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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6] [프레시안] '국방주식회사' 미국과 군사케인즈주의의 종언(2011/1/23)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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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복합체, 미국을 집어삼키다"

[해외시각] '국방주식회사' 미국과 군사케인즈주의의 종언
기사입력 2011-01-23 오후 12:58:13

지난 1월 17일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퇴임연설에서 미국의 '군산복합체' 부상을 경고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1년 1월 17일 연설에서 미국의 군부와 군수산업 세력의 상호의존적 결탁 체제를 말하는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 개념을 제시하며 미국이 항시적으로 전쟁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아이젠하워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전쟁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고 일자리를 만들자는 '군사 케인즈주의'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아이젠하워 시대보다 더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들의 힘은 '변화'를 이야기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의지마저 간단히 꺾어버렸다.

문제는 미국의 경제 현실이 이제는 '군사 케인즈주의'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어 있고, 미국은 심각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 시달리는 채무국이 됐다. 블랙워터로 대표되는 일부 군사 기업만이 배를 불리고 있지만 과거처럼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도 않고 있다. 전쟁을 통해 국부를 창출했던 과거의 미국이 아닌 것이다.

2차대전과 냉전 기간동안 미국은 군사케인즈주의를 통해 빵과 버터를 함께 가질 수 있었지만, 즉 군비확장과 경제번영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아이젠하워 연설 50주년을 맞아 앤드류 바세비치 미 보스턴대 교수가 격월간지 <아틀란틱>(the Atlantic) 1~2월호에 기고한 글은 이처럼 딱한 처지에 놓인 미국의 현실을 파헤친 역작이다.

'국방 주식회사의 폭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바세비치 교수는 아이젠하워 연설 후 냉전 30년, 탈냉전 20년을 보낸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붕괴시키고 있는지를 고발했다.

바세비치는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군인으로 재직하다가 퇴역한 후 국제관계학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의 군사 팽창 문제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탁월한 연구자다. 다음은 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원문 보기)

▲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은 1961년 1월 17일 퇴임연설에서 '군산복합체'의 부상을 경고했다.

'국방 주식회사'의 폭정(The Tyranny of Defense Inc.)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군산복합체' 부상을 경고했다. 뛰어난 군인이자 평균 이상의 업적을 낸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막는 방식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던 인물이다.

'군산복합체'는 1961년 1월 17일 전국에 방송된 아이젠하워의 퇴임연설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아이젠하워는 1953년 4월 16일 연설에서 이미 "철십자장(鐵十字章)에 매달린 인류"라는 말로 세계가 영구적으로 전쟁의 위기에 놓였음을 지적했다. 상호 보완적인 두 연설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도덕적으로 군사화되어가고 있는 미국에 대한 고찰이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스탈린 사망을 계기로 한 연설에서 냉전을 끝내기 위한 다섯 가지 계획을 소련의 새 지도자들에게 제시했다. 그 두 번째 항목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버렸는데, 핵심은 매우 간단했다. 무기와 군대에 돈을 쓰는 것은 근본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 비용이 필요한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그것은 희소한 자원을 남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과 전쟁 준비는 사회적 자산을 생산적인 목적에서 파괴적인 목적으로 돌림으로써 국력을 소진시킨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연설에서 말했다. "모든 총과 군함과 로켓은 결국 배고프고 춥고 헐벗은 사람들로부터 훔친 것이다." 무기를 사기 위해 자원을 쏟아 붓는 나라는 그냥 돈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노동자들의 땀과 과학자들의 재능, 아이들의 희망을 소비하는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장거리 전략 폭격기 하나를 사는 돈으로 30개 이상 도시에 학교를 하나씩 지을 수 있고, 전투기 한 대로는 50만 부셸(1750만 리터)의 밀을 살 수 있고, 구축함 한 대로는 8000명 이상이 살 수 있는 새 집을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냉전이 한창일 때 나온 아이젠하워의 말은 광야의 외침에 불과했다. 미국인들은 총과 버터 중 양자택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둘 다 원했다. 총을 생산함으로써 버터를 끝없이 공급할 수 있다는 군사 케인주주의가 풍미하던 시절이었다. 1950년 미국의 재무장에 관한 청사진을 담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고서 'NSC-68'의 작성자들은 국방 예산을 증가시킴으로써 국민총생산(GNP)을 늘릴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했다. 국방비 증액은 영구적인 경기 부양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이론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명백히 입증됐다. 왜 냉전 시대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가?

따라서 미국인들은 총과 버터는 한쪽을 취하면 한쪽을 버려야 하는 관계(trade-off)라는 아이젠하워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50년대 미국은 새로운 무기와 새로운 학교, 새로운 군함과 새로 조성된 주택단지들이 같이 들어서던 때였다. 아이젠하워와 그의 공화당은 이러한 윈윈 상황을 통해 신뢰를 챙기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아니더라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중산층의 번영 이면에 있는 중요한,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의 중산층들을 만족하게 했던 전후 경제의 활기는 미국의 권력 지형을 재조정하고 재정의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 과정에서 가장 덕을 많이 봤는데, 이른바 '안보국가'(national-security state)를 구성하는 정부 기관들이 특히 그러했다.

