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12. 12] [퍼옴] 한반도 군사력균형과 군비경쟁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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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함택영(경남대 정치학 교수)의 "국가안보의 정치경제학"(1998. 법문사)의 제 3 장 '한반도 군사력균형과 군비경쟁'을 봉기현(연세대 국제학 대학원 한국학 석사과정)이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한국전쟁 이전에 시작된 남북한의 군비경쟁은 전쟁기간 동안은 물론 정전 후에도 계속되었다. 보다 중요한 점은 한국전쟁이 상호 적대적인 이데올로기 및 체제, 그리고 깊게 뿌리 박힌 불신으로 이루어진 경직되고 지속적인 "분단체제"를 공고화 했다는 것이다. 정전 19년 후인 1972년의 "7.4 공동성명"과 다시 19년 뒤인 1991년말의 소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등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관계는 거의 아무런 진전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군사력을 충실히 다지는 것이 비무장지대 양쪽의 지배세력에게 가장 중요한 일차적 책무가 되어왔다.
여기서는 전후 역동적으로 변화해 온 남북한 군사력균형의 동태에 관한 분석이 이루어질 것이다. 먼저 이 글에서는 군사적 역량에 대한 보다 적실성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시계열자료를 구하고자 한다. 첫째, 한반도의 군사적 상황에 대한 남북한이나 미국의 공식적인 자료는 그리 받아들일 만한 것이 못된다. 둘째로, 우리는 군사력균형의 동학은 군비지출의 유량(flow)보다 군비지출의 저량(stock), 즉 "군비지출누계"-또는 군비지출누계에서 인건비지출을 제외한 금액, 즉 군사적 역량에 있어서 "조직적, 물적 역량에 대한 투자"에 역점을 둔다. 셋째, 남북한간의 상대적인 군사력증강을 위한 경쟁, 즉 한반도의 군비경쟁이 한국전쟁 이후에 전개되었는지 여부와 또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등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다. 넷째, 군비경쟁 이외에도 군비증강을 부추기는 "대외적 변수"로서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또 다른 중요한 변수로 지적될 것이다.
1. 남북한 군사비의 재조명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이 일찍이 1962년에 전반적인 군비증강을 시작한 반면, 남한은 1974년 "율곡계획"에 착수함으로서 이에 상응하는 경로를 밟았다고 한다. 그 결과 남한이 1970년대 중반 이후로 북한보다 많은 액수의 군사비를 지출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의 수나 군비투자누계라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북한이 군사적 우위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대 북한의 전력지수(CCC)는 1973년에 50.8%로까지 '감소'되었다는 보고와 비교를 해볼 때 남한측의 군사투자비 누계가 1975년에 단지 북한의 오직 3.3%~13.6%에 지나지 않는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계산을 보여주고 있다. 3.3%~13.6%의 투자로 50.8%의 전력지수를 얻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째서 북한측이 막강한 군사력의 우위를 가지고도 전면적인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은 전술핵무기를 포함한 주한미군의 전쟁억지력을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의 원조와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약점을 보완해 왔다는 당연한 사실을 지적 하는 것보다 미국의 '확장적 억지(extended deterrence)', 즉 잠재적국에 대한 동맹국의 억지력이 한반도갈등에 있어서 중대한 변수인가의 여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북한의 국방정책은 미국의 대한 안보공약과 주한미군의 존재에 대한 인식에 기반을 두어왔다고 결론짓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한반도의 동태적 군사력균형을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국방부와 다른 기관에 의한 '투자비누계' 계산은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를 제외한 것이다. 따라서 국방부가 주장해 온 바에서 나타나는 남북한간 군사투자비누계의 막대한 격차는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 다시말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와 중국, 소련의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투자비누계에서 제외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사실의 왜곡을 낳을 것이다. 미 군원은 무상원조(MAP)와 '순'(net)군사차관만을 포함했으며, 1966~72년간 주월 한국군을 위해 미국이 제공한 '군사용역지원자금'(MASF)은 제외했다. 즉 남북한간의 군사력균형을 평가함에 있어서 한반도 외부의 남북한 군사력은 제외시킨 셈이다.
