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12. 27] 왜 한반도 평화는 실현 안 되나(1)(2)(3)-김귀옥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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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반도 평화는 실현 안되나 (1)
김귀옥
머리말
20세기말 ‘냉전’이라는 시계의 태엽은 완전히 풀렸는가? 세계 시계는 탈냉전으로 가고 있다지만 한반도에는 여전히 냉전의 시계가 시대착오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냉전의 시간 속에서 21세기를 맞았고, 새 세기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 속에 놓여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의 상흔이 다 치유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북은 사실상 전쟁의 긴장과 적대적인 냉전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 최근 냉전의 섬으로 남아 있던 한반도에서 지축을 흔든 중요한 사건이 생겼다. 바로 ‘촛불시위’이다. 잘 알려진 대로 군사훈련중인 미군에 의해 사망한 심미선․신효순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자발적 대중에 의해 촛불시위가 개최되었다. 이 시위에는 평화와 자주의 염원이 담겨 있고, 냉전에 의해 짓밟힌 원혼들을 달래는 진혼곡이 울리고 있다. 2002년 11월말 서울에서 시작된 촛불시위가 2003년 들어서서도 전국 방방곡곡에 촛불의 물결을 일으켰다.
처음 이 시위는 두 여중생의 죽음에 대한 주한미군측의 책임을 묻고 소파(SOFA; 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을 요구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다 차츰 한국이 처해있는 근본적인 지형에 대해 묻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2002년 12월 14일의 시청앞 시위에서는 대형 성조기가 찢겨졌다. 또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있으면서 미국에 의한 ‘북핵위기’가 고조되면서 이 시위는 ‘반전평화’, 한반도 전쟁 반대 시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과거 1991년 미국의 대이라크 전 당시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라고 말할 수 있다. 1991년 아버지 부시(Senior Bush) 시절,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끝나자,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 당시, 한국에는 대 이라크 반전시위는커녕 한반도 전쟁 반대 시위도 없었다. 2003년에 와서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지 않겠지만, 가장 확실한 대답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 위기는 북한의 남침적화야욕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간의 전쟁긴장은 완화되었고 민족 화해가 진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 위기에 봉착해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 전쟁 위기의 주체는 한반도의 근본적인 불안정성, 즉 정전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욱이 ‘벼랑끝전술(brinkmanship)’에서 벼랑 끝으로 몰리는 측이 북한이라면 벼랑 끝으로 모는 측은 미국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반도가 반복적으로 전쟁 위기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것은 한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냉전 질서, 분단구조 때문이다. 게다가 분단 자체가 평화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된 요인은 1953년 7월 27일 미국과 북한-중국 간에 체결된 정전협정에서 기인한다. 정전협정이 체결이 된 지 50년이 된 2003년, 많은 사람들이 소리 높여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평화협정을 이루지 못하는가? 무엇이 한반도의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가?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하여 우선 현재 한반도 분단질서를 규정하고 있는 정전협정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난 후, 정전협정에 따른 한반도 분단이 가져온 문제를 살펴본다. 다음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과정을 살펴보고, 한반도 평화 실현을 이루지 못한 원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평화실현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탐색하기로 한다.
정전협정은 무엇인가
어떤 학생들은 말한다. “선생님, 우리는 꼭 통일을 해야 하는가요? 남과 북도 우리가 외국을 자유롭게 드나들듯이 두 개의 나라로서 서로 인정하고 자유로운 교류와 왕래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소위 ‘분단관리론’이다. 1990년대 줄곧 논의되었던 ‘통일비용’ 논의는 통일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통일무관심’, ‘통일허무주의’ 의식을 확산시켰다. 그러한 논의는 우리에게 분단이 무엇인가를 묻지 못하도록 한다. 그것은 오히려 분단을 당연시하도록 한다. 그런데 60년 가까운 분단도 불행한 일이지만, 더욱 불행한 것은 남북의 마음대로 분단이 아닌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상황이다. 과연 그런 상황은 무엇 때문인가?