안보국가는 국가적인 위험의 존재에서 자신들의 행동 규범(raison d'Etat)을 찾는다.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군부 지도자들과 소위 안보 지식인들(defense intellectuals)은 미국이 세계의 도처에서 전례 없는 위험과 마주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걸 제압하려면 전쟁 대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고 즉각적인 행동에 나설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컬럼비아대 사회학 교수 라이트 밀스(C. Wright Mills)는 1956년 <파워엘리트>라는 책에서 이같은 시각을 '군사 형이상학'(military metaphysics)라고 부르며 "국제 현실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정의하는 심리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평화, 지속적인 평화는 바람직하지 않고, 평화란 전쟁 이전이나 전쟁과 전쟁 사이에 있는 일시적인 상태라고 여겼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의 핵무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것만큼 군사 형이상학을 잘 설명하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1952년 아이젠하워 취임 당시 1000여 개였던 미국의 핵탄두는 1961년 퇴임 때 2만4000개 이상으로 늘었고, 60년대 말에는 3만1000개가 됐다. 아이젠하워는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이러한 상황을 표면적으로 관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군 장성과 관리들, 군수업체, 의원 등 이해당사자들의 암묵적인 연합 세력에 의해 주도됐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의 공격을 억제하려면 공격시 대규모 핵 보복이 있을 것을 경고하는 '대량 보복' 개념을 미국 안보 독트린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이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안보상의 안정감을 줌으로써 군비 지출에 있어 자신의 통제력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오산이었다.

퇴임 전날 진실을 털어 놨던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 재임 기간 군수 소비는 미국 경제의 엔진이었다. 소련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총과 미사일, 폭격기, 군함, 탱크, 전투기가 필요했다. 미군의 즉각적인 대응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기지와 막사, 무기고, 훈련소를 지어야했다. 군 연구소는 자금을 조달받았다. 크고 작은 기업들이 군수 계약을 따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얻었다. 군수 산업을 지역구에 유치하는 정치인들은 지지 선언과 선거 자금과 표를 끌어 모았다. 1950년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은 낮았고 재정 적자는 미미했다. 결과적으로 미 국방부의 예산은 아이젠하워 시절 치솟아 정부 지출의 50% 이상, GDP의 10% 이상을 기록했다. 전쟁이 없는 시기로 보면 이례적이었다.

수혜자들에게 전쟁 준비는 하나의 선물이었다. 오늘의 군사 능력이 내일이면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더 크고 더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는 요구를 끝없이 만들어 냈다. 러시아의 군사 능력 향상은 군비 지출의 새로운 명분이 됐다. 예컨대 '미사일 갭'(핵탄두를 운반할 미사일 숫자에서 미국이 소련에 현격하게 뒤진다는 주장. 실제는 정반대였음.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50년대 당시 소련의 장거리 미사일은 10기가 채 안 됐다고 함: 역자)이라는 1950년대의 발명품은 공군력을 키워야 한다는 정치적 무기가 됐다. 의회의 관련 위원회들은 전문가들을 불러 증언을 들었고 언론은 이 새로운 문제점의 의미를 보도했다. 결국 예산이 들이 부어졌다. 미사일 갭은 허구였고 핵심을 벗어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과도한 군비 지출, 특혜, 여론 조작 등에서 아이젠하워의 승인을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폭탄과 미사일 능력에서 최첨단을 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협을 부풀리는 것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 상황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장막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침묵했다. 퇴임 전날이 되어서야 국민들에게 진실을 말했다.

1961년 퇴임 연설에서도 아이젠하워는 도둑질에 대해 말했다. 1953년 연설에서는 집이나 학교를 훔쳐왔다고 했지만, 이 연설에서는 그 도둑질이 민주주의 자체를 이탈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냉전이 국방에 대한 접근법을 바꿔놨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보습을 만드는 공장에서 필요에 따라 칼도 만들었지만" 소련과의 경쟁 상황에서는 병기만을 만드는 산업을 육성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은 국내 모든 기업의 순수익보다 더 많은 돈을 매년 군사 안보 분야에 쓰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군수 산업 집단의 "경제적·정치적·정신적" 영향력이 어마어마해서 "모든 도시, 모든 주 의회 의사당, 모든 연방 정부 부처에" 손을 뻗치고 있다고 말했다. 비록 그가 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명시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경고했다. 아이젠하워는 "우리의 땅과 자원, 살림살이가 모두 연관되어 있다"며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구조"라고 말했다. 기업가들이 국방부 요직 인사에 영향력을 미치고 전직 군 관리들이 군수 기업에 취직하면서 근본적인 가치가 위협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는 군산복합체에 의한 승인받지 않은 영향력을 방어해야 한다. 잘못된 권력이 부상할 가능성은 현재에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군산복합체의 압박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과정을 위험에 처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것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아이젠하워는 중요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민주주의에서 국방의 궁극적인 책임은 국민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이 엄격한 감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원들이 지역구를 생각하지 않고, 기업가들이 이윤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군 수뇌부들이 직업윤리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오직 깨어 있고 총명한 시민만이 군산복합체를 몰아내고 안보와 자유가 공존하는 평화로운 수단과 목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별 연설에 대한 반응은 미지근했다. 나라 전체가 후임 케네디 대통령에 열광하면서 성찰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다가오는 위험에 대해 시민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아이젠하워의 주장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의 고별사는 하룻밤의 이야기가 돼버렸다.

