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위기’ 어떻게 극복할까
임동원 전 외교안보통일특보와의 대담
임동원 전 외교안보통일특보를 홍세화 기획위원이 지난달 27일 동교동의 김대중 도서관에서 만났다.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 국정원장, 2번의 통일원 장관을 지낸 임 전특보는 외교안보통일정책에 관한 한 김 전 대통령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에서 시작된 남북화해협력의 최일선에 서있었다. 얼마전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 기념강연에서 그는 이 시기를 ‘평화와 통일을 향한 탈냉전의 프로세스’로 불렀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그가 언론과 직접 한 인터뷰는 드물다. 무엇이 지난 15년여 그를 한반도 탈냉전 프로세스의 한 가운데 있게 만들었을까. 다시 불거진 핵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현안 말고도, 고희를 넘긴 ‘임동원’에 대한 궁금증도 이번 대담을 기획했던 이유다.
점심시간까지 합해 4시간여 걸쳐 진행된 이번 대담은 안과 바깥의 ‘특별한’ 만남이라 할 만하다. 이북 출신, 육사 13기, 육사 교수, 외교관 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경력은 ‘주류’이자 ‘인사이더’다. 한세대 정도의 차가 있지만 홍세화 위원은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20년간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파리의 택시운전사’다. 한국에 와서도 그는 ‘아웃사이더’를 고수하고 있다.
삶의 궤적이 다른 만큼 임 전 특보와 홍 위원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 어색함은 홍 위원이 자신의 대학시절로 얘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홍세화=개인적으로 만날 약속을 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원래 공대에 들어갔다가 외교학과에 들어간 것도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아주 순진하고 소박한 생각이었습니다. 근데 들어가보니 한국 외교의 총량이란 것이 미국의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한 사람의 역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공부할 마음도 옅어졌습니다. 그런데 외교일선에 나선 저의 동료나 선후배가 아니라 군인이자 이북 출신으로서 전쟁을 경험했던 임 전 특보가 88년 7·7선언부터 92년 기본합의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등 큰 일을 했다는 게 착잡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습니다.
임동원=제 살아온 인생은 크게 세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일제 통치 아래서 소학교 나오고 공산치하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17~18살 때까지가 한 시기죠. 전쟁 중에 단신 월남했는데 오자마자 국민방위군에 잡혀 들어갔어요. 경상도 시골의 한 과수원 창고에서, 정말 자고 일어나면 옆 사람이 죽어나가는 생활이었죠. 하루에 주먹밥 2개 받아 연명했는데, 그해 겨울이 얼마나 추웠던지. 미군 부대 식당 창고지기로 2년간 일하면서 부산에 있었는데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혼자 틈틈이 공부했는데, 학비를 낼 형편이 안됐죠. 근데 교회 갔다 오는 길에 우연히 육사생도 모집 포스터를 봤어요. 전쟁으로부터 국제냉전이 종식되던 80년대말의 약 40여년에 걸친 냉전시대는 군인으로서 28년, 외교관으로 10여년을 보냈습니다. 냉전은 두가지 형태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이념의 대결이고 다른 한 측면은 군비경쟁이죠. 한반도는 양대 진영의 최전선 기지로 냉전에 희생돼 왔다고 할까, 그런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기고요. 이런 시기 군인, 외교관으로서 어떻게 하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근무했죠. 그 시대의 사람으로 당연한, 명예스런 임무였고,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80년대말 탈냉전 이후 90년대 초 남북협상에 참여해 지금에 이른 시기입니다.
홍=67년 당시 쓰신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임=사실 그 책이 임동원이란 사람을 있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책을 써서 몇몇 유명 출판사에 내려 했지만 모두 딱지를 맞았어요. 물어물어 아주 작은 출판사에 갔는데, 내주기는 하는데 자비출판을 하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때 아내가 친구로부터 돈을 꿔서 1천부를 찍었어요. 들어간 돈도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중정)에서 부르는 거에요. 아이고, 걸렸구나. 거기엔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뭐 이런 내용들이 다 인용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중정쪽에서 자기들도 북한이 이런 게릴라 전략으로 나올 거라고 분석하고 있었다며 교재로 당장 5천부를 구입하겠다는 거에요. 그게 인연이 돼 유명해졌고, 중정은 물론 경찰쪽으로부터도 강연과 책을 구입하는 요청이 잇따라 3만부 정도를 찍었습니다.
