔비용 증액요구가 가중되면서 미군기지의 사용실태와 문제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주한미군의 시설과 구역에 관련된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전반적인 상황의 이해를 위해 대한민국 내 미군주둔의 역사와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의 변천사를 개략적으로 더듬어본 후, 한미주둔군지위협정 중에서 기지의 설정, 사용, 반환 등에 관련된 내용과 문제점을 조항별로 살펴보고 동 협정상의 문제점이 노정된 대표적인 사례들과 미군기지반환운동 등 이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을 1990년대 후반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변화하는 미군주둔의 의미에 맞추어 앞으로의 한미군사관계의 바람직한 방향을 함께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2. 미군주둔 및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역사
가. 일명 '대전협정' 및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만약 1945년 일본의 항복선언 전에 상해의 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한 통일전선정부가 되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또 그 승인을 얻어 해방 후의 조국에 그야말로 총선거를 관리할 수 있는 '임시정부'로서 귀국할 수 있었다면, 1945. 9. 7. 미군이 3·8선 이남에 점령군으로서 진주하는 역사는 기록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역사적 현실은 이와 달리 일본의 항복선언 직후인 1945. 9. 7. 미군은 3·8선 이남지역에서의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남한지역의 질서유지라는 명분으로 점령군의 자격에서 한국에 진주하였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군정 치하의 조국에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분단상황에서나마 남한에 독립정부가 들어서면서 1948. 8. 15. 대한민국과 미국 간에는 최초로 <대한민국 대통령과 주한미군 사령관 간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이 체결되었다가 1949. 6. 미군의 철수로 실효된 바 있다.
그 후 6.25 동란과 함께 참전한 주한미군의 지위를 위해 동란중인 1950. 7. 12. 대한민국 정부와 주한 미국대사 간에 교환서한 형식으로 <주한미군의 관할권에 관한 한미협정>(이른바 '대전협정')이 체결되고, 추가로 1952. 5. 24. <대한민국과 통합사령부 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이른바 '마이어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는 동란이 끝난 후에도 1967. 2. 9.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 발효되기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1953. 10. 1. 작성되고 1954. 11. 18. 발표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은 전문에서 "… 당사국 중 어느 일국이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가지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통의 결의를 공공연히 또한 정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또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조직이 발달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고 선언하고, 제4조에서 "상호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규정하여 미군 주둔의 근거를 마련하였다.3)
나.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의 체결 및 개정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태에서 체결된 위 대전협정은 새로운 협정 체결을 위한 한국측의 계속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종전후 1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미군범죄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한국민들 사이에 반미의식이 높아지는 한편 한국군의 월남파병과 한일협정 체결을 담보로 1966. 7. 9.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 체결되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은 전문과 31개조로 된 본협정, 17개조로 된 합의의사록, 8개조로 된 합의양해사항과 협정 제22조 및 합의의사록 제3항 (나)에 관한 교환서한 등 3개 부속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위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은 대전협정에 비하여 많은 부분 형평성을 회복하였고 본협정 자체는 외국군대의 법적 지위에 관한 대표적 조약인 1951년 NATO군 지위에 관한 런던협정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관련 3개 부속문서는 미군측에 지나치게 유리했고, 특히 형사관할권과 관련하여 한국의 재판관할권을 지나치게 양보한 규정, 민사청구권 절차의 미비, 미군에 고용되어있는 한국인 노무자들의 부당한 인권유린, 면세특혜로 인한 시장질서 교란 등이 한국민의 여론을 부단히 자극하였으며, 80년대 후반 광주민주화항쟁을 계기로 반미감정도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1988년 9월 3일 임신부를 폭행한 주한미군의 가족이 불기소처분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개정여론에 불이 붙었고, 이에 따라 한국정부가 1988년 12월 16일 정식으로 미군에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협정개정작업이 시작되었다. 그후 2년간의 협상 끝에 1991. 2. 1. 협정은 부분적으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위 개정문서는 본협정과 동협정의 합의의사록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합의양해사항과 교환서한을 폐기하는 각서교환과 이 2개의 부속문서를 대체하는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과 관련 합의의사록의 시행에 관한 양해사항>으로 합의된 것이다. 따라서 위 1991년의 협정개정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불평등성이 여전히 남게 된 데다가, 실제로도 1992. 10. 18. 윤금이씨 살해사건, 1994. 10. 미군 헌병대에 의한 한국인 세 모녀 감금 폭행사건, 1995. 5. 19. 서울 충무로 지하철 내에서의 미군들의 난동사건, 같은 해 5. 22. 의정부 미군클럽 여종업원 강간치상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나고 한국민들의 관심이 협정의 불평등조항에 쏠리자, 한국정부도 비난여론에 밀려 국방부장관과 한미합동위원회 한국측 위원장이 미군측에 유감을 표하는 서한을 보내고, 한미 양국은 1995. 11.부터 다시 협정개정을 추진키로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재개정 협상은 1996. 9. 10. 7차 협상 후 더이상 진행되지 못하다가 1997. 5. 22.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정책협의회에서 미국측이 한미행정협정 개정에 관하여 양국의 입장이 너무 차이난다면서 연기를 주장하고 결국 같은 달 27. 외무부에 올해엔 개정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통보하면서 그 이후 회담은 중단된 상태이다. 게다가 협상의 과정에서 재개정 협상의 내용도 형사재판권과 관련한 일부 문제에 불과하였고, 시설과 구역 등 공여지의 관리 및 반환문제와 관련된 협정의 불평등요소시정은 협상안에 전혀 언급조차 없었던 실정이다.