시인 김남주는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대 가슴에도 있다”고 노래했다. 모든 사회나 사람들의 관계 속에 분단이나 분열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지도상에 삼팔선, 다시 말해 휴전선(The Armistice Line)이 남아 있는 문제와는 별개이다. 그러한 휴전선은 민족 분단을 가져왔으며, 남북의 분단 만이 아니라 ‘남남갈등’도 가져왔다. 이제 우리에게 정전협정은 무엇인가?
정전협정에서 ‘정전’에 해당하는 말에는 정전(停戰, truce) 외에도 휴전(休戰, armistice), 정화(停火, cease-fire)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흔히 정전을 휴전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법적으로 그 성격은 뚜렷한 차이를 갖고 있다. 법적으로 ‘정전’(truce)은 교전국 군대간 합의에 의한 국지적․일시적 전투행위의 정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정전은 전투행위의 일반적 종결을 위한 정치적 목적이 없이 중대장 이상의 단위부대 지휘관에 의해서도 체결될 수 있으며, 국내법상 비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정전은 순전히 ‘군사적’ 성질을 가진다.
이에 비해 휴전(armistice)은 ‘교전당사자간에 전반적인 적대행위의 중지’를 말하며 보통 정치적 목적을 위한 합의로 설명한다. 휴전협정은 교전당사자의 정부 또는 군총사령관만이 체결할 수 있으며, 대부분 국내법상의 비준절차를 거쳐야 한다.(주1)
그런데 한국의 정전협정 체결과정에서 협정당사자와 원래 군사적 측면에서 가져올 효력의 범위에서 보면 휴전협정의 성격을 띠었다. 즉 전쟁 당사국의 최고 사령관이 서명하였고,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법의 비준절차를 거치지도 않았고, 제네바 정치회담 개최를 규정하여 휴전협정이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평화 수립을 위한 성격의 평화협정으로 발전하도록 하려는 초기의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하였다. 따라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당시 협정문의 영문에는 ‘armistice’라 하여 휴전협정임을 명문화하였으나 역사적 성격이나 지위는 정전협정을 넘지 못하였다. 지난 83년부터 94년까지 주한 유엔군사령관 정전담당 특별고문이었던 이문항(미국명.제임스 리)조차도 정전협정은 한반도 평화를 영구 보장해주는 문서가 아니라 전쟁 당사국 사령관끼리 단지 '발포중지(cease fire)'를 합의한 문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 했다.(주2)
사실상의 정전협정은 한반도의 평화 상태를 항상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불안정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분단이데올로기를 재생산시켰다. 그 분단은 남북 당국의 정치적 갈등과 긴장만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 구성원들에게 숱한 상처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것은 개인들에게 전쟁이라는 생생한 ‘공포’를 재생산하면서 국가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세계에도 냉전 질서를 고착화시켰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60년의 분단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 한 세대는 30년이 아니라, 10년미만으로 단축되었다. 1년, 아니 몇 달만에도 세상은 조변석개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바뀌며 사람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60년은 길지만도 않다. 표피적인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흘렸던 핏자국은 미처 닦이지 않았고,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기는커녕 분단의 원천은 여전히 변함없이 남아 있다. 또한 전쟁의 기억은 반목과 미움을 재생산시켜 왔다. 2000년 이후, 전쟁에 억압당해왔던 또 다른 기억은 사회민주화와 맞물리면서 새로이 전쟁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류춘도 시인(1927년생)의 “이름 없는 아기 혼들”(2002년 12월 24일 발표) 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이 시에 나타난 사건은 사실상의 한국전쟁(주3)이 치러지던 1949년 12월 24일, 경상북도 문경 석달동에서 발생하였다. 아무런 죄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석달동 주민들이 국군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군인과 경찰은 빨치산을 토벌하러 나왔으나 한 명도 잡지 못하자, 인근에 있는 마을인 석달동에 들려 그 주민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학살당한 주민 86명 중에는 5세 미만의 유아 11명을 포함해서 12세 미만의 어린이가 26명이었으며 5세 미만의 유아 중에는 돌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갓난아기가 5명이었다(주4)고 한다. 이 사건 역시 4․3 제주항쟁이나 거창양민학살사건,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노근리사건, 금정굴사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사건과 마찬가지로 냉전의 역사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사실을 기억해내고 억울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빨갱이’로 만들어 왔다.