홍=그런 역할까지 하셨다면 냉전주의적 사고랄까 반공주의 의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임=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가 변한 거죠. 80년대말 국제정세에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속에 체제전환의 과정이 일어났고, 한편에선 군축협상을 통해 군비감축이 시작됐습니다. 80년대말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있으면서 군축 탈냉전의 과정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는데 7·7선언,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만드는데 관여했고 이를 계기로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로, 군사외교 담당으로 나간 게 인연이 됩니다. 제 인생의 세번째 시기인 이 15년은, 한반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탈냉전의 전환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냉전시대엔 그 시대의 역할을 했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저도 변한 겁니다. 그래서 전 예비역이나 이북 출신 모임에 가면 외톨이가 되버립니다.
홍=세번째 시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되셨는데 95년 아태평화재단의 사무총장직을 수락하실때 김 전 대통령의 ‘삼고초려’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지금 말씀하신 새로운 흐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가던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요
임=90~93년초까지 열렸던 남북고위급 회담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사람은 저 혼자인 것 같습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통일부 차관을 그만두고 연구소에서 글도 쓰고 여생을 보내려 했는데 김대중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이 사람을 시켜 연락을 해왔어요. 깜짝 놀라 난 아니다 능력도 없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분이 끈질기셔요. 며칠 뒤에 또 사람을 보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또 사양했어요. 그런데 또 요청이 왔어요. 마음이 흔들렸죠. 그날이 1월23일이었으니까 이제 9년을 넘어 10년째 접어듭니다. 동교동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2시간여동안 얘기를 나눴는데 남북문제, 통일문제, 북한 핵문제가 상당히 쟁점이었는데 탁월한 식견을 갖고 계셨어요. 그 자리에서 결정했어요. 처음 1년간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이분이 확고한 신념, 고집이 있잖아요. 저도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4~6시간씩 자택에서 토론하기도 하고, 어떨 땐 토요일 호텔에 방을 잡아 밤새며 토론도 했어요. 김 대통령의 장점이 뭔가 하면 일단 납득이 되면, 바로 받아들여요. 저도 그분 생각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죠. 그런 과정에서 소위 요즘 말로 코드를 맞춰갔습니다. 아태재단에 오자마자 처음 한 것이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을 완성하는 것이었어요. 초안을 만들고 다시 호텔 방을 잡아 김 대통령과 쭉 독회를 하며 다시 토론을 했어요. 저는 나름대로 김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에 구체적이고 정책적인 내용들이 담기도록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뒤에 김대중 정부 대북정책의 ‘바이블’이 된 거죠.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6·15 공동선언문을 서명할 때 배석한 남쪽 인사는 임 전 특보가 유일했다. 15년 이상을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그의 경험은 비단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교훈일 것이다. ‘첫째, 둘째’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데 뛰어난 임 전 특보는 손을 꼽아가며 그 경험을 얘기했다.
홍=그런 과정을 거쳐 6·15 공동선언까지 간 걸텐데 지금 되돌아보면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임=김대중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이미 통일의 길은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대로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통일되기 이전에 어떤 관계로 남북이 살아갈 것인가, 그 방향을 정한 게 남북기본합의서죠. 우선 남북이 누군가인가부터 따졌어요. 외국에 대해선 주권국가지만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보자,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죠. 이 ‘특수관계’를 5가지 분야로 정리했습니다. 먼저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면서 화해해나가자, 둘째 다방면에 걸쳐 교류와 협력해나가자, 셋째 불가침-전쟁하지 말자, 넷째 전쟁하지 않기 위해서는 군사적 신뢰조치를 취하면서 군축을 해나가자, 다섯째로 현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바꿔나가자는 것입니다.
