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히라오카 다카시 전 히로시마 시장 국제사법재판소(ICJ) 구두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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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오카 다카시 전 히로시마 시장 국제사법재판소(ICJ) 구두 진술
1991년부터 1999년까지 히로시마 시장을 지낸 히라오카 다카시(97)는 1995년 증인으로서 국제사법재판소 증언대에 섰다. 히로시마 시장 자격으로 ‘핵무기 위협 또는 사용의 적법성에 관한 권고적 의견’ 구두 진술에 참여한 것이다.
히라오카 다카시 전 시장은 지난 6월 8일, 히로시마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된 ‘원폭국제민중법정 제2차 국제토론회’에도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줄곧 미국의 원폭 투하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한국의 피폭자가 앞장서서 해주고 계신다. 제가 꼭 지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원폭은 절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정짓는 것이 곧 핵무기 폐기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이후 히라오카 다카시 전 시장은 원폭국제민중법정 국제조직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기자로 일하면서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문제를 처음 기사화하고, 시장 재임 시절 당시 히로시마 평화공원 밖에 있던 한국원폭희생자위령비를 공원 안으로 이전하는 등 한국원폭피해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2016년에는 합천에서 열린 한국원폭피해자 위령제에 참석해 추사를 했으며, 당시 추모사는 ‘평화누리통일누리’(157호)에 게재되었다. 이 글은 히라오카 다카시 전 시장의 ICJ 구두 진술 전체를 번역한 것이다. 일어, 영어본 파일을 첨부하였다.
존경하는 재판소장님과 재판관 여러분, 저는 히로시마 시장 히라오카 다카시입니다.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 실태에 대해 진술할 기회를 주신 재판부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기서, 핵무기 폐절을 염원하는 히로시마 시민을 대표하여, 특히 원폭으로 인해 비명횡사한 많은 희생자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방사선 장해로 고통받는 피폭자들을 대신하여 핵무기의 잔학성과 비인도성에 대해 증언하겠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기존의 전쟁 피해에 대한 개념을 뒤엎고 인류의 존립 기반을 뒤흔드는 심대한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정치인과 군인, 과학자가 협력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실제로 인간에게 투하함으로써 핵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핵의 거대한 파괴력에 의해 완전히 무고한 시민들이 불타고 방사선에 쏘여 노인도, 여성도 심지어 막 태어난 갓난아기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살인 행위는 본래 국제적으로 다뤄져야 할 사항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고, 이처럼 비참하고 잔혹한 대량학살 행위조차도 역사 속에서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50년 동안 세계는 이 끔찍한 행위가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정면으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방대한 핵무기의 공포 속에서 계속 살아야 합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위령비에는 ‘편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잘못이란 인류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원폭을 개발하고 사용한 것입니다.
저는 원폭 투하의 책임을 논하기 위해 이 법정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전쟁에서 우리나라에도 부끄러운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 일을 반성한 후에 히로시마의 피해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고 싶습니다.
원폭의 거대한 버섯구름 아래에서 불에 타 짓무르고 물물하면서 몸부림치며 죽어가던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또 자신의 아내와 자식이 핵전쟁의 희생자가 된 상황을 생각하며, 우리는 핵의 시대, 핵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1. 원폭의 순간적인 무차별 학살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도심 580m 상공에서 폭발했습니다.
이 원자폭탄에는 우라늄 235가 사용되었고, 폭발한 우라늄 1kg에서 발생한 에너지는 TNT 화약 15kt(킬로톤)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45년 당시 세계 최대 폭격기로 꼽혔던 B-29조차도 5t의 재래식 폭탄밖에 탑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히로시마는 순식간에 3,000대 이상의 B-29로부터 폭격을 받은 셈입니다. 강렬한 섬광과 폭풍이 시가지를 휩쓸고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면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고 사망자,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원폭 피해의 특징은 대량 파괴가 순간적으로 일시에 일어나 남녀노소 구분 없이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며, ①열선, ②충격파와 폭풍, ③방사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피해가 증폭되는 데 있습니다.