3. 미군기지에 관한 협정의 내용과 문제점
가. 주한미군의 병력수 및 미군기지의 현황
주한미군의 병력수는 1995년을 기준으로 육·해·공군을 합하여 약 36,000명이었다. 이들 주한미군에 공여된 시설과 구역의 면적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 발효된 직후인 1969년에는 4억 2,644만평이었다. 이 면적은 1970년과 1972년 2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감소된 바 있고, 그후에는 소폭의 상승과 소폭의 감소를 겪으면서 1996년말 통계로 볼때 미군기지는 전국 96개소에 총 면적 8,025만평에 달하고 있다. 이 면적은 서울시의 반이고 인천시의 1.5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중 전용지역4) 이 4,172만평, 지역권지역이 1,027만평, 임시지역이 2,826만평이고,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위 시설과 구역의 자산가치를 계산해보면 12조 6,300원이 된다고 한다.5) 또한 이 중 73% 가량이 민·공유지이다. 이와 같은 미군기지, 즉 미군의 시설과 구역의 설정·관리·반환 등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법적 근거는 주한미주둔군지위협정 제2조 내지 제5조이고, 관련규정으로는 위 협정 제12조, 제20조, 제24조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미군기지 사용의 실태와 문제점을 위 협정의 규정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나. 시설, 구역의 결정상의 문제점
본협정 제2조 1항 (가)에 의하여 개개의 시설과 구역에 대한 제협정은 합동위원회를 통하여 양국정부가 체결하도록 되어 있고 2항에서는 시설과 구역의 반환 여부에 대해서도 합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위 조항들은 외형상으로는 양국정부의 합의에 의해 시설과 구역이 결정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협정은 곧이어 시설과 구역의 결정에 관한 위 제2조 1항 (가)의 '합의'를 사문화시키는 규정을 하고 있다. 즉, 협정 제2조 1항 (나)는 "본 협정의 효력 발생시에 합중국 군대가 사용하고 있는 시설과 구역 및 합중국 군대가 이러한 시설과 구역을 재사용할 때에 합중국 군대가 이를 재사용한다는 유보권을 가진 채 대한민국에 반환한 시설과 구역은 전기 (가)항에 따라 양정부간에 합의된 시설과 구역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협정 체결 당시 미군기지의 개별적 필요성 여부를 검토하지 아니하고 일괄적으로 협정 발효 이전의 시설 및 구역의 사용권을 소급하여 인정하였다. 게다가 이에 부수적으로 주한미군이 재사용권을 유보한 채 대한민국에 반환하였던 시설과 구역도 이를 합의에 의하여 공여된 것으로 간주하는 규정을 두었다. 이에 따라 미군이 1945년 점령군으로 38선 이남에 진주한 이래 일본군 무장해제 과정에서 무상으로 접수했던 모든 시설과 구역,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극도로 불평등하게 체결된 대전협정 및 마이어협정에 의해 전시와 휴전 이후 1966년 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3년 동안 징발했던 모든 시설과 구역에 대한 사용권이 그대로 별도의 협의절차 없이 인정되고 만 것이었다.6)
이에 한미행정협정의 개정 논의시마다 한국의 여론은 위 협정 제2조 1항 (나)의 규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와 동시에 이미 설정된 미군기지 및 시설, 구역의 경우에도 꾸준히 각개 미군기지의 필요성, 그 적정규모에 관하여 합리적으로 재검토하여 기지규모를 축소시키고 불필요한 기지는 이를 반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위 협정의 규정은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며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인 사유재산권 보장의 원칙 및 재산권 제한에 있어서 법률주의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으로서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1997. 11. 26. 서울지방법원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제청을 하여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위 협정의 위헌성을 심리중이다.
한편 위 공여간주규정과 관련하여, 1991년 개정시 한미양국은 '대한민국은 재사용권 유보 하에 반환된 시설과 구역에 대해 유보된 재사용권 포기를 합동위원회 또는 시설구역 분과위원회를 통해서 합중국 군대에 요청할 수 있고, 합중국 군대는 그러한 시설과 구역이 가까운 장래에 재사용될 것으로 예견되지 않으면 이러한 제의를 호의적으로 고려한다'고 양해한 바 있으나, 여전히 유보된 재사용권을 포기할 것인지의 결정이 미국 일방에 전속되어 있어서 문제이다.