홍=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이미 합의돼 있던 남북기본합의서 내용을 실천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임=그렇죠. 남북정상회담은 바로 그 내용을 ‘실천하자’는 것을 합의한 거고 6·15 선언은 ‘실천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의의는 5가지입니다. 우선 긴장을 해소하자, 즉 북한과 남한이 서로에 갖고 있는 공포증을 털어버리자. 두번째는 통일문제를 재검토하자는 겁니다. 북한의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은 남북대표 동수가 민족회의를 열어 우선 연방정부를 만들어 외교 군사는 연방정부하에 두자는 건데 지금 어떻게 즉각 통일이 되겠습니까.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그건 불가능하다. 그건 냉전시대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남한의 연합제 통일방안은 사회문화경제공동체를 구성해서 상호의존도를 높이며, 서로 오고가며 돕는 ‘디 팩토 유니피케이션’(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이루고 나중에 법적으로 통일하자는 기능주의적 접근방안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게 좋다는 거에요. 다만 북은 그걸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 부르겠다는 거였죠. 세번째는 교류협력을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 신뢰를 조성해나가자, 다져나가자고 합의서에 되어 있어요. 그건 제가 강하게 그 표현을 주장해서 넣은 겁니다.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서 보면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안되는 문제가 불신입니다. 네 번째 중요한 의의는 북한이 드디어 어느정도 안심하고 개방하고 경제개혁에 나서게 됐다는 것입니다. 1년반 전 7·1경제관리개선조처로부터 경제개혁을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입니다. 우리 문제를 남북이 마주앉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한 겁니다.
공식적으로만 70여차례 북한사람들과 만났던 임 전 특보에게 북한의 고위인사들에 대한 인상을 물어봤다.
홍=김대중 전대통령은 2000년 2월 김정일 위원장을 ‘식견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임=2000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김대중 대통령 말대로 가서 만나보니 진짜 지적인(식견있는) 인물이란 걸 느꼈고 남의 말을 경청하고 훌륭한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 실용적 사고를 갖고 있고 결단력이 있더라고 썼습니다. 제가 추가하자면 나이드신 분들에 대해 예의가 바르고 유머감각이 뛰어납니다. 영화 음악 드라마 등 예술에 상당히 관심있고 조예가 깊어요. 남한의 영화, 드라마, 음악을 너무 잘아는 바람에 제가 당황한 적이 많습니다. 특사로 갔을때 저녁식사하며 5시간 동안 얘기했는데 이분이 <춘향뎐> <공동경비구역 JSA> 영화를 얘기하는데 제가 봤어야죠. 돌아오자마자 비디오를 빌려서 봤습니다. 또 <용의 눈물>을 몇회까지 봤는데 그 다음 얘기가 어떻게 됐냐고 묻는데 그것도 대답 못했죠. 통일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북한 바로알기’라는 코너가 있는데 ‘그거 좀더 정확히 해야 합니다’면서 은근히 불만을 얘기하기도 하더군요. 그것까지 다 봤다는 겁니다.
홍=북쪽과의 협상에 임하는 자세랄까, 어떤 점이 중요한지 들려주십시오.
임=북한과 협상을 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일반적으로 국가간 협상도 그렇지만 남북협상은 서로 기본입장을 내놓고 이를 고수하기 위해 싸우게 됩니다. 적과 적이 마주앉은 개념으로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거에요. 그러나 이기고 지는 그런 협상은 잘 안됩니다. 공동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떤 원칙, 어떤 기준 하에서 하는 게 좋겠는가부터 논의해서 그 원칙 하에서 협상을 하는 ‘원칙협상론’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상당히 많은 진전을 봤습니다. 적과 적이 만나는 게 아니라 문제해결사들끼리 만나자, 문제 해결사 입장에서 해결하자는 거죠.