아이젠하워는 떠났지만 군사 형이상학은 온전히 살아남았고 다음 행정부에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케네디는 선거 운동 기간 국방비를 늘리고, 핵 능력을 향상시키고, 공산권과 더 열심히 싸우겠다고 약속했다(케네디 역시 미사일갭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결코 이를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트루만행정부 당시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민주당은 '중국을 공산주의자에 잃었고 이는 공산주의에 무르게 대응했기 때문'이라는 공화당의 집요한 비판을 받아왔으며 여기에 매카시즘까지 겹치면서 당시 미국에서 공산주의에 유약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곧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역자) .

군사 케인즈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아이젠하워가 백악관을 떠난 지 50년이 지났고, 많은 것이 변했다. 소련과 공산주의는 사라졌다. 그러나 위기의 분위기는 끝 모르게 만연해 있다.

안보국가는 규모와 범위와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키우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젠하워 시대 정보기관은 중앙정보국(CIA)이 다였지만 오늘날 전문가들은 '정보 커뮤니티'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쓴다. 17개 정보기관의 집합체를 말한다. 9.11 이후 이들의 크기와 직원은 급격히 늘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7월 "(정보기관들이) 너무 크고 거대하고 비밀스럽게 된 나머지 얼마나 많은 돈을 쓰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기관들이 중복된 일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 후 미 정부 당국자들은 정보기관들이 매년 800억 달러 이상을 쓴다고 밝혔다. 국무부 예산 490억 달러와 국토안보부 예산 430억 달러를 합한 것보다 사실상 더 많다.

정보 분야뿐만이 아니다. 미 국방부의 예산은 10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어 연간 7000억 달러가 됐다. 국가 안보라는 허울뿐인 명분을 가지고 연방정부의 재량 예산(매년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예산 외에 정부의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예산: 역자)의l 반 정도를 쓴다. 놀랍게도 미국의 연간 군비 지출은 나머지 모든 나라들의 군비를 전부 합한 것과 거의 맞먹는다.

아이젠하워 시대에는 소련과의 경쟁이 군비 확충의 명분을 줬다. 그러나 경쟁자가 없어진 오늘날에는 국방 예산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주장들이 동원된다. 중국처럼 미국의 우월적 지위를 위협하는 도전자들보다 국방비를 많이 써야 그들의 야심을 꺾을 수 있다는 게 하나의 명분이 된다.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나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이들이 가하는 그리 강하지 않은 위협을 실체적인 위협으로 바꿔 이단아들을 없앨 때까지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위협이 없어질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1950년대 미사일 갭을 말할 때 쓰던 위협 부풀리기는 미국 정부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 9.11 이후 당시 국방장관이던 럼즈펠드는 참모들에게 전달한 메모에서 "위협을 계속 고조시켜라"라고 썼다. 그는 "미국인들이 폭력적인 극단주의자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알게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미국인들을 두렵게 하라는 냉전 때의 방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것이다.


▲ 변화에 대한 군부의 강력한 저항을 받은 오바마 대통령은 스탠리 매크리스털 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오른쪽)의 미군 증파 전략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국방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뉴시스

또한 군인들의 세계와 무기상인들의 세계 사이를 도는 회전문은 계속 돌고 있다. 미군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에게 은퇴란 수입 감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옷을 벗으면 골프나 낚시를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과거 내 수업을 들었던 현직 군 당국자는 최근 나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미 육군협회의 연례 방위산업 전시회에 가 보니 "군산복합체의 소돔과 고모라"를 보는 것 같았다면서, 과거 자신의 상급자였다가 현재는 군수업체 임원이 된 수십명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했다.

군부와 기업의 결탁에 관한 아이젠하워의 연설은 오늘날의 현실에 비춰볼 때 오히려 약한 것이다. "기업 임원의 역할, 장군으로 가장한 정치꾼들의 역할, 정치꾼같이 행동하는 기업 임원들의 역할을 하는 장군들의 연합체"이라는 라이트 밀스의 표현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거기에는 전문가로 통하는 고위급 퇴역 관료, 시야가 좁은 정책 관료, 영웅적인 야전 사령관의 심부름을 하느라 경쟁하는 언론인들이 더해져야 한다. 과거 의원이었다가 군수업체를 위해 현직 의원에게 로비하는 사람들, 자신의 지역구에 돈을 끌어오기 위해 국방 예산에 무조건 찬성하는 의원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 결과 평화와 번영은 사라졌다. 미국의 군인들은 분쟁 지역을 헤매 다니고, 나라 전체는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왜 이렇게 잘못됐는가?