다. 시설과 구역의 반환절차상의 문제점
협정 제2조 3항은 시설과 구역의 반환에 관하여, "미국이 사용하는 시설과 구역은 본 협정의 목적을 위하여 필요가 없게 되는 때에는 언제든지 합동위원회를 통하여 합의되는 조건에 따라 대한민국에 반환되어야 하며, 합중국은 그와같이 반환한다는 견지에서 동 시설과 구역의 필요성을 계속 검토할 것에 동의한다."고 규정한다. 위 규정은 미국은 시설과 구역을 가급적 반환한다는 전제 하에 계속 검토하여 시설과 구역의 사용의 필요성을 견지하고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으나, 규정의 내용상 그러한 의무의 부과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며 사용의 필요성 여부, 즉 기지의 반환 여부를 사용국인 미국측의 결정에 일임하고 있음은 주권국가 국민의 법감정상 받아들이기 어렵고 실제로도 부천시 오정동 미44공병대의 사례7)에서와 같이 매우 중대한 문제를 발생케 하고 있다. 다만 1991년 개정시 양국은 "1. 시설구역 분과위원회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시설과 구역의 반환을 목적으로 매년 1회 이상 주둔군지위협정 2조하에 공여된 모든 시설과 구역을 검토한다. 2.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어느 때든지 합동위원회 또는 시설구역 분과위원회를 통하여 주한미군에게 특정한 시설과 구역의 반환을 요청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시설과 구역의 반환을 미국측의 선의에 의존하고 있어 타당치 않다. 참고로, 독일보충협정은 "군대 및 군속은 그들이 사용중인 시설의 수와 규모가 그들에게 소요되는 최소한도로 제한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설의 수요정도를 계속 검토한다. 그 이외에도 그들은 독일당국의 요청에 따라 특수한 경우에 개별적으로 그들의 소요량을 검토해야 한다. 사용기간에 관한 특수한 협정에 구애됨이 없이 필요성을 상실하였거나 또는 군대 및 군속의 수요를 충족할 다른 시설이 대치된 때에는 그 시설은 독일당국에 대해 사전통고를 행한 후에 지체없이 사용을 해제하여야 한다. 위 규정은 군대나 또는 군속이 시설 전체를 사용할 필요성을 상실한 결과 그 중 일부를 해제할 수 있게 된 때에도 이를 원용한다. 또 전항의 규정에 구애됨이 없이 독일당국이 공동방위임무를 고려하여 이러한 시설을 사용함에 있어서 독일의 이익이 우선한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특수시설의 사용을 해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반환의 원칙을 접수국의 입장에서 명백히 규율하고 있다. 또 미일협정도 "합동위원회를 통하여 합의되는 조건에 따라"라는 전제조건 없이 필요성 소멸시 무조건 반환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라. 시설과 구역의 관리상의 문제점
협정 제3조 1항은 "합중국은 시설과 구역 안에서 이러한 시설과 구역의 설정, 운영, 경호 및 관리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합중국 군대의 지원, 경호 및 관리를 위하여 동 시설과 구역에의 합중국 군대의 출입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합중국과 군대의 요청과 합동위원회를 통한 양 정부간의 협의에 따라 동 시설과 구역에 인접한 또는 그 주변의 토지, 영해 및 영공에 대하여, 관계법령의 범위 내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나아가 합의의사록 제3조에 따르면 비상시에 있어서 그들의 경호와 관리를 위하여 시설과 구역 근처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허용되어 있다. 미군의 기지사용은 미군주둔의 목적에 한정되어야 하므로 기지사용의 동의를 한 경우에도 일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관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위와 같이 협정은 시설과 구역의 보안조치와 관련하여 한국측의 의무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 기지관리를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특히 한국 내 미군의 무기보유에 관한 적절한 제재가 곤란하다는 점은 한반도내 핵무기의 보유문제와 관련하여 주한미군의 존재가 오히려 한국민 전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볼 때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은 1997. 8. 오끼나와 주둔 미군의 열화우라늄탄 오사사건이 표면화된 이후 오끼나와 미군기지에 배치되어 있던 열화우라늄탄을 전면 철거하여 한국과 아무런 협의 없이 한국에 이송한 사실이 있다.8) 주한미군이 보유하는 무기는 주둔목적의 정신에 따르는 수준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개입하여 적절히 통제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라. 시설 반환시의 원상회복 등의 문제점