한편 한반도의 군사력균형에 대한 평가에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북한의 '실제' 군사비 지출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론적으로 미 군축처(ACDA)와 대한민국 통일원 혹은 국방부의 계산은 이른바 국민총생산(GNP)이나 정부 예산지출이라는 단일변수로 설명을 시도하지만 이것은 "관료제적 관성이라는 가설의 '입증'을 보증해주는 절차"의 완벽한 일례가 된다.
북한의 군사비추정을 위한 현실적으로 최상의 전략은 공식적인 북한의 예산자료 및 미국측이 추정한 중,소의 대북 군사원조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북한은 '민족보위비,' 혹은 1967년 이래로는 '국방비' 명목으로 매년 정부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공표했다. 한편 군사원조를 북한의 예산에 포함시켰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북한의 국방비를 계속 추적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적절한 자료가 없는 형편이다) 공식적인 북한의 민족보위비가 1964~1966년 시기에 상당히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실제 국방비가 상당히 증액된 사실을 시사한다. 그런데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이 '경제와 국방건설의 병진정책'을 결정한 뒤 1967년부터 적용한 '국방'을 위한 지출, 또는 '국방비'는 5년간(1967~1971) 국가예산의 평균 30% 이상으로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북한은 7개 연계획 (1961~1967)을 3년 연장한다고 발표하면서, 그 명분으로 과중한 국방비용의 부담을 제시했으므로 1967~1971년의 총예산의 평균 30.9%라는 북한의 국방비용은 북한 군비지출의 최대치임에 틀림없다. 여기에는 모스크바로부터 차관형식의 군사원조 일부가 포함되어 있음이 틀림없으며, 1970년 이후에는 무상공여의 형태로 중국으로부터의 군사원조가 일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1967~1971년간의 국방비지출 규모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1967년 이전의 민족보위비 발표는 군비의 상당부분을 은폐한 것이라는 결론을 낳는다.
그러나, 공식적인 한미측의 북한 군사비 추정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의 총예산지출의 증가비율이 국민소득보다 높았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의 공격적 성향, 또는 적어도 높은 수준의 군사화를 부각시키는 기능을 한다. 둘째, 북한의 국방비지출에 대한 남한측 추정은 그 구성부문을 살펴볼 때 역시 설득력을 상실한다. 국방부는 1974~1990년의 기간 중 북한이 전력증강투자에 국방비의 48%를 지출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 한 나라가 군병력이나 전투장비를 증강한다면 결과적으로 부대 및 장비 운영유지비를 증가시키게 되며, 이는 다시 방위부담의 증가를 야기한다. 특히 북한의 매우 낮은 경제성장률을 감안할 때, 인민군 병력을 배가시키면서 동시에 국방비의 48%를 투자비로 지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셋째, 남한측의 평가는 전력의 단순개수비교라는 관점에서도 북한의 군비증강 추이를 올바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해서 북한은 남한의 '자본집약적' 군비증강에 직면해서 경제적 제약 때문에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 군비증강을 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넷째, 1972년에 국방예산을 감축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상당한 증거가 있다. 김일성은 1971~1972년 기간 동안 국방에 대한 지출을 감축시킬 필요성 및 계획에 대해 미국측 방문객들에게 언명했고, 1970년대 초반에 중국으로 부터의 군사원조가 재개된 반면, 소련으로부터의 주요무기의 이전은 대폭 감소된 상황이었다. 또한 북한의 산업생산 증가는 물론 주택 및 공공기념물 등 비생산적 건설계획이 상당한 호조를 보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자본이 부족한 북한으로서 생산적 및 비생산적 경제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가했던 방위부담 (GNP의 15~20%)이 상당히 감소되었음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북한 원화의 환율 문제가 제기된다. 남북한 국방비지출을 같은 단위, 예컨대 달러화로 비교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2. 한반도의 동태적 군사력균형