이름 없는 아기 혼들
- 석달동 양민 학살 때 죽은 아기들을 생각하며
산 넘어 넓은 세상 머물 곳 찾아
구천 떠도는 어매 아배 기다리며
석달 마을 산 모퉁이에
이름 없는 아기 혼들 울고 있네
아가들아 아가들아
이름 없는 아가들아 울지를 말고
피묻은 아배 조바위 쓰고
눈물 젖은 어매 고무신 신고 놀지
아가들아 아가들아 오늘 밤은
어매 품에 안겨 아배 등에 업혀
백토로 사라지기 전 그 옛날처럼
좋은 세상 꿈꾸며 잠들어라
이처럼 그간의 정전협정에 근간으로 한 냉전 분단 질서는 한국전쟁 당시 대량학살 당한 민간인들을 한 번 죽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계속 죽였다. 그 유가족들은 2000년 6․15 이후에야 진상을 규명하는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고 2000년 9월에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그 단체는 2002년에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총서 : 전쟁과 집단학살>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하였고, 2003년 2월 27일부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제정을 위한 시위에 돌입하여 4달이 넘는 장기 농성을 하였다. 또한 2000년에는 ‘미군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전민족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였고, 국내외를 거친 공동 조사를 거쳐 2001년 6월, 제1차 코리아국제전범법정을 마련하였고, 2003년 7월 제2차 법정을 개최하였다.(주5)
정전협정 체결 후 수십년동안 민간인 피학살자 유가족들은 맥카시즘의 광기 앞에서 억울한 죽음과 진상에 대해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에게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마치 정전협정이 여전히 한반도의 준전시상태를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그 외에도 분단과 전쟁은 수많은 이산가족을 양산하였다. 더욱이 정전협정은 이산가족에게 이산가족 상봉과 재결합의 희망을 앗아갔다. 2003년 9월초 현재 제8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있다. 한국전쟁 3년간 월남한 북한주민이 70여만명, 월북한 남한주민이 30여만명, 적어도 100만명 이동하였고 그에 의해 수백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념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동한 사람들도 소수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피난하였다. 한반도 분단의 특수성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한 정전협정 제3조 59항에 의해 이산가족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50년이 흘렀다. 남한의 경우 지난 폭압적인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산가족의 대다수는 숨죽이고 살거나 ‘반평화통일세력’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이산가족 가운데 상당수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됨에 따라 해외로 이산되어 이중 삼중 이산의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의 강제동원정책에 따라 이주했던 일본의 ‘재일조선인’들의 고향은 90%가량이 남한임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지 못하였다. 해외 이주민들의 사회에도 그어진 분단에 의해 많은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회한과 고통 속에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과 무능력한 여성, 부모 없는 고아를 양산하였다. 전쟁이나 사회적 극한 상황에서는 여성이나 어린이, 노약자가 최대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다. 한국의 부끄러운 기록의 하나인 고아 수출 세계 1위(주6)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생겼다. 또한 주한미군의 주둔은 한국에 성매매업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직전에는 5만여명의 젊은 여성들이 주한미군 기지촌 중심의 공, 사창에서 성매매를 하였으나, 1953년 무렵에는 30여만명으로 급증하게 되었다. 생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여성들이나 고아들이 생계를 찾아 성매매업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현재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팽창된 한국의 성매매업은 크나큰 사회적 문제로 되어 있다.
정전협정과 함께 잃어버린 것: 민족자주권
전쟁을 통하여 한국인들이 잃어버린 최대의 문제는 바로 '자주권'의 상실이다. 한국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참전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작전지휘권(그 직후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양도하였고 2003년 현재도 그것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주한미군이 철수하거나 ‘자주국방’을 언급하는 것을 세상이 무너지는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과 체결한 대전협정이나 소파협정(SOFA) 등 관련 협정 등에 의해 한국은 군사적 자주권을 여전히 갖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 정전협정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한국은 당사국에서 배제되어 오랫동안 정전협정 문제나 평화협정 문제와 같은 논의과정에서 배제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끊어진 경의선 연결과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하여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판문점 주한유엔군 사령부와 북한군간 장성급회담의 유엔사측 대표였던 제임스 솔리건 미군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남북 교류협력 사업에서 MDL(군사분계선) 통과는 반드시 유엔사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며 “MDL을 넘기 위해선 버스 운전사라도 유엔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주7) 한국측의 여론에 밀리면서 유엔사는 양해하는 식으로 군사분계선을 통과하기로 결정하여 육로관광이나 경의선 철도 연결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미군이나 미국의 최종적인 동의 없이 남과 북의 이익만으로 휴전선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한국측으로서는 없는게 현실이다.