협정 제4조는 "합중국 정부는 본협정의 종료시나 그 이전에 대한민국 정부에 시설과 구역을 반환할 때에 이들 시설과 구역이 합중국 군대에 제공되었던 당시의 상태로 동시설과 구역을 원상회복하여야 할 의무를 지지 아니하며, 또한 이러한 원상회복 대신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보상하여야 할 의무도 지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본협정의 종료시나 그 이전이 시설과 구역의 반환에 있어서 동시설과 구역에 가하여진 어떠한 개량에 대하여 또는 시설과 구역에 잔유한 건물 및 공작물에 대하여 합중국정부에 어떠한 보상도 행할 의무를 지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규정은 그와 같은 원상회복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보상을 산출, 계량하기가 복잡하며 또한 이를 둘러싸고 여러가지 분규가 발생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형평성의 원칙에 근거, 쌍방간에 상호 면제를 규정함으로써 이에 관한 해결을 용이하게 한 것9)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심각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주한미군 기지의 환경오염실태와 관련하여 위와 같은 무조건적인 원상회복의무의 면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사된 미군기지 및 기지 주변지역의 환경오염실태를 살펴보면, 1994년경 반환된 3개 미군기지(캠프 이즈벨, 경북 포항의 캠프 리비, 대전의 캠프 에임즈)의 토양은 일반 지역에 비하여 납은 최고 24배, 카드뮴은 최고 7배나 오염된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또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전국공동대책위원회 준비모임이 1996. 10. 중순부터 11. 초순까지 3주에 걸쳐 동두천, 의정부, 평택, 대구, 부산, 포항, 군산, 원주, 춘천, 인천 등 전국 10개 지역, 30여개의 미군기지 주변에 대한 수질오염, 토양오염 등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군기지로부터 흘러나오는 하천은 생활폐수의 무단방류, 농약의 무분별한 사용 등으로 오염이 심각하고, 유류와 쓰레기 매립으로 토양 또한 광범위한 오염상태를 보였다고 한다. 현재와 같은 방치상태가 지속된다면 추후 주한미군기지는 반환된다 하더라도 전혀 사용 불가능한 토지상태로 우리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지 내의 환경오염은 미군당국이 1차적인 관리권을 적절히 행사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된 것이고 미군의 관리소홀로 야기된 상당한 오염정화비용을 한국이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형평성에 반하므로, 적어도 기지 자체의 '중대한' 환경오염피해에 대해서는 미군이 원칙적으로 원상회복을 하도록 하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 보상하도록 하는 명시적인 규정을 신설해야 할 것10)이고, 현재 사용중인 미군기지의 경우 환경오염의 실태 등을 파악하기 위한 출입, 조사 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마. 시설과 구역의 경비 및 지나친 방위비 분담문제
한국은 최근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됨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위기의 원인 등을 진단함에 있어 '정부의 외환예산 중 70% 이상이 국방비와 관련되어 있고 남한 국방비의 4.7%가 주한미군 방위비이며 국방비의 28.3%를 차지하는 방위력개선비(96년도 기준) 속에는 주한미군 방위비가 포함되어 실질적인 장비 획득이나 연구개발비는 20%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막대한 군사비 지출이 사회 각 부분의 균등한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경제위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더불어 한미군사관계의 불합리성과 1995년 이후 달러로 지불된 연간 3억 달러가 넘는 주한미군 방위비분담 등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 및 경제난 해소의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으로 남북한 사이의 긴장완화와 군비축소를 주장11) 하기도 한다.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의 법적 근거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 제2조의 "미국은 상호방위조약 4조에 따라 한국안의 시설·구역의 사용을 공여받는다" 제5조 1항의 "2항에 규정된 바에 따라 대한민국이 부담하는 경비를 제외하고는 본협정의 유효기간 동안 대한민국에 부담을 과하지 아니하고 미군유지에 따르는 모든 경비는 미국이 부담한다" 같은 조 2항의 "한국은 미국에 부담을 과하지 아니하고...비행장 항만 등 각종 시설 구역을 제공하고 소유자에게 보상한다… 한국은 미국정부의 시설 및 구역의 사용을 보장하고 제3자의 청구권으로부터 해를 받지 아니하도록 한다"는 규정이다. 이는 한국은 미군에게 토지와 시설의 무상사용을 허락하되 미군의 유지에 따르는 경비는 미군이 부담토록 합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1. 2. 1. 한국은 미국과의 제1차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12)은 "1991. 1. 1.부터 1993. 12. 31.까지 3년간 위 주둔군 지위협정 제5조 2항에 규정된 경비에 추가하여 주한미군의 한국인 고용원의 경비일부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다른 경비의 일부도 부담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또 "대한민국은 매 회계연도마다 대한민국이 부담할 경비의 실제액수를 결정하여 이를 신속히 미합중국에 통고하도록" 규정하였으며, 당시 주한미군 현지발생비용 16.4%를 부담하고 있던 한국은 향후 5개 년간 위 비용의 3분의 1 수준까지 연차적으로 증액키로 합의하였다. 그후 한국의 방위비 부담 부분은 점차 확대되어 제2차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1994. 1. 1.∼1995. 12. 31.)