9.11 발발 후 조지 부시 행정부는 미국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몰아갔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군사력이 그 정도의 전투는 손쉽게 이길 거라는 경솔한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일들은 기대를 무너뜨렸다. 지난 10년을 통해 얻은 교훈은,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알아도 어떻게 끝내는지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무장이 잘 되어 있던 아이젠하워 시절 미국의 무기들은 총성을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실제 교전에 참가하는 게 일상이 되었고, 그것은 엄청난 돈이 드는 일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는 최소 1조 달러가 들었고, 어떤 이들은 종국적으로 2조 내지는 3조 달러가 들어갈 거라고 평가한다.

또한 군사 케인즈주의는 실패한 것으로 판명됐다. 1950년의 상황과는 반대로, 군비를 낭비하는 것은 나라의 부(富)를 늘리는 게 아니라 갉아먹고 있다. 아이젠하워 시절 미국은 채권국이었고, 석유에서 자동차·텔레비전까지 모든 생필품들을 국내에서 생산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수출보다 수입이 많고,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빚이 늘어가고 있다. 아울러 1950년대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평화 속에 보냈지만,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을 하며 보낸다. 그 결과 군대에 투입된 자원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간다.

다인코프(DynCorp), MPRI, 블랙워터(미국의 민간 군사기업: 역자) 등 돈방석에 앉은 기업들도 있다. MPRI는 "평방피트당 펜타곤보다 더 많은 수의 장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을 즐겨 한다. 그러나 그 장성들은 좋을지 몰라도 과거 중산층의 손주들은 실업률 9.8%에 시달리며 그처럼 엄청난 국방 지출로도 거의 덕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기 위해 파슈툰족 운전수를 고용하는 것이 어떤 긍정적 경제 효과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미국인 노동자들이 얻을 이익은 없다.

총과 버터는 한쪽을 취하면 한쪽을 버려야 하는 관계라는 아이젠하워의 1953년 예견은 이제 현실이 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미군 1명을 훈련시키고 무장하고 유지하는데 연 100만 달러가 든다. 한편 2010년 조사에 따르면 빈곤선 아래로 떨어진 미국인의 수는 7명 중 1명 꼴로 증가했다.

군-산-입법 복합체는 동맹 세력과 지원 세력에 힘입어 변화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재검토하면서 다양한 정책 대안들을 계속 요구했다. 그는 복수의 옵션을 원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에 따르면 국방부는 오바마에게 단 하나의 길을 보여줬다. 스탠리 매크리스털(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사령관)의 이른바 '미군 증파'(surge) 전략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뭐야? 당신들은 옵션을 하나밖에 안 가져 왔잖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바마가 선택한 것은 모두 군부가 선호하는 옵션이었다.

아이젠하워가 오바마를 본다면 대통령에게 표면적으로만 주어지는 권한을 행사해보려고 분투하는 그의 모습에 공감할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인들에 대한 놀라움과 실망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반세기 전 자신의 요구를 우리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서 군사 형이상학은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다. 우리는 분명 계속해서 주머니를 털리게 될 것이다.
/황준호 기자

"미국은 군산복합체가 지배하는 영구 전쟁국가"
[해외시각] 아이젠하워의 경고 이후 50년, 미국은 어떻게 변했나
기사입력 2011-01-20 오전 10:04:21

다음은 미국의 안보정책 전문가 가레스 포터가 1961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퇴임연설에서 군산복합체의 출현에 대해 경고한 지 50주년을 맞아 쓴, '군산복합체에서 영구 전쟁국가로(From Military-Industrial Complex to Permanent War State)'라는 글의 주요 내용(☞원문보기)이다.

포터는 이 글에서 아이젠하워가 경고한 군산복합체는 50년이 지난 현재 훨씬 더 강력하고 사악한 세력으로 변했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그는 이 집단은 이제 미국의 국방정책에 영향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국 자체를 '영구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국가'로 변질시켰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군사주의적 동맹체라고 난공불락은 아니라면서, 베트남 전쟁 때와 냉전 종식 무렵 군산복합체가 크게 흔들렸던 것처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재정적자와 부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여론도 전쟁에 대한 혐오를 보이는 지금, 이들을 규제할 법적 장치를 마련하기에 좋은 시기를 만났다고 강조했다.<편집자>

▲ 5세대 전투기로는 지구상에 유일하게 실전 배치된 미국의 F-22 스텔스 전투기.. 대당 가격이 2000억 원에 달하며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해 개발된 대표적인 군사무기로 불린다. ⓒ로이터=뉴시스
군산복합체에 맞선 아이젠하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61년 1월 17일 '군산복합체'에 대해 연설한 지 50년이 지난 현재 그 위협은 훨씬 더 강력하고 사악한 세력으로 변했다. 군산복합체는 미국을 '영구 전쟁국가'로 만들었다.