심지어 과거 1990년대초 미국의 신작전계획 5027(New OPLAN 5027)은 “남과 북이 무력충돌할 경우 휴전선 근처에서 며칠간의 혼전을 거쳐 평양의 종심부를 공격하여 북한정권을 멸망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91년 23차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New OPLAN 5027이 채택되어 이제 북으로부터 남침 조짐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즉각 미군을 추가 투입하여 5027작전을 수행한다는 초공세적 작전으로 바꿔졌다. 이러한 적극적인 공세 전략은 2003년 7월, 미국의 ‘작전계획 5030(OPLAN 5030)’으로 발전하여 주한미군 사령관이나 주한미군 지휘관의 결정에 의해서 전쟁은 언제든지 발발 가능한 공세적인 예방전쟁 개념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전쟁은 한국인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건 상관없이, 또는 북한의 무력도발의 의지가 사라졌건 상관없이 미국의 뜻만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게임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2000년 이후 한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면서 평화협정에 대한 요구가 한국인들 사이에 절박하게 되었고, 2001년 미국의 대아프간 공격이나 2003년 이라크 공격은 “강건너 불구경”할 수 없는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분단과 전쟁, 정전협정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개인과 사회의 생탈여탈권, 즉 자주권을 상실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생존권을 회복하기 위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기초로서 평화협정 문제로 들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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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 최철영, “변화하는 남북관계와 정전협정의 대안”, 『역사비평』통권 63호(2003, 여름호)
(주2) 『연합뉴스』2003.7.15
(주3) 한국전쟁의 개선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으로 남아 있으나, 영국 사학자 존 할리데이(Jon Halliday)는 1945년 9월 8일 미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미국학자 존 메릴은 1947년 12월, 강정구는 1948년 2월, 브루스 커밍스 역시 1948년 개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4)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가 쓴 추모시비 비문 내용 중 일부 발췌
(주5)『민족21』. 2003. 9월호.
(주6) 이러한 사실은 1980∼1998년의 미국 이민분석자료에서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이다. 즉 미국의 전체 고아입양자 가운데 한국출신 고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한국이 ‘고아수출국 1위’였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동아일보』2001.2.20
(주7)『동아일보』200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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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반도 평화는 실현 안되나 (2)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을 위한 노력
김귀옥
과연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을까? 또한 그러한 노력의 기초로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했는가? 그 대답은 역사적 자료를 찾아야하지만 상당히 신중할 수밖에 없다. 같은 자료에 대해서도 상이한 입장과 가치 판단에 따라 상이한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펑더화이(彭德懷) 중국 의용군 사령관, 김일성 북한인민군 사령관 등 3자가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한 이래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회담과 논의들이 부단히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개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간단하나마 평화협정을 둘러싼 남북의 기본 주장(‘표’ 생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953년 7월 27일 이래로 최근까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보면 북한은 적극적이었던데 반해 남한은 소극적이거나 미국과의 공조 중심적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까지 북한은 “전쟁상태를 점차적으로 퇴치하기 위한 조건들을 조성하며 쌍방의 군대를 평화상태로 전환시킬 데 대한 문제를 심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에 해당한 협정을 체결할 것”(1954년 6월 15일 남일 북측 제네바회담 대표의 주장)이라는 원칙을 주장해왔다. 그에 대해 한국측은 제3대 국회에서 “유엔감시하에 북한 전지역에서 모든 공산군이 철수한 후 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 주권을 확충하는 것이 국시”라고 결의하였고 그러한 입장은 1960년대에 계속되었다.