은 주둔군지위협정 제5조 2항에 규정된 경비에 추가하여 한국은 "한국인 고용원의 고용을 위한 경비와 양 당사국이 합의하는 다른 경비의 공정한 부분"을 부담하기로 합의하였고, 제3차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1996. 1. 1.∼1998. 12. 31.)은 "주한미군의 한국인 고용원의 고용을 위한 경비와 주한미군 주둔에 관련된 다른 경비의 공정한 부분"을 한국이 부담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실제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액은 1991년 1억 5천만 달러에서 1995년 3억 달러, 1998년 3억 9,900만 달러로 늘어났다. 위와 같은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은 그 직접분담금의 규모만으로도 1998년의 경우 주한미군 주둔비용의 78%를 한국이 부담하는 것으로서 부당히 과다한 형편이다. 그런데 주둔국의 방위비 부담은 직접분담금뿐만 아니라, 한미행정협정에 따라 주한미군이 무상으로 사용중인 공여지에 대한 임차료(1993년 공여지 연간 임차료는 24억달러라고 한다)나 기지이전비, 카투사 등 인력 및 군수지원비, 각종 면세, 그리고 지역안정을 위한 대북 경수로비용부담 등 총체적인 안보비용을 망라하여 고려되어야 한다. 한국은 1996년을 기준으로 볼 때 위 직접분담비에 인력 및 군수, 부동산 지원 등의 간접분담비를 포함해보면 총 방위비 분담금은 무려 약 37억달러에 이른다. 이는 동맹국 중에서 일본에 이어 두번째의 규모이고, 또한 방위비 산정은 주둔국의 구체적 경제력을 감안하여야 할 것이고, 미국방성의 95년도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방위비율은 우방국 중 가장 높은 수준으로 GDP 대비 일본과 독일의 4배라고 한다. 한미안보협력관계의 안정적이고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해나간다는 측면에서 부담능력 내 방위비 분담의 계속은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방위비 분담의 규모를 정함에 있어서는 주한미군의 주둔목적과 역할의 변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구체적 경제력을 감안하여 적정규모로 감축되어야 할 것이다.
4. 미군기지로 인한 한국민의 피해와 미군기지반환운동 등
가. 미군기지 주변지역 주민들의 피해
미군기지 주변지역 주민들은 각종 미군범죄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미군기지 신설과 확장 등으로 토지와 가옥 등을 강제수용당하거나 이른바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사유재산권을 침해당하고 있다. 또한 미군들의 폭격훈련이나 미군기의 이착륙 등으로 인한 소음공해,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오는 오폐수와 폐유 등으로 인한 지하수와 하천의 오염으로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상의 여러 문제들로 인하여 적절한 보호와 손해배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예컨대, 동두천시의 국제케미칼은 피혁원단 가공공장을 짓기 위해 시의 건축허가를 받아 공장건설에 들어갔다. 그런데 70% 이상의 공정이 진행된 상태에서 국방부는 공장부지가 미군공여지임을 이유로 건물 철거지시를 내렸고 이에 국제케미칼측은 궁여지책으로 공장을 살리기 위해 언제라도 미군이 철거요청을 하면 철수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공장 건설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또 1998. 3. 7. 의왕시 백운산 정상 부근에 있는 미8군 메디슨 통신부대에서는 경유탱크를 연결하는 지하송유관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지난 30여년동안 무공해지역으로 보존되어 왔던 백운산과 왕림천 일대 계곡이 회복불능의 오염지역으로 변해버렸다. 환경전문가들은 사고지역의 토양층은 경유가 20∼80센티미터 두께로 광범위하게 깊게 배어 있어 앞으로 100년 이상이 경과해도 정상회복이 불가능한 최악의 산악환경사고라고 지적하였다.13)
또한 1998. 8.경 환경운동단체인 녹색연합과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가 서울 용산과 춘천, 대구 시내에 자리잡은 미군기지 주변의 헬기비행에 따른 소음실태조사를 한 바에 따르면 미군기지주변의 학교 학생과 주민들은 정상적인 수업이나 TV시청, 전화통화, 대화를 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이에 크게는 국가의 주권과 자주성의 회복을 위하여, 작게는 지역주민들의 재산권과 환경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지역에서 다양한 수단으로, 독자적으로 혹은 연대하면서 미군기지 반환운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아래의 사례 등은 어려운 여건 하에서 간고히 지속되고 있는 많은 노력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나. 용산미군기지 반환과 관련하여
용산은 한국의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즉, 용산은 서울의 동서남북의 흐름을 매개할 수 있는 공간적 중심부에 있다. 그런데 이 용산구 중 105만평이 미군기지로 제공되고 있고 이는 용산구 전체 면적의 15.9%이다. 미군기지는 용산구를 동서로 갈라놓아 지역의 발전상을 주체적으로 그릴 수 없게 하고 있고, 구체적으로는 1979년 착공하여 500억원이나 되는 엄청난 돈을 들인 동작대교가 미군기지를 관통하지 못함으로써 그 효용가치가 반감되었고 지하철 4호선도 불필요하게 구부러졌으며 서울 한복판임에도 기지 주변에서는 3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한다.
