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이 있길 한가요. 아이들한테는 그저 산과 물, 공기 좋은 것 빼면 아무것도 없는 마을이에요. 그런데 그것마저 빼앗아 가겠다고 하니 이렇게 나설 수 밖에요.” 12일 오후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 공군 8231부대 앞. ‘미 폭격장 설치 반대 화형식 및 삭발대회’에 다훈(11), 도훈(7) 두 아들과 함께 참석한 박경애(36,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씨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경제기반 상실… 자식들에게 남겨줄 유산 ‘청정 자연’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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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필승사격장이 위치한 공군 8231부대 앞에서 '미군 폭격장 설치 반대 화형식 및 삭발대회'가 열렸다. ⓒ미디어다음 김진경 | 이날은 ‘필승 사격장’ 설치 반대 투쟁위원회(투쟁위)와 태백시 현안대책위원회 등의 주도로 사격장 설치 반대를 위한 주민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지난달 중순 언론보도를 통해 미군의 매향리 사격 훈련을 대체할 장소로 필승 사격장이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곳 주민들은 “왜 또 우리냐”며 격앙된 분위기였다. 영월군 초입부터 ‘폐광되어 한 번 죽고 폭격장으로 두 번 죽는다’는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주민들의 격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투쟁위 소속 일부 주민들은 필승 사격장이 위치한 공군8231 부대 앞에서 이미 열흘 째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흩날리던 빗줄기가 오후 들어 굵어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주민들은 결연한 분위기 속에 집회를 시작했다.
“국방부 공식 발표가 나온 뒤에는 발표를 뒤집을 수 있나요. 정부가 결정한 일을 뒤집기는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렵다는 것을 너무 잘 알지요. 우리 목소리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었다. “죽기를 각오하면 못해낼 것도 없다”는 주민들의 구호 속에는 궁지에 몰린 지역 주민들의 절박함이 묻어났다.
오후 3시경부터 상동읍과 태백시 주민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해 집회 시작 시점인 오후 5시경에는 이날 서울에서 지원온 녹색연합 회원 50여명 등을 포함해 모두 500여명이 참석했다. 풍물놀이로 시작된 이날 집회에서는 국방부와 주한미군을 형상화한 상징물이 불태워졌고 투쟁위의 황건국 회장 등 6명이 삭발시위를 벌였다. 매향리 폭격장 철폐 주민대책위원회의 전만규 위원장이 이곳 주민들과 연대해 투쟁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녹색연합 서재철 국장은 “필승 사격장의 폭격 훈련으로 이미 많은 야생동물과 새들이 태백산을 떠났으며 녹슨 탄피 때문에 환경오염이 우려된다”며 “매향리 주민들의 법정 투쟁 끝에 폐쇄가 결정된 미군 폭격장을 다시 태백산으로 옮기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지역 주민들과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집회는 경찰과 충돌 없이 마무리됐으나 집회 진행 도중 공군측 정보과 관계자가 현장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기자가 이 관계자에게 접근하자 그는 “공무원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뒤돌아섰다. 이날 참여한 상동읍 주민들은 대부분 60,70대 이상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주를 이뤘다. 지준화(53)씨는 “마을에서 내가 ‘새댁’으로 불릴 정도로 ‘늙은 마을’”이라며 “60~80대 노인 모두가 비오는 날 거리로 나온 것은 그만큼 우리 상황이 절박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동읍에 있던 광산들이 80년대를 거치며 하나 둘씩 폐쇄돼 이곳 주민들은 당장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경제 기반을 잃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81년 필승 사격장이 들어서면서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인 뒤로 상동읍은 태백산의 오지로 전락했다는 게 주민들의 푸념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고향을 떠나 어디로 가겠느냐”며 남은 노인들만 ‘청정 자연’을 유일한 재산으로 여기며 살아왔다는 것. 95년 폐광지역지원특별법으로 강원도의 개발 기반이 마련되자 상동읍 주민들도 외자 및 민자 유치로 레저시설 등이 들어서 지역이 발전될 것으로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부푼 기대도 오래가지 못했다. 