1950년대에는 구체적으로 ‘평화협정’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1953년 7월 27일 조인된 휴전협정이 평화체제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고, 또한 한국을 포함한 조인당사국간의 정치회담을 남겨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미국의 정치회담 회피와 유예에 의해 결국 휴전협정은 사실상 ‘정전협정’적 수준에 머문 것이다. 따라서 1960년대 와야 비로소 평화협정에 대한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60년대에는 북한은 남북을 당사자로 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한반도 평화 체제를 구축하자는게 기본 입장이었다. 북한은 1958년 중국군이 철수하고, 1960년에 연방제를 제창한 이래로 “우리는 미국군대를 철거시키는 조건하에서 남북이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을 데 대한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남북조건의 군대를 각각 10만 혹은 그 이하로 축소할 것을 다시금 제의”(1963.9.8 북측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용건 보고)하였다. 반면 1961년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소장은 반공 국시를 천명하였을 뿐 민주공화당의 정책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 어디에서도 유엔 감시하의 남북자유선거 외에는 평화협정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가시적인 노력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나타났다.
북한이 입장을 바꾸어 정전협정 당사국간의 평화협정 체결하게 된 것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공포한 후 1973년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과 1974년 “남북간 상호불가침협정”을 발표한 이후이다. 그 내용의 골자는 미군의 한국 주둔하에 남북의 상호불가침협정을 체결하자는데 있었다. 그러한 남측 정부 당국에는 “대미평화협정 체결 같은 실현 불가능한”(박동진 외무부장관의 성명, 1977. 5. 13) 것으로 보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이에 대해서 북한은 남한이 “평화협정 체결을 기피”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평화협정에 대한 논의를 남북 중심으로 풀어나가기보다는 북미간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중반 북미회담에 남한이 참여하는 방안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미국의 공격적인 세계패권전략 및 대적성국가 봉쇄정책과 북한의 NPT체제 탈퇴로 한반도 평화와 핵문제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1994년 6월 전쟁 위기를 넘기면서, 그해 10월, 북한과 미국은 ‘조미기본합의서’를 체결하여 북핵위기를 넘기는가 했다. 그러나 미국은 합의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그에 맞서 북한은 핵문제를 다시 들고 나오면서 북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 무렵이었던 2002년 10월, 북한은 과거 방식의 대미평화협상 체결 주장을 벗어나 북미 상호불가침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2003년 북핵 다자회담에도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이 평화협정 체결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말 이후이다. 남측에서는 정부 당국에서보다는 통일운동권, 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시민사회 수준에서 평화협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한반도 통일을 위한 평화군축협의회’(대표 이효재)가 구성되면서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와 통일을 위하여” 휴전체제를 미국이나 휴전체제에 책임이 있는 당사국들이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남북간에는 군축을 실시할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한 남측의 급변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노태우 대통령도 ‘휴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북측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그때 이래로 남한은 미국과의 공조하에 휴전체제 해결의 당사국으로 남북 2+2, 2+3. 2+4 등의 다자간 회담으로 풀어 나가고자 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1년 3월 초 한미정상회담 직전 “김정일위원장의 답방 때 냉전종식을 위해 평화협정 또는 평화선언 등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겠다”고 밝혔다. 정전협정 체결 50년이 되는 2003년 7월 27일에는 시민사회는 한반도 냉전질서를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이룩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한 중요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구성원들은 국가, 시민사회 구분 없이 냉전질서로 대변되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 한반도 평화체제로 나가는 것은 대세이며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정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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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반도 평화는 실현 안되나 (3)
김귀옥
왜 평화협정은 실현되지 않는가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거나 한반도 평화가 정착되지 않는 원인을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전협정의 불안정성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전협정 어디에도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상호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고, 불이행에 대한 명확한 규정조차 없다는 것이다.(주1) 정치회담을 통한 정치적 성격을 띤 휴전협정이 되어 평화적 장치를 갖도록 하였으나, 불이행에 대한 강력한 규정이나 대안은 어디에도 없다. 그 결과 1954년 제네바회담이 미국에 의해 유예된 이후 논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또한 정전협정에는 많은 허점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해상의 ‘북방한계선’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정전협정에는 해상의 군사분계선을 명시하지 않아 이후 군사적 충돌과 긴장을 예기하도록 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 8월, 서해 5도(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로부터 북쪽 3해리이자 북한 지역 중간 지점에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하였다. 1955년 3월 북한은 영해범위를 12해리로 채택하여 유엔사의 북방한계선을 간혹 침범하였으나 1973년 12월 이전까지는 별 문제가 없이 넘어갔다. 1973년 12월 1일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 NLL을 부인하였고, 1991년 정전협정 무효를 선언한 후 1999년 2월 NLL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근본적인 정전협정의 허점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평화협정이 실현되지 않는 원인을 주체의 면에서 살펴보면, 과거 남측 당국의 비주체적인 지위와 역할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90년대 이전까지 남측 당국은 평화협정 체결을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논의 자체를 기피하였다. 그렇게될 수밖에 없던 것은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미국과의 관계에서의 종속성은 민족의 자주적인 힘으로 한반도 평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를 박탈하였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군사적 예속 상태와 경제적 종속성을 고려하더라도 과거 정부 당국은 ‘반공 국시’를 내세우며 ‘구조적 자율성’마저 포기한 채 미국의 입장을 넘어서는 주장을 거의 하지 못했다.