이러한 용산미군기지의 이전 혹은 반환은 서울시민들의 오래된 숙원이었고 드디어 1988년 정부가 6공화국 출범 직후 왜곡된 한미관계를 바로잡는다는 기치 아래 용산미군기지 및 미대사관 이전계획을 발표함으로써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90. 6. 25. 국방부장관과 한미연합사령관 간에 체결된 (용산기지)군사시설 이전에 관한 합의각서는 "(2) 기지 이전은 96년말까지 완료를 목표로 하되 앞으로 주한미군사령부의 규모 변화에 따라 일정 및 규모조정이 가능할 것이다. (4) 이전비용은 한국측이 부담하고 미국측은 토지 소요를 최소화하고 건물통합화 등을 추진해 비용 최소화에 적극 노력한다. (5) 용산 미8군 골프장은 현 남성대지역에 건설중인 대체 골프장을 미국측이 인수한 후 91년 3월 폐쇄하고 용산 골프장 내의 시설은 제거, 이전한 뒤 국방부측에 반환한다"고 하여, 기지 이전의 시기를 못박지 못하고 이전비용 전부를 한국측이 부담키로 함으로써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즉, 양국은 1991. 7. 기지이전계획에 대한 구체적 원칙 합의안을 발표하고 미국은 기지이전비용으로서 17억 달러를 산정하였다. 그런데 1991. 9. 미군은 기지 내 미대사관 용도의 8만평을 이전 대상에서 제외해달라고 주장하였고 이전비용도 약 95억달러를 주장하더니 1992. 4.에는 이전 계획기간을 2000년으로 연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1992. 11. 드디어 1959년 이래 미군 골프장으로 사용되어오던 일부 9만평을 돌려받아 용산가족공원을 조성하여 개장하고, 반환될 미군기지의 활용방안에 관하여 무성한 제안과 장미빛 계획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은 위와 같은 미군측의 부당한 요구로 인하여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고 이와 더불어 이전 예정지였던 평택 주민들의 반대운동도 거세 추진사업이 어렵게 된 상태에서,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으로부터 탈퇴한 것을 기화로 전면 보류되고 말았다. 위와 같은 용산미군기지 반환을 위한 과정은 기지 이전 협상시 이전시기의 확정 및 비용부담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며, 주민운동으로서의 기지반환요구가 기지이전운동이 아닌 기지되찾기운동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다.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전국공동대책위원회 등의 활동
1996년의 준비모임과정을 거쳐 1997. 8. 이후 미군기지반환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전국공동대책위원회는 지역운동단체인 군산, 대구, 의정부, 인천, 평택지역의 미군기지땅되찾기시민모임, 부문운동단체인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녹색연합 등이 참여하여 미군기지반환을 위한 국제연대활동등을 하고 있으며, <미군기지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 청원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위 대책위는 위 특별법안을 통하여 "미군기지의 신설, 확장을 금하되 만약 국가적 필요에 따라 미군기지를 신설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지주는 물론 기초자치단체와 합의토록 하고 토지는 임대기간, 임대료를 명시한 임대차계약방식으로 하"자고 주장하고, "미군기지와 공여지가 있는 기초자치단체나 지주는 미군이 군사용도로 활용하지 않고 있는 미군기지와 공여지의 즉각적인 반환을 요구할 수 있도록" 명시하며 미군기지 안 한국인 노동자 대책 수립, 기지 밖 업소에 대한 대책, 미군범죄 전담 검경제도, 미군범죄 피해자 구조기금 등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위 대책위의 소속단체 중 하나인 군산미군기지우리땅찾기시민모임 등 군산 내 시민단체들은 1997. 9.초 군산 미공군 당국의 민간 항공사에 대한 부당히 과다한 비용부담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1998. 3. 이착륙료의 단계적 인상과 인상률 대폭 감축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라.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 농민들의 투쟁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아왔다. 6.25동란중 피난을 떠났던 주민들은 그후 장좌리 일대가 군사보호구역으로 정해져 출입이 금지됨으로써 전쟁이 끝나고서도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고 다만 낮에만 출입증을 발급받아 출입영농을 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 1973∼4년경 한국 정부는 농민들과 아무런 사전협의 없이 농민들에게 '징발재산매수통지서'를 발행하였고 장좌리 일대 40만평의 땅을 당시 시가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가격으로, 그것도 일시 불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10년 상환 보증증권으로 매수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징발된 토지는 곧바로 미군에게 공여되었고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필사의 노력을 한 결과 80년대부터는 출입증을 발부받고 또 국방부에 임대료를 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후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땅을 찾겠다는 염원으로 장좌리 주민들은 징발된 토지를 환매해달라는 진정을 국방부에 제출했으나 결론은 미군의 공여지이므로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을 들었다.