이제 ‘지금’을 이야기 할 때가 됐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대북송금특검을 둘러싼 논란, 최근의 사면 논란까지 임 전특보는 그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술술 넘어가던 분위기에서 조금씩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홍=대북 송금특검으로 결국 재판정에도 섰는데 소회라고 할까, 어떠셨습니까. 최근 또 사면문제를 둘러싸고 논란도 있었는데요.
임=민주화 투쟁하며 고생한 분들에겐 할 말 없지만 70평생 살아오면서 전 ‘찰’자 붙은 데는 불려간 적이 없습니다. 재판 구경도 해본 적 없습니다. 법정에서도 진술했지만 현대가 송금하는 것 중 2억달러가 정상회담 전에 가야 하는데 환전이 안된다며 국정원에 긴급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당시 정상회담이 1주일도 안 남았을 때인데 정식 수속을 밟으면 오래 걸린다고 해서 국정원의 고유업무인 ‘공작적’ 차원에서 편의를 제공해주기로 결정한 겁니다. 저는 그것을 왜 재경부장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했느냐는 것으로 기소됐습니다. 그런데 모든 국가간의 행위엔 크게 3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선 외교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게 안되면 전쟁까지 가고, 그렇지 않은 제3의 길이 비밀공작입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나 국정원의 일이라는 게, 국가이익을 위해 외교나 전쟁 아닌 다른 방법 이른바 ‘비밀공작’으로 국가이익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국제인권규약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인정돼 있는 국제관례입니다. 그에 대해 사법적 잣대를 들이미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면 문제는 제가 말할 입장이 아니고 그 질문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임 전 특보는 어떻게 볼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홍=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이 과연 햇볕정책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말로는 계승한다고 하지만, 이라크 파병을 실질적으론 핵문제나 경협과 연계시키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임=참여정부가 처음에도 햇볕정책을 계승발전시킨다는 말을 했고 요즘엔 더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처음엔 표면상으론 그렇게 하면서도 내막적으론 이전 정부와의 차별화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와서는 다시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6·15공동선언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조금 차별화에 치중하는 감이 있었지만 지난 1년을 볼 때 참여정부는 햇볕정책의 계승 발전이라는 입장을 유지해왔고 6·15 공동선언을 지켜나가는 입장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홍=현 정부는 북핵위기 속에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선 이라크 파병이 필요하다며 연계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전혀 별개문제로 봅니다.
임=(파병문제는 언급하지 않은채) 핵문제는 해결의 방법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미국과 북한 지도자의 해결의지가 있는가, 특히 부시 대통령이 해결할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의지만 있으면 내일이라도 곧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홍=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부시가 왜 북핵의지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가. 북핵문제를 지렛대로 해서 중국견제를 하기 위해서 또 거기에 미사일방어(엠디)시스템과도 연결시켜 북한이 핵문제를 오히려 해결하지 않는 편이 부시나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의 이익에 맞기 때문 아니냐는 겁니다. 그럴 때에 노무현 정부로선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병행’이란 것도 그 자체로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판단이 듭니다.
임=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우리의 땅, 우리 삶의 터전이고, 한반도의 주인공은 우리입니다. 확실한 주인의식을 갖고 북핵 위기는 한반도의 위기이기에 주인으로서 발언권을 갖고 할말 다 하고 설득할 것은 해야 합니다. 98년 김대중 정부 초기에도 문제는 복잡했습니다. 금창리 지하 핵시설 건설 의혹에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도 있었죠. 게다가 그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해 상하 양원을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강경파들로부터 대북정책을 전면검토하라는 압력을 받아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페리는 94년 당시에 북한을 치려 했던 국방장관 아닙니까. 제가 그때 페리 팀을 만나 8번에 걸쳐 협상을 하면서 설득했습니다. 미국을 설득해서 정책에 보조를 맞춰나가도록 했더니 북한도 큰 무리없이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홍=그런 맥락에서 대미관계에서 참여정부는 역사적 소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시위 등의 국민의 대미의식이 정권출범에 바탕이 됐고, 노 대통령을 뽑은 국민의 뜻엔 분명 미국과 관계가 수직적 종속적인게 아니라 좀더 수평적 관계가 되기를 바랬던 열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여정부 출범 뒤 그런 역사적 소명이나 바램을 저버린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임=참여정부가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려 했다는 건 읽을 수 있습니다. 참 어려운 상대를 만나 어려운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민들도 좀더 뒷받침을 많이 해줬어야 하지 않았나는 생각입니다.