1990년대 세계적 탈냉전이 되어서야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는 등 쾌거를 올리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냈으나 남한과 북한의 통일 해법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다. 더 근본적으로는 당시 미국 공화당 아버지 부시 정권의 반대에 부딪치며 남북기본합의서는 국회 비준도 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2000년 3월 김대중대통령의 베를린선언 직후 남북정상회담을 거쳐 6․15 남북공동선언이라는 역사적 기념비를 세웠다. 6․15 선언으로 인해 남북간에는 상전벽해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남북교류가 정치, 경제, 사회․문화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아직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몇 년간의 남북 관계도 가역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남북문제 전문가들은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기에 남북간 평화체제를 이룰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합의해 내도록 기대했다. 시민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등장한 노무현 대통령 역시 아직은 한미공조를 앞장세우고 있다. 과거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 비해 문민정부는 구조적 자율성의 폭은 넓어지고 있으나, 비주체적인 관행에 빠져 당국은 구조적 자율성의 묘미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 실현에 걸림돌이 되어온 것은 한국 내 냉전고착세력을 빼놓을 수 없다. 과거에는 냉전고착세력은 지배세력으로서 국가를 이루었으나 1990년대 이래로 그 세력과 국가 핵심세력과의 분리 현상이 심화되어 가고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친미지향적이다.
과거 단재 신채호 선생이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으로서 지칭하였던 이승만 대통령과 그를 비호하던 세력들이 건국 유공자로서 자리매김되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미국인보다도 더 철저하게 미국의 입장의 관철시켰던 것이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등장한 민주당 정권이나 1961년 5․16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 1979년 12․12 신군부쿠데타와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기까지 정치계 외에도 경제계나 사회․문화․언론 단체에서도 냉전고착세력은 친미사대주의적 토양 위에 뿌리를 내렸다.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북한과의 공존의 길을 걸을 수 없었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등과 같은 법이나 군정보사찰기구, 경찰기구 등과 같은 물리력뿐만 아니라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국민에게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남북 관계를 후퇴시키거나 악화시키는데 주역이 되었고 2003년 현재에도 시대착오적인 행위로서 한반도 평화 실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 요인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남한에 비해서는 선명한 평화 정책을 발표하였고, 일찍이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강변하였다. 그 주장이 아무리 옳다 하여도 그것이 현실적이지 못하고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불행한 분단 구조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앞에서는 평화협정이나 두 체제의 차이를 인정한 연방제를 주장하면서도 뒤에서는 남파공작원을 파견(주2)하거나 남한의 민주화 문제에 북한이 개입하였던 점은 남측 정부 당국자들이나 지배집단으로부터 적화야욕의 근거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남북 기득권 세력에 의한 체제 유지를 위한 ‘적대적 공생’ 개념까지 만연이 되며, 정권 당국은 시민사회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북한이 ‘민족공조’를 주장하지만, 과거에는 민족공조보다는 인과론적 원칙론을 앞세웠기 때문에 1970년대 남북불가침협정과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을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또한 북한이 보다 유연하게 한반도 평화문제에 접근하였다면 1970, 80년대에 조미, 조일 관계 개선을 할 수 있었다. 나아가 남한이 정정협정의 당사국이 아니라고 하여 평화협정 문제나 조미관계에서 봉남(封南) 정책을 펴온 것은 오히려 민족 분열적인 입장을 확대한 것에 다름 아니다.