먼저 열선에 의한 피해인데, 원자폭탄의 폭발로 인해 폭발 지점은 섭씨 수백만 도의 온도가 되어 직경 약 280m의 화구가 생겼습니다. 거기서 발생한 열선으로 인해 폭심지 부근에 있던 사람은 순식간에 검게 타버렸습니다. 폭심지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서도 옷에 불이 붙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시내 여러 곳에서 동시에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 물건이 소실되고 초토화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충격파와 폭풍으로 인한 피해인데, 폭발 지점에서는 화구에 의해 수십만 기압의 초고압 상태가 발생하여 강한 충격파가 발생했습니다. 이 충격파는 직접적으로 진행된 파동과, 지면과 건물에 반사된 파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큰 피해를 줬습니다.
또한 충격파가 발생한 후 매우 강한 폭풍이 발생했습니다. 이 폭풍은 폭심지에서 초속 440m에 달했고, 많은 사람이 폭풍에 휩쓸려 날아갔습니다. 폭심지 반경 약 2km 이내의 목조 건물은 무너졌고, 그 이상 떨어진 곳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열선과 폭풍으로 인해 당시 히로시마시의 전체 76,327가구 중 약 70%가 전소·완파되고 나머지 건물도 반소·반파 등의 피해를 당해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파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방사선에 의한 피해는 폭발 직후의 초기 방사선, 즉 감마선과 중성자선이 강하게 쏟아져 폭심지 반경 약 1킬로미터 이내에서 4Gy(그레이) 이상의 전신조사를 받은 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방사선에 의한 후유증이 나타나서 그 후 사망하거나 지금도 병마와 싸우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직접 피폭당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피폭자 구호 등으로 폭심지와 가까운 곳에 갔던 사람 등에게는 잔류 방사선이 장해를 일으켰습니다.
당일 히로시마시에는 약 35만 명이 있었습니다. 사망자 수에 대해 히로시마시는 1945년 12월 말까지 약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피폭으로 인해 일가족이 전멸하는 가정이 많이 발생해 지역사회가 붕괴된 데다 당시 기록이 소실되고 피폭 후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망자 중에는 당시 히로시마에 있던 많은 한국인과 조선인 외에도 중국인과 아시아 지역 유학생, 그리고 소수이지만 미군 포로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원폭이 가져온 인간적 비참함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원폭이 가져온, 재래식 무기와는 다른, 인간적 비참함입니다.
원폭이 인체에 미친 장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열선과 고열 화재에 의한 화상, 폭풍으로 인한 부상, 방사선으로 인한 장해의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 장해를 총칭하여 ‘원폭증’이라고 합니다. 원폭증은 크게 급성장애와 후유장애로 나뉘며, 방사선의 영향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50년이 지난 현재에도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의학적으로는 방사선에 의해 인체의 세포가 파괴되는 것이 장해의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량의 방사선을 쏘인 것은 인류가 처음 겪은 경험이고,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데이터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피폭 후의 의료 활동은 완전히 주먹구구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이 무너지고, 의료진 대부분이 죽거나 다치고, 약품이나 장비가 없어 수많은 피해자가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잇따라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화상이나 외상이 경미하더라도 구조하러 뛰어다니던 사람들이 며칠에서 몇 주 후에 발열, 설사, 구토, 전신권태감 등의 증상을 호소하며 어이없이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원폭의 급성 증상이었습니다.
급성 장해는 피폭 후 4개월 사이에 나타난 장애로, 화상이나 외상에 의한 증상 외에 초기 방사선에 의한 특징적인 증상으로 폭심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피폭자에게서 세포와 조혈기의 파괴와 장기 손상, 면역 기능 저하, 탈모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급성 장해는 4개월 정도 지나면 완화되었지만, 피폭 후 5~6년이 지나면 백혈병 환자가 급증하는 등 후유증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후유장해의 특징적인 것은 화상이 치유된 자국이 융기된 이른바 켈로이드 외에 백내장, 백혈병, 갑상선암, 유방암, 폐암 등을 중심으로 한 각종 암, 태내 피폭자에게 발생한 지적장애, 발육부진을 동반한 소두증 등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2살 때 피폭된 사사키 사다코 씨는 건강하게 자라는 듯 보였지만, 10년 후인 1955년, 방사선에 의한 백혈병 진단을 받고 입원했습니다.
일본에서 학은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사다코 씨는 종이학을 천 마리 접으면 병이 낫는다고 믿고 침대 위에서 매일 먹는 약 포장지로 계속 종이학을 접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이 허망하게도 8개월의 투병 생활 끝에 사망했습니다.
