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국제민중법정 제2차토론회] 6/8 주제 1 한국원폭피해자의 입장에서 본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핵무기 투하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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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원폭피해자를 원고로 하여
미국의 핵무기 투하의 책임을 묻는 원폭국제민중법정 제2차 국제토론회
주제1 : 한국원폭피해자의 입장에서 본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핵무기 투하의 역사적 의미
- 2024년 6월 8일(토), 오전 9시, 일본 히로시마 국제회의장 코스모스홀 -
원폭국제민중법정 2차 토론회 주제1의 사회자 및 발표, 토론자들
최봉태 변호사의 사회로 주제1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습니다.
[발제자 발표]
주제1 발제를 맡은 오은정 강원대 교수
주제1 발표를 맡은 오은정 강원대 교수는 2016년 오바마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당시 연설을 소개하며, “핵무기를 투하한 주체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며, 오바마의 연설은 피폭자들의 죽음을 “동맹과 연합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으로 위치시키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지적했습니다. 오바마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무기 투하로 더 큰 전쟁의 희생을 막았다는 주장이 전제되어 원폭 투하의 반인륜적 범죄를 정당화하는 위선적인 입장임을 꼬집었습니다..
이어 오은정 교수는 피식민지인이면서 미국의 핵 투하로 피해를 입은 한국원폭피해자의 고통의 역사는 “20세기 글로벌 핵 레짐을 구성한 인종주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냉전체제하의 반공주의, 그리고 원자력 기술신화의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한국원폭피해자문제에 대한 기존 연구들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제로만 국한하여 다루어졌으며 미국의 관련성 속에서 검토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연구의 부재는 “원폭투하와 책임의 문제가 침묵되었던 구조가 학계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습니다. 오은정 교수의 발표문은 한국원폭피해자의 입장에서 미국의 핵투하 책임을 묻는 의미를 규명한다는 점에서 주최측의 취지를 정확히 반영한 글이었습니다.
오은정 교수는 먼저, 미국이 핵무기 투하 주체일 뿐만 아니라 피폭된 조선인들의 귀환 과정에 관여한 주체임을 밝혔습니다. 특히 GHQ (General Headquarters,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서둘러 조선인의 귀환정책을 실시한 것에 대해 발표문에서 “전후 조선인들의 (좌익계열)의 민주화 운동의 확산 우려가 커져 적극적으로 귀환정책이 추진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해방 직후 한반도의 경제적,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지면서 귀환자 수가 크게 감소하거나 이미 귀환한 이들 중 다시 일본으로 밀항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소개했습니다. 오은정 교수는 “원폭과 해방 후 고국으로의 귀환, 그리고 한국전쟁을 경험하게 된 약 8년여의 시기는 대부분의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삶 속에서 가장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한 맺힌 시기”였음을 짚었습니다.
오은정 교수의 발제를 경청하는 토론회 참가자들
이어 오은정 교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한국원폭피해자 운동과정을 살펴보며, “한국원폭피해자 협회 결성 초기에 원폭 투하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고, 보상을 요구한 점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원폭피해자들은 관련 호소문이나 집회를 열 경우 반드시 미 대사관에도 내용을 알려왔습니다. 그러나 오은정 교수는 원폭피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가 정치적으로 더욱 엄격하게 제한을 받으면서 “사실상 1970년대 초반 이후에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서 미국에 대한 책임 문제는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당시 한국 정부가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운동이 일본의 좌익 계열과 연결될 우려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일례로 1968년 협회 설립 이후 처음 개최되는 위령제에서 한국 외무부 동북아시아과가 지원계획을 발표했는데 지원 취지가 “중공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데 있음”을 보며, 오은정 교수는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책임요구가 한국, 일본, 미국으로 향하는 것은 자유진영의 핵무기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가 갖는 정치적 성격을 최소화하고 단지 그들의 신체적 고통만을 호소하고 구호하는데 한정짓도록 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안보위기와 반공담론이 지배한 냉전시기 한국의 정치 질서 하에서 한국원폭피해자들의 활동에 대한 정치적 제한은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책임 소재를 묻는 행위를 억압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오은정 교수는 “그러나 한국 원폭 피해자들은 초창기부터 원폭을 투하한 주체로서 미국에 대해 분명한 책임을 묻고 있었으며, 강대국 사이에서 희생된 자신들의 존재가 핵시대의 십자가임을 자각하고 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한 주체는 그것을 불가피한 희생으로 정당화하면서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이러한 정당화의 기제는 20세기 핵무기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패권 체제와 공고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꼬집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원폭피해자는 “냉전 체제와 핵의 지정학, 반공주의, 포스트 식민주의 관점을 복합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존재”라며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공명하고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오은정 교수는 이번 2차 국제토론회가 그러한 장이 되길 바란다며 발표를 마무리했습니다.