한반도 평화협정, 나아가 평화체제 수립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원인은 무엇일까? 결정적인 장애요인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한반도 현대사의 고비마다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구체적인 힘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분단으로 만든 것도 미국이었고,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과에 따라 임시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 것도 미국이었다. 또한 1948년 5월, 한국민의 의사와 달리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강요함으로써 남북의 분단을 결정지었다. 나아가 그것이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되게 한 것 역시 미국이었다. 이후 미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한다는 명분으로 작전지휘권(이후 작전통제권) 등을 회수하여 이후 한국 없는 한국문제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 정전협정 논의과정에서 한국 정부를 배제함으로써 한국이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해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특히 미국은 1990년대 세계적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 한반도의 통일기류에 찬물을 끼얹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반도 탈냉전과 평화 체제를 구축할 전기라 할 수 있는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좌절시켰고, 북한 점령을 시나리오로 삼고 있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하여 남북 관계를 악화시켰다. 또한 북한조기붕괴설을 퍼뜨리며 통일비용론과 통일허무주의를 확산하기도 하며 남북공조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특히 2001년 공화당 아들 부시정권 등장 이후에는 남북 관계를 미국의 질서 하에 놓아두기 위해 군사적인 힘이나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가해오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F15K와 같은 무기 구매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주한미공보원(USIS)이 발표하는 정보를 통해서도 한국 지식인이나 대중에 영향력을 주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한국내부의 분열을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비근한 예로 2002년 3월 25일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미의회에 제출한 ‘한·미 관계 보고서’를 들 수 있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과 비자금의 내용을 담은 보고서는 조선일보를 통해 국내 알려지고, 한나라당에 의해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길들이기의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그것은 노무현정부 출범 초기부터 일파만파를 가져와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노무현정부의 대북정책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미 미국은 태평양 건너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라, 한국 안에 구체적인 힘으로 모든 사회 영역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실체이다.
미국은 21세기도 미국의 패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미사일방어(MD)체제를 세계에 강요할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편입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한 힘에 역행하려는 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체계적인 배제의 원리를 적용한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미국이 세계를 미국화시키는 데 물리력만을 동원하는게 아니라는데 있다. 쾌락과 편리함, 다양성과 새로움, 세련됨과 속도에 기반으로한 헐리웃식 문화를 세계시장에 보급하여, 미국 문화를 일반화시키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미국 주도의 문화제국주의적 관점을 보편적인 관점으로 만들어 내며 세계에 대한 지배를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한 헐리웃식 문화는 미국을 거점에 둔 초국적자본의 위치를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들고 있고, 신자유주의를 당연시하도록 만든다.
동북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적인 나라, 미국의 질서를 당연시하는 나라인 한국은 과연 미국의 51번째 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민은 한반도 평화 체제를 이룩하고 21세기 한반도와 동북아의 번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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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 김보영, “정전회담 쟁점과 정전협정”, 『역사비평』제63권(2003. 여름호).
(주2) 이 문제에 대해서 남북 모두 결백성을 주장할 수 없다. 2000년 11월 7일 국회의원 김원웅은 국방부 자료를 인용하여 1950년 이래로 1999년까지 총 남파공작원은 6,446명이며, 그중 생포자(生捕者) 3,177명, 사살자 1,644명, 자수자 275명임을 밝혔다. 월간 『신동아』(2001년 1월호)에 의하면 1950년대 북파공작원의 생존율은 겨우 10%에 불과했지만 60년대 이후는 90%에 이른다. 1960년부터 1972년 7․4공동성명까지 13년동안 북파공작원이 약 2,150명 실종되었으므로 실제 파견한 연인원은 2만1,500여명에 달한다는 결론이다. 강정구, 『민족의 생존권과 통일』, 당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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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성공회 대학의 연구교수이다.
* 이 글은, 필자가『월간 한민족』2003년 창간호(10월호)에 게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