홍=이라크 파병이 결국 부시의 당선을 돕는 행위가 될 수도 있잖습니까. 국내적으로도 수평적 관계를 원했던 국민의 바램을 저버리는 것이 되고. 그런 면에선 정말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추가파병, 전투병 파병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우리 국민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미군이전 문제 등에 이르자, 홍 위원은 한미관계가 수직적 종속적인 불평등한 관계라며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했다.
홍=요즘 용산기지 문제나 평택으로의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국내의 수구 보수언론들은 주한미군의 성격이 동북아 지역군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라는 데 주목하기 보다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립, 이런 맥락에서만 보고 있습니다.
임=용산기지 이전문제는 벌써 노태우 대통령 때인 10여년 전부터 제기된 문제잖습니까. 이번엔 차원이 다르죠.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전세계에 배치된 미군 기지들을 조정해 지상군 구조를 대폭 바꿔나가는, 즉 한반도에 고착시키는 군이 아니라 긴급대응군형태로 바꿔나가는 개혁과정에 있습니다. 용산기지는, 그게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남쪽으로 이전한다고 해서 안보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수도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미군기지가 있는 건 말이 안됩니다. 이번 기회에 옮겨가야는데 미군 스스로의 기지이전 계획에 우리가 부담을 해야 하느냐, 이건 슬기롭게 해야겠죠.
홍=예컨대 자주국방 얘기하는데 지금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국이 갖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무기 사들이고 첨단장비 갖추는 게 과연 우리 자주국방 능력입니까. 그런데 국방 라인에선 계속 국방비 증액해서 사들이는 데 관심있지, 체제의 문제, 어찌보면 미군에 편입돼 있는, 종속된 편제 속에 있는 구조적인 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부족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가 외교 안보 국방에 어떤 마스터플랜이 있는가 의심이 들게 됩니다.
임=그래도 그런 방향으로 70년대 중반부터 노력해왔죠. 율곡사업 등 통해 군 구조도 바꿔나가고. 70년대 중반에 비한다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선 많은 문제가 물론 남아있어요. 참여정부가 말하는 자주국방은 그런 측면이 아닌가 싶은데, 이건 쉽지 않습니다. 혼자 할 수는 없고, 미국과의 관계가 있으니까요.
홍=과연 한국의 파워엘리트에게서 미국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거나 미국과 대등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기대할 수 있는지 회의적입니다. 세계관이나 가치관,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종속적인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외교 안보 통일분야의 엘리트들은 미국의 자장 속에서 커온 사람들입니다. 남북간의 긴장이 그들의 힘의 원천이라는 거죠. 여기에 수구언론이 같이 연동되고요.
임=현실적으로 미국은 우리나라에 굉장히 중요한 나라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유일강대국이라서가 아니라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라도 러시아, 중국, 일본에 둘러싸여 있는데 멀리 있는 미국이 가운데 있어서 균형 잡아주는 게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적 사고를 갖고 굴욕적인 입장에 서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임 전 특보를 보면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부드러운 듯 하지만, 자신의 원칙에 대해선 흔들림이 없었다. 고집도 있어 보였다. 15년간 한반도 평화의 길을 이끌어온 힘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과 수많은 토론을 했지만 “물어봐도 내가 워낙 문외한이니까” 단 한번도 정치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국정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총선을 치뤘다. 그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이 국회정보위에서 “사설탐정까지 고용해서 알아봤는데도 이번 국정원은 정말 총선에 개입을 안했다”라는 말을 했는데 여당의원들은 언짢은 표정이더라며 웃었다.
[한겨레]2004/02/03
정리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