이에 장좌리 주민들은 1997. 1. 20. 서울지방법원에 토지환매소송을 제기하였고 동 소송에서, 첫째 1973∼4년의 장좌리 일대 토지에 대한 징발은 징발재산정리에관한특별조치법상의 징발상황, 즉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가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부적법하고, 둘째 징발 당시의 적법성 여부를 따지지 않더라도 10년 이상 군사용지로 쓰고 있지 않다면 징발법에 따라 원소유자에게 환매하여야 할 것이라는 점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심법원은 군사상 필요가 소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고들패소판결을 선고하였으며 이에 원고들이 항소하여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이다.
마. 동두천 쇠목마을 주민들의 투쟁
쇠목마을은 동두천시에서 6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11세대 42명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마을로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최근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쇠목마을의 김병규(41세, 농업)씨는 1996년 자신의 소유지(쇠목리 86번지)에 주택을 짓기 위해 동두천시에 건축허가신청을 냈다가 자신의 소유지가 미군공여지임을 통보받았다. 게다가 1996. 3. 15. 미군당국은 아무런 사전협의나 동의 없이 쇠목마을에 탱크 8대를 배치하였다. 이에 따라 쇠목마을에 미군공여지문제가 제기되었고, 사격장 부지 확장으로 인하여 조상 대대로 살던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인 쇠목마을 주민들의 항의와 투쟁이 시작되었다. 지역주민들은 사격장 신설 저지를 위한 주민대책위를 구성하여 반대서명운동, 미2여단 정문 및 사격장 신설 현장에 반대 구호 현수막을 내걸고 경운기를 이용 철야농성, 미2사단 정문 앞에서의 항의시위 끝에 1996. 5. 4. 미군측으로부터 탱크를 철수하고 사격장을 만들지 않겠다는 공식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1996. 7. 10. 주민들은 동두천 쇠목마을 미군공여지 사용권부존재확인청구의 소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제기하였다. 원고측은 우선 위 사격장 부지가 행정협정 2조 1항 (나)에 의하여 공여지로 간주되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헌법은 재산권 보장 및 정당한 보상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대한민국 정부가 헌법과 징발법, 공공용지의취득및손실보상에관한특례법 등이 규정하는 사유와 절차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거친 후 공여대상 토지를 사용하지 않은 이상 대한민국 정부나 미군에게 사용권이 부여된다고 할 수 없다는 점, 만약 이와 달리 한미행정협정이 효력을 발생할 때 협정에 의하여 당연히 합중국 군대의 소유로 되거나 미군에게 사용권이 부여된다고 해석한다면 위 한미행정협정은 처분적 법률로서 공여대상인 시설과 구역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으면서도 보상기준이나 보상절차는 물론 시설과구역의 범위 및 한계, 그 소유자에 대한 통지절차 등과 같은 최소한의 기본요건들을 결여하고 있어 재산권 보장과 정당한 보상원칙을 규정한 헌법규정에 위배되며, 또한 한미행정협정은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임에도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아 절차상으로도 위헌의 소지가 있다14)고 주장하였다. 재판부는 1997. 11. 26. 원고측의 위헌제청신청을 받아들여 협정 제2조 1항 (나)의 위헌여부에 관하여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하였다. 현재 헌법재판소에 계류중이다.
5. 결어
미군기지의 설정, 관리, 반환과 방위비분담의 문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미행정협정의 여타 부분과 무관하게 따로이 떼어내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이는 주한미군의 역할과 한미군사관계 뿐만 아니라 한미간 정치, 경제적 역학관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냉전시대의 종식과 한반도 내 평화통일의 원칙이 확고해져가고, 이와 함께 주한미군의 역할이 한반도의 전쟁억지력이라는 측면에서 태평양 연안의 안전과 미국의 안전보장 유지의 측면에 보다 중점이 두어지는 현 시점에서 한국 내 미군기지의 존재이유와 규모는 철저히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도 1998. 11. 23. 네번째로 나온 미국 국방부의 동아시아 전략보고서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 10만 미군주둔 유지 입장을 재확인하고 김대중 대통령 또한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을 유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며, 한국의 사법부는 여전히 미군철수 주장을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고 있는 형편이다. 아마도 1998년 초 경북 왜관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반미시위대가 총을 쏘고 인질극을 벌이는 가상상황을 연출하면서 반미시위진압훈련까지 실시15) 하였던 일은 극히 일부의 예이지만 이와 같은 한반도 내 복합적인 상황을 시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미군기지 사용의 제반문제는 군축을 통한 한반도 내 평화의 정착과 자주국방이라는 대원칙 하에 꾸준한 국민운동과 연대를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주
1) 과거 외국 군대의 주둔시 사용하여오던 '기지'라는 용어가 주권 개념과의 충돌 가능성이 많다는 이유로 많은 주둔군지위협정상 보다 구체적이고 외연(外延)이 좁은 '시설과 구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양자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별되는 개념이나 본고에서는 경우에 따라 혼용하기로 한다.