상동읍 구례리에 사는 안성화(81) 할아버지는 “마을 자체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폭격기 소음이 진동하는 곳에 누가 여행을 오겠느냐”며 “그렇지 않아도 소음 피해를 입고 있는 이 지역에 매향리에서 벌어지던 폭격 훈련까지 더해진다면 이 지역은 정말 회생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국방부 공식발표 아직 없지만, 여러 가지 징후들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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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가 공식발표를 하지 않았지만 이곳 주민들은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미디어다음 김진경 | 국방부가 매향리 미공군 사격장을 내년 8월 완전 폐쇄하는 대신 강원도 태백산의 ‘필승사격장’을 미 공군 사격훈련장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진 것은 지난달 중순. 필승사격장은 한국과 미 공군이 81년 비용을 공동부담하고 공동사용하기로 합의한 뒤 태백산에 건설한 것으로 이 사격장에서는 지형적 특성을 이용한 사격 및 폭격 훈련이 이뤄지고 있다. 태백산 필승사격장은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태백시 혈동-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일대 1,800만평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국방부가 매향리 사격장을 필승사격장으로 옮기겠다고 공식 발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필승사격장을 대체 훈련장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국방부가 추진하고 있음을 이미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영월군 상동읍 번영회 고상운(55,자영업)부회장은 “정부의 공식발표가 있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징후들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며 “미 폭격기 A-10기 폭격 훈련이 가능하도록 활주로를 공군부대 안에 새로 만들었고, 함백산 입구에는 A-10기와 교신할 수 있는 레이저 시설이 완비됐다”고 주장했다.
태백시민연대 허신학 사무국장은 “매향리 군수 시설을 관리하던 록히드마틴사 직원 10명이 필승 사격장에 상주하는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적극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며 “직접적인 피해가 예상되는 상동읍 주민들과 함께 태백시, 정선군, 삼척시 4개 지역이 연대해 주민들의 생활 터전을 찾겠다”고 강조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상동읍 주민은 “공군부대 정보계에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주민들이 생업을 팽개치고 이렇게 천막농성과 시위를 하고 있는데 아무런 얘기가 없는 걸 보아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고 부회장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절대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백두대간의 중심인 태백산에 미군 폭격장을 만들면 천혜의 자연들이 황폐해지고 사격장 주변의 환경 오염도 가속화될 것”이라며 “이 같은 점들은 고려하지 않고 비용만 따지는 정부의 정책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최경집(65, 강원 삼척시 도계읍)씨도 “국가 안보를 이유로 지역 주민이 희생된다면 어쩌면 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백산의 환경재앙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며 “어떠한 이유를 붙여도 돈과 자연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했다.
“소음이요? 말도 마세요” … 계곡에는 떠내려온 폭탄 파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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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사격장을 거쳐 영월군 상동읍내를 흐르는 천평계곡에는 폭탄과 탄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미디어다음 김진경 | 실제로 지금 상태에서도 사격장 소음으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과 사격장 주변 환경 피해는 작지 않아 보였다.
“어떤 날은 전투기 굉음 소리가 오전 11시쯤부터 오후 3,4시까지 20여분 간격으로 계속 되요.” “소음이요. 말도 마세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전투기 A-10기 두 대가 1조로 출격 연습을 합니다. 출격할 때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로 소음이 들리죠. 전투기 굉음뿐만 아니라 시내 상공을 거쳐 공군 사격장으로 들어가는 헬기 소음도 상당합니다.” 이달 5일 태백산 환경답사에 나섰던 녹색연합 고지선 간사는 “유일사 등산 코스에서 올라가는 동안 10분 간격으로 A-10의 출격 소리가 들렸다”며 “전투기 소음 때문에 산행의 낭만을 즐길 기분이 나지 않았는데 이 마을에 계속 사는 분들의 피해가 어떨지 짐작이 된다”고 말했다.