미 군사주의 세력은 지난 40년 동안 두 번 크게 흔들렸다. 대규모 전쟁을 혐오하는 여론, 대규모 군사비 지출에 대한 반대, 재정적자에 대한 심각한 우려, 외부위협에 대한 인식 변화 등 4가지 요인이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군산복합체에 타격을 준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라는 '영구 전쟁국가'는 위의 4가지 중 앞의 3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며 흔들리고 있다. 또한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라는 큰 맥락에서도 위험에 처해 있다.

아이젠하워는 고별연설에서 '잘못된 권력'의 출현에 대해 경고했다. 그것은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국가안보 정책을 장악할 위험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아이젠하워가 재임했을 때 이런 상황까지 가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그가 군산복합체에 맞섰기 때문이었다.

미 군부는 아이젠하원의 국방정책이 못마땅해 정치적 반대 운동을 벌였다. 육군은 아이젠하워에 대해 국방예산 삭감을 철회하고 재래식 군비를 증강할 것을 요구했다. 공군은 소련이 전략적 타격능력(처음에는 폭격기, 나중에는 탄도미사일)에서 미국을 급속히 따라잡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두번이나 정보를 조작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육군과 공군에 맞서 육군 병력을 1953년 수준과 비교해 44%나 줄이고, 폭격기나 미사일 개발을 위한 비상계획 지시를 거부했다. 또한 그는 인도차이나 전쟁, 중국에 대한 폭격,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 등을 요구한 군부의 건의를 거부했다.

아이젠하워가 퇴임한 이후 군사주의 기득권 동맹에는 군부와 군수산업뿐 아니라 펜타곤 관료, CIA 작전지휘관, 국무부의 고위관료, 백악관의 안보참모 등이 포함된 것이 명확해졌다.

케네디와 존슨 정부 시절 두 대통령들은 원치 않았으나 군사주의 동맹은 백악관을 움직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군산복합체에 타격을 준 베트남 전쟁과 냉전 종식

하지만 군사주의 동맹이 멈출 수 없는 세력처럼 보였던 1960년대말, 여론은 베트남 전쟁에 단호히 등을 돌렸고, 군비 지출 감축에 대한 여론의 장기적 압력이 시작됐다. 그 결과 군 병력은 아이젠하워 시절의 수준보다도 줄어들었다.

이후 10년 넘도록 군사주의 동맹은 보다 공격적인 군사적 정책을 옹호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당했다. 레이건 정부 때조차 일시적으로 군비 지출이 급증했으나 고르바초프의 등장에 따라 소련에 대한 대중의 공포가 사라졌고, 때마침 연방 재정적자 문제가 군사주의 동맹에 또다른 위협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냉전이 끝나가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군사적 기득권 세력은 힘과 자원의 상당부분을 상실할 처지에 몰렸다. 하지만 그들은 1990년 중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기회를 얻었다. CIA 국장 출신으로 군산복합체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지 H.W.부시(조지 W.부시의 아버지)는 '베트남 증후군'을 종식시킬 전쟁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1991년 걸프 전쟁에서 깔끔한 승리로 얻은 인기를 중동을 대상으로 군사력 사용을 넓힐 명분으로 삼았다.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은 향후 10년을 대비해 작성한 1992년 군사전략에서 "우리는 우리의 핵심 이익이 새롭게 위협받는다면, 사막의 방패와 사막의 폭풍 작전에서처럼 중동과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시 정부는 걸프 지역의 사우디 등 아랍 정권들에 압력을 넣어 미 공군 기지를 장기적으로 제공하도록 했고, 이후 8년에 걸쳐 미 공군은 이라크 대부분 지역 상공에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한 뒤 연간 8000회의 편대 출격을 했다. 미국은 아들 조지 W.부시 훨씬 이전부터 이라크와 사실상 전쟁 상태였던 것이다.

9.11 사태, 군산복합체에 전쟁국가 창조 기회 제공

9.11 사태는 군산복합체에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의 기회였다. 부시 정부는 공포분위기를 이용하여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감행했다. 9.11 이후 미 군부는 이라크를 교두보 삼아 (미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여러 나라의 정권 교체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알카에다 등 이슬람 과격세력의 충원과 활동을 이라크를 넘어 다른 나라들까지 확산되도록 촉진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군사력을 오용하는 결정을 바꾸는 대신 지하드 활동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더욱 밀어부쳤다. 그후 몇 년에 걸쳐 그들은 자원과 정책에 대한 유례없는 권력을 얻고 해외에도 세력을 확대했다.

-거의 완벽한 비밀 속에 활동하는 특수작전부대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 알카에다를 추적하고 살해하고 체포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CIA는 무인폭격기에 의한 타격을 비밀리에 수행할 사실상 제한없는 자유를 요구해 승인받았고, 의회로부터 사실상 감독을 받지도 않는다.

-펜타곤은 미군을 수십개의 나라에 배치하는 20년에 걸친 전략적 '장기전'의 개념을 수용하고, 육군은 예산 확대의 명분으로 '지속전의 시대'라는 개념을 채택했다.

-군지휘부는 아프간 전략의 토대 자체가 거짓으로 드러난 뒤에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무기한 전쟁을 보장하도록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움직임들은 '영구 전쟁국가'를 창조하는 과정을 완성했다. 이것은 전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을 상대로, 무기한 비밀 전쟁을 벌이는 권한을 확보한 제도화된 집단을 의미한다.