2)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다. 통칭 한미행정협정 혹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나 한미SOFA라고도 하는데 위 협정은 미국측의 비준절차에 따르면 행정협정이나 한국 헌법상으로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은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행정협정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는 견해도 있다.
3) 뿐만 아니라 위 상호방위조약의 보충적 협정인 한미합의의사록은 한국측의 이행사항 제2에서 "국제연합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국제연합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 하에 둔다. 그러나 양국의 상호적 및 개별적 이익이 변경에 의하여 가장 잘 성취될 것이라고 협의 후 합의되는 경우에는 이를 변경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미군에 이양되게 된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고, 그후 75년 유엔에서 유엔군 사령부 해체결의가 채택되자 1978. 7. 28. 양국 합참의장에 의하여 '한미연합군 사령부 구성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1950년에 조인된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이 연합사령부 설치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는다"고 확인함으로써 1994.경 평시 작전권이 한국에 이양되기까지 위와 같은 현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현재도 여전히 보다 본질적인 전시 작전권은 한국에 이양되지 않고 있다).
4) 미군공여지, 즉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에게 기지, 시설, 군사훈련 등에 필요한 땅을 한국정부가 양도하 여 미군이 사용권을 가지고 있는 땅은 그 용도에 따라 전용공여지(미군기지나 훈련장 등 미군이 배타적으 로 사용권을 가지고 있는 땅), 지역공여지(사격훈련장 안전지대나 미군송유관, 수도관 등을 보호하기 위해 확보한 땅과 같이 원래의 토지사용용도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미군이 사용권을 행사하는 땅), 임시공여지(군사훈련 등을 위해 임시로 미군에게 사용권을 주는 땅)로 나뉜다.
5) 1997년도 국정감사 국방부 자료.
6) 법과 사회연구회, 『한미행정협정』, 도서출판 힘, 1988, 101쪽. 다만 별도의 공용제한이나 공용수용 등의 절차없이 위 협정의 규정만으로는 적법한 사용권이 설정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7) 부천시 오정동 미44공병대대는 54. 7.부터 38년간 주둔해오다 92.9.30. 파주군 봉일천 일대로 이전을 끝마쳤다. 그런데 미44공병대대가 사용하던 부지 13만평은 계속된 미군의 사용권 주장 때문에 부대가 이전한 지 2년이 넘도록 방치되어야 했다.
8) 『조선일보』, 1997. 8. 15.
9)이석우, 『한미행정협정연구』, 도서출판 민, 1995, 85쪽.
10) 최승환, 「주한 미군기지로부터의 환경오염 피해에 대한 법적 구제」, 『서울국제법연구』 4권 2호 별책, 114쪽.
11)이장희,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의 국제법적 근거와 그 적절성」, 『서울국제법연구』 제5권 2호, 2쪽
12) 동협정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간의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제5조에 대한 특별조치에 관한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 간의 협정>이다.
13) 『매일경제신문』, 1998. 5. 9.
14) 헌법 제60조 1항 "국회는 …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중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15) 『세계일보』, 1998. 1. 27.
참고자료
* 법과사회연구회, 『한미행정협정』, 도서출판 힘, 1988.
* 이석우, 『한미행정협정연구』, 도서출판 민, 1995.
* 서울국제법연구원, 『서울국제법연구』 제4권 2호, 제5권 2호, 서울대학교 출판부
* 육군본부, 『미국이 체결한 행정협정례』
* 외교안보연구원, 『주둔군지위협정과 한미관계의 바람직한 방향』세미나 자료집, 1995.
* 주한미군범죄근절을위한운동본부, 『한미행정협정의 문제점과 개정방향』-한미행정협정개정을 위한 공청회자료집, 1994.
* 〃, 『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안』-한미주둔군 지위협정 개정안 발표 공청회자료집, 1995.
* 〃 , 『한미행정협정 너, 오늘 임자 만났다』, 1996. 〃 , 『민족의 주인됨을 위하여 - 끝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 미군범죄』, 1997.
* 우리땅 용산미군기지 되찾기 대토론회 자료집, 『용산미군기지 진단과 민족적 활용방안에 대한 토론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