쌀쌀한 날씨에 시위에 참석한 주민들에게 커피 등을 챙겨주고 있던 신성자(57,식당보조)씨는 “이곳에 시집온 지 30년 됐다. 좋은 공기와 계곡 속에서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매향리 폭격장을 대체하는 사격장을 이곳으로 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필승사격장을 거쳐 영월군 상동읍내를 흐르는 천평계곡에는 폭탄과 탄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비가 내리면 계곡을 따라 부대 안에서 훈련 때 사용했던 녹슨 탄피들이 심심찮게 떠내려 옵니다. 장마 뒤에 계곡 아래에 이 같은 탄피들이 수북하게 쌓이죠. 탄피가 녹슬면서 계곡 물에 녹물들이 스며들어 수질오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공군부대의 허락을 받아 공군부대를 출입했던 한 50대 아주머니는 “산나물을 뜯으러 부대 안에 가면 훈련 때 사용한 탄피들이 엄청 많았다”며 “공군부대 사람들이 ‘불발탄을 보면 위험하니 절대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 했다”고 전했다. 그는 “불이 난 자리에 잘 자라는 고사리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며 “폭격 때문에 산 곳곳에 산불이 많이 났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천병준(54,농업)씨는 “10여년 전 폭격 훈련으로 산불이 나 탄 나무를 벌목하러 필승 사격장 안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며 “무차별 훈련에 산 곳곳이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고 설명했다. 천씨는 “필승사격장이 위치한 산자락 곳곳에 탄피와 불발탄이 방치돼 환경오염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또 필승사격장의 계속된 폭격훈련 때문에 사격장 일대는 중금속으로 인한 수질오염, 토양오염의 우려가 심각하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었다. 서재철 국장은 “필승사격장이 매향리 대체 훈련장으로 선정돼 미 공군의 훈련이 증가하게 된다면 주민들의 소음 피해와 토양과 수질의 중금속 오염은 더욱 심각해 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애타는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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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지역지원특별법 제정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던 상동읍 주민들에게 매향리 폭격장 이전 검토소식은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사진은 상동읍 구례리 전경. ⓒ미디어다음 김진경 | 상동읍 일대에도 ‘좋은 시절’은 있었다. 70년대 대한중석을 중심으로 이 일대에 탄광 개발 붐이 일었을 때는 지역 경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서울의 유행이 3일만에 건너온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탄광이 폐쇄된 지금 상동읍 일대는 가난한 산골 마을일 뿐이었다. 상동읍에 등록된 주민 수는 1,500여명이지만 타지로 나가 있는 자녀들을 제외하면 실제 거주자는 그에 훨씬 못 미칠 것이라는 게 주민들의 얘기다. 그나마 남아 있는 주민의 47%가 60세 이상 고령층으로 이들은 모두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인 빈곤층으로 전락했다는 것.
실제로 공군부대 입구에서 자동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상동읍 일대는 ‘폐광촌’의 낙후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마을 곳곳에는 폐가가 즐비했고, 한때 광산 산업으로 영화를 누렸을 대한중석 사택도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었다. 한때 대한중석에 근무했던 천병준씨는 “하도 가난한 동네라 한 영화사에서 60년대 북한 배경의 영화촬영 장소로 정했다고 한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고,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 허무감이 짙게 배어 나왔다.
폐광지역지원특별법 제정으로 그나마 실낱 같은 희망을 가졌던 상동읍 주민들에게 매향리 폭격장 이전 검토소식은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삭발 투쟁에 나선 상동읍 상가번영회 임영규(44) 사무국장은 “매향리 폭격장의 이전 검토가 백지화되지 않는다면 제 2의 사북사태(81년 국내 최대 민영 광산이었던 동원탄좌 소속 노동자와 가족들이 일으킨 분규)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그 동안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 받은 주민들의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재철 국장은 “정부가 매향리 사격장을 폐쇄하기로 해놓고 이곳에 매향리를 대체하는 미군 사격장을 만든다는 것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며 “미군의 압력에 밀려 반발이 거세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이곳을 대체 사격장으로 추진하려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천혜의 절경을 가진 백두대간 한 가운데를 오염시키고 주민 피해를 가중하는 정부 계획은 철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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