[토론자 발표]
주제 1 토론자로 나선 오동석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동석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원폭피해자들은 미국의 원폭투하에 대한 법적, 역사적, 정치적 책임을 물음으로써 ‘인종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냉전체제 하의 반공주의, 그리고 원자력 기술신화 문제’를 제기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며 한국원폭피해자의 삼중적 저항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오동석 교수는 “한국정부는 일본과 미국 정부에 대해서 한국원폭피해자의 배상을 위한 헌법적 책무를 이행하고 있지 않다. 일본정부는 한반도에 대한 불법 강점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정부는 원폭 투하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원폭피해자가 미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은 불법의 책임을 물어서 법적인 정의를 회복하는 일이다. 특히 한국원폭피해자는 피해자, 생존자의 위상을 넘어서 이제는 핵무기의 잔혹성과 불법성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며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저항과 투쟁이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이고 또한 미래를 향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동석 교수는 발표자에게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한 미국 주도의 한국 및 일본의 안보협력은 최근에 더욱 강화되는 추세다. 한국원폭피해자가, 한국, 미국, 일본 정부에 각각 어떤 정도를 요구하는 것이 현재적 시점에서 가장 적정한지, 이제까지 전혀 인정받지 못했던 상황에서의 최소한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발표자의 생각을 듣고 싶다.”고 제기했습니다.
[오동석 교수 토론문 전문 보기] (추가 예정)
주제1 토론을 맡은 오쿠보 겐이치 일본반핵법률가 협회 회장
오쿠보 겐이치 일본반핵법률가협회 회장은 한국, 미국, 일본 정부 모두 핵무기 투하주체에 대한 언급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핵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떨어뜨린 것이다. 엄연한 주체가 있다. 피폭국, 피폭자라는 말만 있다. 그 쌍이 되는 가폭국, 가폭자라는 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핵무기 폐절은 결코 끝없는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힘으로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핵무기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기에 없애려는 의사가 있다면 물리적 해체는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오쿠보 겐이치 변호사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원폭 투하로 전쟁이 조기에 끝났다’, ‘원폭투하로 식민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원폭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오류라고 생각한다."며 이를 믿고 있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문제는 대의가 있으면 핵무기 사용이 허용되는 가이다. 그렇지 않다. 핵무기는 무차별적이고 대량으로 사람을 살상하며 그 악영향은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다. 국제인도법은 전투의 방법과 수단이 무제한한 것이 아니며, 무차별적 살상이나 파괴를 초래하는 무기나 병사들에게 잔학한 죽음을 초래하는 무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며 어떠한 이유에서든 핵무기 투하는 허용되지 않는 불법행위며, 원폭국제민중법정의 시도가 미국에게 부정의와 위법성을 자각시키는 운동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쿠보 겐이치 변호사는 핵 없는 세계의 실현은 피폭자만의 과제가 아니며, 자기자신도 포함하는 전 인류적 과제라는 자각이 중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식민지 지배와 피폭이라는 이중의 피해를 입고 있는 한국인 피폭자는 과거청산과 핵 없는 세계라는 미래의 형성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과거 청산에는 가해자로서의 자각을 가지면서, 그리고 핵 없는 세계의 실현을 위해서는 같은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연대해나가겠다.”며 발표를 마무리했습니다.
토론자로 나선 요시자와 후미토시 니가타 국제정보대학 교수
요시자와 후미토시 니가타 국제정보대학 교수는 먼저 “현재 동아시아에서 유지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한일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하는 ‘1965년 체제’는 피폭자의 희생 위에 성립되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요시자와 교수는 발표자에게 “조선인 피폭자의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재일 조선인 피폭자도 포함되어 분석되어야 한다. 북한 피폭자 중 원폭수첩소지자는 단 한 명뿐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 및 1965년 체제로 칭해지는 한미일의 연계는 북한을 적대시 하면서 북한 피폭자를 방치하고 있다.”고 제기했습니다.
이어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원폭피해자가 알려지고 협회가 결성된 것이 1957년 일본에서 재정된 원폭의료법과는 관계가 없는지, 더불어 발표문에는 198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에 대한 언급이 없다. 미국에 대한 인식이나 책임 요구가 현재까지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지, 그리고 광주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이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 발표자의 생각을 듣고 싶다.”고 제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시자와 교수는 “일본에서도 미국에 대한 책임 추궁은 저조했다. 침묵이 마치 평화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발언하지 않고 운동하지 않는 것은 비평화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전쟁책임도 있고, 식민지배 책임도 있지만, 미국의 원폭피해를 보편적 입장에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발표를 마무리 했습니다.
[발표자/토론자 토론]
발제 내용에 대한 토론 및 질의에 대답하는 오은정 교수
이어서 발표자와 토론자 사이의 토론 및 질의응답이 진행되었습니다.