이 사실은 피폭 후 몇 년이 지난 후에 장애가 나타나는 방사선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사다코 씨의 죽음과 종이학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전 세계 어린이들의 모금을 통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종이학을 높이 든 소녀상이 세워졌습니다. 그 좌대는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종이학으로 항상 가득 차 있습니다. 방사능 후유증으로 인한 소녀의 죽음으로 학은 핵무기 폐절과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또한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어머니의 태내에서 방사선을 쐬고 태어난 아이 중에는 정신지체와 신체적 결함을 동반한 소두증으로 대표되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이제 정상인이 될 수 있는 길도 없고, 의학적으로도 치료할 방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무 죄도 없던 당시 태아들의 일생에 원폭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이미 늙었거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 부모는 “보통 자녀들도 50세가 되면 나이든 부모를 휴양지로 데려가곤 합니다. 하지만 제 경우에는 부모가 아무리 늙어도 항상 50세에 가까운 우리 아이의 손을 잡고 데리고 다녀야 합니다.”라며 원폭이 낳은 부모와 자식 일가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폭 방사선이 태아에게 미친, 인간 파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향이야말로 핵무기 아래에서의 인류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시내에서 직접 피폭되거나 구호활동을 위해 시내에 들어가 잔류 방사선을 쐰 원폭 피폭자는 현재 일본 국내에 약 33만 명이 있으며, 50년이 지난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피폭자가 발암 연령에 도달하면 일반인보다 암에 걸리기 쉽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또한 현재 백혈병 외에도 유방암, 갑상선암, 위암, 폐암 등에 원폭의 영향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체내에 흡수된 방사선이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모두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원폭은 물적·인적 피해를 줬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사회생활 자체를 파괴하여 생활고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가족, 친족관계의 단절로 원폭 고아, 원폭 고로(孤老)라고 불리는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젊은이, 고령자가 생겨났습니다. 목숨을 건진 피폭자들은 언제 원폭증이 발병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3. 피폭자의 호소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저는 히로시마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피폭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가장 사랑하는 친척과 수많은 친구가 희생되었습니다.
당시 여학교 1학년이었던 사촌 여동생은 폭심지에서 800m 떨어진 곳에서 피폭되어 그날 밤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없었다면……. 원폭만 떨어지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고모의 한탄을 듣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여학교 1학년이었던 제 아내도 당일 우연히 몸이 아파서 학교를 쉬었기 때문에 피폭을 면했습니다. 그러나 급우 대부분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 살아남은 것은 지금도 아내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무거운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지금도 피폭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히로시마의 피해에 대해서는 수기, 그림, 사진, 영화 등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피폭된 사람들은 그 어느 것도 자신들이 경험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도저히 이 세상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날의 상황은 지금 구전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훨씬 더 참혹했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피폭의 참상이 인간의 표현 능력과 상상력을 넘어선 비인간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저 또한 증언하면서 피폭의 참상을 충분히 전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재판관 여러분께서도 꼭 히로시마·나가사키를 방문해 피폭의 실상을 확인하고 이해를 깊게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핵무기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참한 체험을 듣고 피폭 자료에 접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전에 히로시마의 한 신문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같은 직장에 있던 얼굴과 손에 흉터가 많던 나이 많은 여성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원폭으로 남편을 잃은 그녀는 자신의 상처받은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아이들을 위해 살아가고 일하다 16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33세 때 폭심지에서 1,700m 떨어진 곳에서 피폭된 그녀는 5년 후인 1950년에 그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어디선가 ‘아, 낙하산이다. 낙하산이 떨어진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심코 그 사람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던 쪽의 하늘이 번쩍 빛났다. 그 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눈 속에서 불이 타오른 것일까. 밤의 전차가 가끔 내뿜는 어쩐지 으스스한 청자색 빛을 수천억 배로 한 것 같은데,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빛이 났다고 생각한 것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쿵’하는 뱃속을 울리는 듯한 굉음이 먼저였는지, 순간 나는 어딘가에 심하게 얻어맞은 듯 땅에 엎드렸다. 동시에 머리와 어깨에 무언가가 떨어져서 쏟아져 내렸다.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시골로 피난 간 세 아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뭇조각과 기와가 손으로 치워도 치워도 머리 위로 덮쳐와 좀처럼 몸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죽으면 안 된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남편도 죽었을지 모른다. 도망칠 수만 있다면 도망쳐야 한다···.’ 나는 정신없이 기어 나왔다.