한때 공공연히 '세계 4위의 60만대군'을 자랑하던 남한의 군사력 우위는 대략 1963년까지 다소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남한의 우위는 북한이 1962년말 국방력강화 결정을 내리고 급격히 추격해 옴에 의해 점차 흔들리게 되어, 1964년에는 북한이 총국방비에서 남한을 앞지르게 되었다. 북한의 우위는 1970년대 초까지 계속 확대되다가 남한이 '율곡사업'을 계기로 1976년에는 국방비지출이 거의 50%에 달하는 실질성장을 이룸으로써 연도별 국방비지출에서 북한을 앞질렀다. 북한의 국방비지출 추정액의 하한선 및 상한선에 따라 북한의 국방비누계가 변동하기는 하지만, 남한은 국방비누계에서 1977~1979년경에 북한을 추월했다. 안기부 및 국방부의 공식 북한 군사비추정을 채택하더라도, 미 군원과 감가상각 요소를 계산에 넣을 때 남한이 1981년에 북한을 추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가 북한의 군사비지출에 대한 남한 당국의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추정액을 받아들인다 해도, 레이건, 전두환시대의 개막은 한국이 북한에 대해 군사력 면에 있어서 우위를 확보해 나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인건비지출을 제외할 경우, 남북한의 군사력비교는 어떠한 결과를 낳을까? 한국의 1961년~1994년간 인건비지출을 볼 때, 장병 1인당 인건비와 1인당 GNP는 밀접한 평행관계를 드러낸다. 북한은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경제성장률이 한국에 뒤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1인당 병력유지비의 상대적 감소현상이 나타난다고 전제할 수 있다. 북한은 1975년까지는 장병 1인당 기준으로 남한보다 많은 인건비를 지출했으나, 그 이후의 시기에는 남한이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는 북한 국방비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남한보다 높고 투자비 비율이 남한의 주장대로 48%에 미치지 못한다는, 국방부가 원치 않는 결론을 시사하고 있다. 북한은 1964년에 총국방비 지출은 물론 투자비 및 운영유지비 지출 면에서 남한을 능가하기 시작했고, 1975년까지 이러한 우위를 계속 유지했다. 그 결과 북한은 인건비를 제외한 국방비누계에서 1968~1969년경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고, 1977년까지 계속 우위를 지켰다. 반면 1960년대에 남한이 누렸던 우위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북한 군사력의 급속한 증강과 미국원조의 격감에 의해 상실되었다. 1971~1975년의 시기에 15억불의 미 군사원조로 이루어진 한국군 현대화계획도 이러한 열세를 만회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이 계획이 기본적으로 노후장비의 감가상각을 보충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1975년에도 남한에 대해서 약 22~38%의 우위를 지켰다. 그러나 이러한 남한측의 공식적 주장은 본 연구가 발견한 내용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첫째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남한측 평가는 북한의 국방비지출 그리고 특히 전력증강 투자비를 과장하고 있다. 둘째로, 군사력균형 평가에서 배제된 요인의 하나인 남북한에 대한 미국과 중소의 군사원조를 들 수 있다. 셋째, 감가상각 요인을 다시금 강조해야 할 것이다.
결국, 남한은 1953년 종전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군사력의 우세를 보이다가 그 후 1970년대말까지 10여년간 우위를 상실했으나, 1980년대에 들어 다시 우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누렸던 북한의 우위는 주한미군의 존재와, 만일 필요하다면 약 5만명의 주월 한국군(1966~1972년) 귀환에 의해서 상쇄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4년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의 40~60% 정도라는 것이 최소한 우리가 고찰한 바의 결론이다. 저명한 워게임 전문가인 더니간(J.F. Dunnigan)이 계산한 1995년 기준 동아시아 각국의 '전투력' 비교에 의하면 남한이 2위, 북한은 5위를 기록하였다. 즉 북한은 남한의 약 38%에 불과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 관리들 역시 미국의 관리 및 학자들과의 사적 대화에서 "미국과 한국의 정보기관들은 북한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해온 바 있다.
3. 결론: 군비증강의 대외적 요인
마지막으로,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한반도 군비증강의 외부적 요인으로 외국의 군사원조를 들 수 있다. 미국과 중국, 소련은 각각 남한과 북한의 군비증강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 해 왔다.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남북한의 핵무장이나 남한측의 있을 수 있는 '북침'에 대해서도 억지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일차적 관심사는 한반도의 갈등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남북한의 군사력 균형이나 남한의 군사적 우위란 부차적인 수단이었던 셈이다. 이는 남북한의 군사력균형을 유지하지 않고도 한반도갈등의 관리가 가능하다면, 미국이 굳이 한국군의 증강에 애착을 갖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소련 역시 1968~1969년 북한의 모험주의적 도발이나 1975년 북한의 적극적 통일의사 표명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또한 1972~84년의 시기 동안 북한에 대한 첨단무기 이전을 억제하는 등 미국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글은 평화네트워크에서 퍼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