오은정 교수는 오동석 교수의 질문에 대해 미국은 원폭 투하의 주체임을 인정하고 그것이 가져온 희생을 외면하지 않아야 하며, 한국은 멀리 타국에서 힘들게 고생했다는 말로 원폭 피해자의 역사를 희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답변했습니다.
오은정 교수는 요시자와 교수의 제기에 대해 발표문에서는 해방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남한으로 귀환한 이들을 한국원폭피해자라고 썼다며, “북한으로 귀환한 원폭피해자, 미국의 전쟁포로 피폭자, 대만, 중국 등 또한 디아스포라 피폭자로서 원폭의 문제를 증언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1957년 일본의 원폭의료법 제정과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결성과의 관련성에 대해 “1959년 즈음에 합천 거주 원폭피해자들 사이에서 이미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증언이 있기에 충분히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어 1960년대 한국 신문에서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 한국원폭피해자에 대한 구호문제를 언급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면 미 정부의 외교문서에 한국원폭피해자 존재에 대한 인식 기록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오은정 교수는 “한국정부가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본의 좌파와 연결되거나 자유주의 진영의 핵을 비판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는데 이 시기는 미국이 동아시아 국가에서 공산주의 혹은 좌파진영의 운동이 반미주의로 흐를 것에 대한 우려가 굉장히 깊었던 시기였다.”며 이에 대한 미국 연구자들의 추가 연구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마지막으로 80년대 이후의 운동을 많이 다루지 않은 이유는 “미국과의 관련성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거의 없었다고 보았다. 다만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일제피해자운동이 전후보상운동으로 발전했고, 원폭피해자 운동도 그 시기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고 밝혔습니다.
[청중 질의와 답변]
청중들의 질의에 대한 답변과 토론으로 이어졌습니다.
발제자에게 질문하는 이기은 평통사 청년활동가
이기은 청년 활동가는 오은정 교수에게 “1980년대 이후 한국은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한미일 동맹을 축으로 핵동맹과 분단대결이 오늘날 더 강화되고 있다. 오히려 1970년대보다 더 암울한 조건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원폭 피해자들의 미국에 대한 운동 전개는 계속되어 왔다. 원폭 2세로서 미국의 원폭투하 책임을 추궁한 고 김형률 선생님의 호소, 2015년 NPT 재검토 회의에서의 심진태 선생님의 호소, 2023년 TPNW 회의에서의 이기열 선생님의 호소가 있었다. 특히 2019년에는 200여명의 한국원폭피해자들이 미국의 사죄를 요구하며 미 대사관 둘레행진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핵대결과 확장억제가 강화되는 정세 속에서도 발전되어 온 주체적 자각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제한적이지만 이러한 진전된 움직임들이 관련 연구들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를 물었습니다.
오은정 교수는 “오늘날 핵대결과 한미동맹이 훨씬 더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원폭피해자의 입장에서 핵에 대해 비판하는 활동이 굉장히 의미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며 관련 후속 연구들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어 이기은 청년 활동가는 오쿠보 변호사와 요시자와 교수에게 “지난 1차 토론회에서 발표한 이삼성 교수는 후속 연구에서 일본 민중의 반전 요구가 종전에 끼친 영향은 없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 교수의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고 해도, 일왕의 결단으로 전쟁이 끝났으니, 일왕의 전쟁 책임이 면책되고 전범인 일왕이 평화의 사도로 둔갑하는 역사적 왜곡이 계속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당시 일본 민중의 반전 및 일왕에 대한 저항 움직임에 대한 새로운 자료 발굴과 함께 전쟁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종전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를 찾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에 대한 일본 내의 움직임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오쿠보 변호사는 “일본의 반전운동이 종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천황에 반대하는 이들은 사형,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이었다. 그래서 천황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대부분 갇히고 말았고, 그런 가운데 일본의 평화세력은 궤멸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전쟁을 시작하고, 식민지 지배를 지속한 것은 틀림없이 천황이다. 그리고 천황은 패전의 원인을 원폭으로 이야기하는데 이는 지극히 비겁한 태도다. 원폭을 이유로 전쟁을 시작한 책임,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던 천황의 전쟁 책임은 절대로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했습니다. 요시자와 교수 또한 당시 일본 민중은 천황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보다 오히려 전쟁에 져서 죄송하다는 시각이 우세했기에 민중들의 반전요구가 종전에 끼친 영향은 없을 것 같다는 의견을 후속적으로 밝혔습니다.
토론회에 참여했던 일본 원폭피해자 사쿠마 쿠니히코씨가 발언했다
이태재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그 외 당일 현장에 참석한 일본 피폭자 1세 사쿠마 쿠니히코씨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회장 이태재 선생은 히로시마 평화자료관이 원폭의 일반적 내용만 있지 원폭 투하의 원인이 없고, 대를 이은 고통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