문득 내가 들이마시는 숨이 너무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황린 소이탄일지도 모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코와 입을 허리띠에 매단 수건으로 있는 힘껏 닦아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얼굴에 이상함을 느꼈다. 닦아낸 얼굴 피부가 줄줄 벗겨지는 느낌에 깜짝 놀랐다.
아, 이 손, 오른손은 두 번째 관절(마디)부터 손가락 끝까지 피부가 줄줄 벗겨져 아래로 기분 나쁘게 처져 있었다. 왼손은 손목부터 끝까지 다섯 손가락 역시 살갗이 벗겨져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기에 따르면, 그녀는 그 후 정신없이 교외의 수용소로 도망쳤지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도 상처자리가 흐물흐물하게 살이 녹아 익은 토마토를 으깨어 놓은 것 같았으며 피부가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겨우 붕대를 풀었습니다. 당시 자신의 몸 상태를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왼쪽 귀는 귓불이 반으로 줄어들었고, 왼쪽 뺨부터 입과 목에 걸쳐 손바닥만 한 켈로이드가 생겨나 굳어져버렸다. 오른쪽 손은 손가락의 두 번째 관절(마디)부터 새끼손가락까지 폭 5cm 정도의 켈로이드가 생겼고, 왼쪽 손은 다섯 손가락이 각기 모두 마디(제1 및 제2관절)가 없어진 채 윗아귀에 오그라들어 붙었다.”
시간 관계상 그 전문을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부디 여기에 가져온 원폭 피해에 대한 과학적 조사 보고서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 개요’ 등을 증거로 채택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4. 핵무기의 비인도성
앞서 말했듯이 핵무기가 무서운 이유는 강력한 파괴력은 물론이고,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방사선을 방출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회복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많은 사람이 방사선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습니다.
즉, 핵무기로 인한 피해는 지금까지 국제법에서 사용을 금지한 그 어떤 무기보다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것입니다.
국제법에서 말하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 금지와 인간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는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 과거 국제 선언과 구속력 있는 협정에 의해 금지된 것의 근저에는 인도적인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 유럽에서 출발한 국제법의 정신입니다.
1868년 ‘세인트피터스버그 선언’, 1899년 ‘덤덤탄 금지에 관한 헤이그 선언’, 1907년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헤이그 규정’ 23조, 1925년 ‘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세균학적 전쟁수단의 전시사용 금지에 관한 의정서’, 1972년 ‘생물무기(세균무기) 및 독소무기의 개발·생산·비축 금지와 폐기에 관한 협약’ 등이 탄생한 저류에는 인간의 비이성적 행위를 방지하려는 인도주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1961년 유엔총회에서는 “핵무기 및 열핵무기의 사용은 전쟁의 범위를 넘어서고 인류와 문명에 무차별적인 고통과 파괴를 야기하며, 따라서 국제법 규칙과 인도의 법칙에 위배된다.”라는 내용을 담은 ‘핵무기 및 열핵무기 사용 금지 선언’(유엔총회 결의 제1653호(XVI))이 결의되었습니다.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살상하고, 게다가 오늘날까지 인간에게 방사선 장해로 인한 고통을 계속 주는 핵무기의 사용은 국제법을 위반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핵무기의 개발, 보유, 실험도 비핵보유국에게는 강력한 위협이며 국제법에 반하는 것입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인류를 몇 번이고 죽일 수 있는 대량의 핵무기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핵무기는 사용을 전제로 보유되고 있지만, 핵무기의 존재가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납득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핵무기로는 자국의 안전을 지킬 수 없으며, 이제 국가 안보는 지구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인류가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결코 상상의 공론이 아닙니다. 핵전쟁은 통제할 수 있다는 전략, 핵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핵억제론에 근거한 발상은 핵전쟁이 초래하는 인간적 비참함, 지구환경 파괴 등을 상상할 수 없는 인간 지성의 퇴폐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핵무기 문제를 생각할 때, 그리고 핵보유국의 핵실험장 주변 피폭 주민들의 고통을 알 때, 핵무기 폐기를 명확히 하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세계는 희망의 미래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핵무기 문제를 현재의 국제정치적 힘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핵무기가 인류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81년 2월 히로시마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히로시마를 생각하는 것은 핵전쟁을 부정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운명은 이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부디 신과 같은 지혜와 통찰력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이 핵무기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며 진술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