하지만 새로 형성된 '영구 전쟁국가'의 힘도 군산복합체를 두 번이나 위협했던 정치적 변동에서 자유롭지 않다. 대규모 전쟁에 대한 여론의 혐오, 군비지출 축소, 연방 재정적자와 부채 감축에 대한 요구 등이 그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지속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은 처음으로 60%에 도달했다. 연방 부채가 한계점에 도달한 위기로 인해 국방예산은 강도 높은 삭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 2005년 퓨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이 원하는 군비 지출 삭감 규모는 31%에 달했다. 1년전 퓨리서치의 또다른 조사에서는 경제위기에 좌절한 응답자의 76%가 미국이 국내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다룰 것을 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 놓친 게 있다면, '영구 전쟁국가'의 종식을 요구하는 풀뿌리 정치운동이다. 이런 운동은 대대적인 홍보와 로비로 미국의 민주제도를 위협하는 전쟁집단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장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은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잠재된 여론을 의식적인 정치개혁으로 전환시키기에 역사적으로 타당한 순간이다. /이승선 기자

"역사에 대한 무지가 미국을 전쟁국가로 만들었다"
[해외시각] 美 국방 예산이 '신성불가침' 된 네 가지 이유
기사입력 2011-02-06 오후 2:14:13

미국이 2001년 9.11 테러 이후 해마다 늘기만 했던 국방비를 올해 처음으로 감축하기로 했다. 앞으로 5년 간 780억 달러 수준을 삭감하고 병력도 5만 명 가량 줄이기로 했다. 미 국방부도 연방 정부의 재정 적자 해소 노력에 동참한다는 취지다.

미국의 군비 감축은 중국의 군비가 매년 늘어간다는 사실과 대비를 이룬다. 이를 두고 언론들은 중국의 경제력·군사력이 얼마나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군사전문가이자 국제정치학자인 앤드류 바세비치 보스턴대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오바마 행정부가 말하는 군비 감축은 군비 증가율을 줄이는 것일 뿐이며, 그를 둘러싼 논쟁은 미국의 엄청난 군비 지출 문제를 은폐시킨다고 주장한다. 부상하는 중국의 위협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그랬던 것처럼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바세비치 교수는 지난달 27일 미국의 정치·군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웹사이트 '톰 디스패치'에 기고한 글에서 이같이 말하며 미국의 국방비 지출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 있게 된 이유를 네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2차 대전 후 미국에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가 등장하면서 군비 지출을 통해 먹고 사는 조직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안보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군산복합체에 관한 바세비치 칼럼 번역 기사 바로가기) 둘째 이유는 미국의 특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미군을 해외에 주둔시켜야 한다는 전략적 목표 때문이다. 바세비치 교수는 미군 주둔의 효과가 불명확하고 중동에서는 오히려 반미주의만 키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낡은 전략 개념이 '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세 번째 이유는 애국주의 때문이다. 애국주의는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그 실체 자체에 의문이 생겼지만 여전히 활개를 치면서 펜타곤이 국고에서 마음껏 돈을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바세비치는 미국인들이 2차 대전을 '선의의 전쟁'으로 잘못 기억하는 것이 끝없는 군비 지출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세비치 교수는 이같은 네 가지 개별적인 요소가 상호 영향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바세비치는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퇴역한 후 국제관계학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의 군사 팽창 문제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학자다. 다음은 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원문 보기)


▲ 군 관련 조직들의 이기주의와 전략적 관성, 이념적 차이, 역사에 대한 잘못된 기억은 미국의 국방 예산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사진은 미 국방부 청사 펜타곤 전경.

미국의 군비 지출은 왜 신성불가침의 영역인가?
(Cow Most Sacred: Why Military Spending Remains Untouchable)

미 국방부의 예산 감축이 또 다시 논쟁거리가 됐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헷갈려서는 안 된다. 국방 예산 감축은 기껏해야 증가율을 줄이는 것일 뿐이다. 미국의 군비는 미국을 제외한 지구상 모든 나라의 군비를 합한 것보다 많다는 사실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지금 펜타곤(미 국방부)은 '경쟁 국가'가 있던 냉전 시기의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 오늘날에도 악의 제국(레이건 전 대통령이 소련을 칭하던 말 : 옮긴이)이 있나? 러시아의 낡은 항공모함을 가지려고 하는 중국의 미래에 겁을 먹고 있고, 급진적 이슬람주의자들의 헛소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악의 제국이 있다.

미국인들은 그 많은 군비를 통해 무엇을 얻고 있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토록 많은 군비를 쓰고 있지만 투자수익은 별로 없다. 9.11 이후 전쟁을 통해 얻은 중요한 교훈은, 군사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펜타곤이지만 의미있는 승리를 거둘 능력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전쟁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연장하는지를 알고 있지만,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 가장 좋은 사례는 이라크다.

작전도 문제지만 전략도 문제다. 미국의 군사력을 투사하면 미국의 영향력과 위상이 올라갈 것이라는 냉전 시대의 낡은 기대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이슬람권에서 그러하다. 미국의 군사 행동은 불안정과 반미주의를 만들고 있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전구(戰區)의 상황이 날로 악화되는 것은 또 하나의 좋은 사례다.

'주식회사 펜타곤'이 회사를 엉망으로 운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산처럼 많다. 고루하고, 비대하며, 변화가 느리고, 자원을 엄청나게 낭비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한다. 무기 조달 분야와, 군 기능을 민간 군사 기업에 아웃소싱하는 분야에서 특히 그러하다. 국가 안보에서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effectiveness)의 문제가 경제적 효율성(efficiency)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수준 이상이 되면 경제적 비효율성(inefficiency)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의 문제를 갉아먹게 된다. 펜타곤은 언제나 그 수준을 넘고 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자동차 제조사 '빅3'(포드, 지엠, 크라이슬러 : 옮긴이)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그 회사들은 펜타곤보다는 잘 운영된다.

높은 실업률, 1조 달러에 달하는 연방 정부의 재정 적자, 엄청난 부채, 교육·산업인프라·고용 부족 등 미국의 국내 문제는 점점 커지고 있지만, 국방 예산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왜 그런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방패막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 이기주의

2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평화를 가져온 게 아니라 국가안보가 영구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는 분위기를 낳았다.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요소가 상존한다는 관념은 1940년대 말 싹이 터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부는 진짜지만 일부는 꾸며진 그 두려움으로 인해 미국은 철저한 군사적 대비를 하게 됐다.

그에 따라 안보 국가(national security state)가 등장했다. 안보 위기감이 정부 기구의 존재 이유, 위상, 특권, 예산 배정을 정당화하는 국가 체제다. 무기 산업이 등장해 일자리와 이윤을 창출하는 주된 동력이 됐다. 공화·민주 양당의 정치인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말했던 '군산복합체'와 결탁하는 게 이익이라는 사실을 재빠르게 알게 됐다.

국민들이 낸 세금을 예산 배정과 기업의 이윤, 선거 자금, 득표로 변환시키는 거대한 체제와 더불어 정부 지원 연구소, 대학 연구소, 출판사, 싱크탱크, 로비회사 등이 등장했다. 이 기관들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요소를 만들어내고, 언제나 위기가 더 심해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 결과, 국가 안보를 위한 '논쟁'이 벌어지면 안보에 힘을 실어야 하다는 목소리가 대세를 장악해 군비 지출 수준을 매우 높게 유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이 나라의 안녕과는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것들이었다.

전략적 관성

미 국무부의 1948년 문서에 따르면, 외교관이었던 조지 케넌은 "미국은 세계 부의 50%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구는 6.3%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케넌은 이같은 불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대외관계를 만들어 내는 게 정책결정자들의 숙제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미국의 목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상시키고 세계 평화를 추구하며 글로벌 리더십을 행사해야 한다고 미화하는 것보다 훨씬 적나라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매우 특별한 위상을 갖게 됐다. 미국인들이 종전 직후의 시대를 중산층 번영의 황금기라고 기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케넌 시대 이후 정책결정자들은 미국의 지구적 특권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1950년대까지 정책결정자들은 군사력을 (세계 곳곳에) 배치하는 것이 미국의 높은 위상을 지키는 핵심 과제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해외 미군의 존재와, 그곳의 상황에 언제든 개입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곳을 안정시키고, 그곳의 시장과 자원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보장하며, 그 나라의 국력 향상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후 유럽과 전후 일본에서 그 공식은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한국, 베트남, 중남미, 중동 등지에서는 복합적인 결과가 나오거나 큰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9.11 이후의 상황 전개를 보면, '미군 주둔 - 군사력 투사' 패러다임이 폭력적인 반(反) 서구 성전주의(Jihadism)의 위협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반미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문제는 악화되고 있다.

'미군 주둔 - 군사력 투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과연 자기반성을 얼마나 많이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미국의 정치지도자들, 군부 최고위급 인사들, 정부 밖에서 여론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런 토론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군비 지출을 요하는 현재의 전략 패러다임은 무지와 오만, 상상력 빈곤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념·철학의 차이

티파티 운동(극보수 유권자 운동 : 옮긴이)의 부상은 이념·철학 등의 차이로 벌어진 대립(culture wars)에서 비롯된 미국 사회의 균열은 이미 치료됐다는 생각이 잘못됐음을 일깨워줬다. 1960년대에 시작해 베트남 전쟁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이념적 격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차 대전 때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애국주의에 대한 일치된 생각은 1960년대 들어 무너졌다. 소위 '선의의 전쟁'(Good War. 2차 대전을 의미함) 당시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복종을 의미했다. 나라 사랑은 개인들이 정부의 군 복무 명령권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보여주는 것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압도적인 다수의 미군 병사들은 징집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의 위협까지 감수하겠다는 애국주의를 몸으로 보여줬다. 2차 대전 당시 미군은 '우리의 군대'였고, 그것은 그 군대가 곧 '우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문제는 훨씬 복잡해졌다. 베트남전을 지지하는 이들은 2차 대전의 전통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 특히 징병 대상자들은 다른 주장을 했다. 그들은 나라(country)와 국가(state)는 다르다고 말했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는 국가의 정책이 잘못되고 불법적이며 부도덕하다면 그 정책에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고통스러웠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군인은 순교자인가, 비극적인 인물인가, 얼간이인가? 묵묵히 용감하게 싸운 군인과 입대 후 전쟁 반대로 돌아선 사람 중에서 과연 누가 존경을 받아야 하는가? 입대를 하지 않고 전쟁에 저항한 사람이 진정한 영웅인가?

베트남전이 끝났지만 이러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우리'가 아닌 군인들이 나라를 더 잘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1971년 닉슨 대통령이 징병제를 폐지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됐다. 조지 H.W. 부시(아버지), 밥 돌, 존 케리, 존 매케인 같은 전쟁 영웅들이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아들), 버락 오바마처럼 군 미필자이거나 군 경험이 일천한 이들에게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문제는 더욱 꼬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소말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미국의 피를 더 많이 뿌리는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다.(그들의 가족들은 참전하지 않았다)

단순한 의미를 가졌던 애국주의는 이제 이처럼 혼란스럽고 논쟁이 분분한 개념이 됐다. 애국주의는 국민들에게 어떤 의무를 요구할 수 있나? 이 질문에 답이 없다면, 미국인들이 점점 더 선호하는 선택지가 없다면, 그 애국주의라는 것이 과연 실체는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길 원하면서, 또한 애국주의는 전쟁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은폐되길 바라면서, 정치인들은 군복무를 택하는 미국인의 수를 늘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들의 논리는 이러하다. 군인들은 미국이 여전히 생명을 바쳐 지킬 가치가 있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며, 애국주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따라서 군인들은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이 나라 '최고의' 존재다.

군인들은 미국 사회의 소수만 지니고 있는 구식 가치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확신을 주고 있다. 오늘날 전사들의 위상은 아이콘 수준으로 높아졌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미국은 특별한 나라라는 피상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순결한 결정체로 간주된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군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뛰어 넘는 지상명령이 되었다. 군을 지지한다는 것은 곧 군을 욕해서는 안 되고 병사들이 불필요한 전쟁, 불필요하게 돈이 많이 드는 전쟁에 동원되고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실제로 '군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펜타곤이 국고에서 마음껏 돈을 빼다 쓸 수 있다는 뜻이고, 상징적인 수준 이상의 군비 감축은 안 된다는 뜻이다.

역사에 대한 잘못된 기억

미국 정치의 양당 체제는 (군사적) 개입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두 당은 모두 전쟁 정당이다. 개입을 주장하는 명분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공화당은 자유를 주장하고, 민주당은 인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결과는 같다. 두 당 모두 많은 군비가 끝없이 들어가는 군사적 행동주의를 매우 선호한다.

미국 정치에는 반(反)개입주의 전통이 있었다. 조지 워싱턴, 존 퀸시 애덤스 같은 이들이 선각자들이다. 그 전통은 평화주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에서 평화주의가 폭넓은 지지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한 현실주의적 전통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간단히 말해 2차 대전이 그 전통을 없애버렸다. 1939~41년(2차 대전 발발 직후 : 옮긴이) 있었던 치열한 논쟁에서 반개입주의는 패배했고 '고립주의'라는 오명을 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2차 대전은 엄청난 비극에서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동화로 바뀌었고, 개입을 반대한 이들은 나쁜 사람들이 됐다. 2003년의 이라크나 오늘날의 이란과 같이 말로만 위협이 되는 나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1941년 12월 7일에 있었던 일(일본의 진주만 공격 : 옮긴이)로 끝났던 논쟁의 재판이다. 꼭 전쟁을 해야 하느냐는 회의적 시각을 보이고, 군사력 사용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유화론자나 고립주의자가 된다. 권력을 잡고자 하는 이들 중에서 그런 낙인이 찍히는 걸 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정치는 1930년대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지금 그때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히틀러를 찾고 있고, 처칠을 칭송한다. 히틀러는 오직 한 사람 뿐이고 그는 오래 전에 죽었다. 처칠의 성취와 그가 남긴 유산은 그를 옹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히틀러의 독일을 괴멸시키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건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히틀러만큼 지독하고 무시무시한 독재자였다.

미국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미국이 2차 대전에서 소련과 동맹을 맺고 독일과 일본을 무너뜨린 것에 대한 정치적·도덕적 의미를 충분히 감안하며 2차 대전에 대한 보다 정밀한 시각을 갖게 될 때까지, '선의의 전쟁'(the Good War)이라는 신화는 '(군비가) 얼마면 충분한가?'에 대한 물음을 교묘히 피해나가는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할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네 가지 요소들은 군사 예산에 대한 철저한 감시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마치 펜타곤을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보안 철책 같다. 정책은 군사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위의 네 가지 요소는 엄청난 힘이 되고 있다. /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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