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7/31][리영희교수]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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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
-1999년 6월 15일의 서해상 남북 해군 충돌 배경의 종합적 연구
리 영 희(한양대학교 대우교수)
<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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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 : 상황적 배경의 이해
2. 정전협정의 합법적인 "분계선"과 관할 "구역"
3. 서해5도 "북방한계선" 및 "군사완충지대"의 법적 성격 및 지위 문제
4. 정전협정상 유일한 "분계선"과 관할"구역"
5. 서해5도의 정전협정상 성격 및 법적 지위
6. "서해군사북방한계선"의 전신(또는 근거)으로 주장되는 소위 "클라크라인"의 실상
7. "북방한계선"의 생성 배경, 그 동기て목적て성격て효과
8. 한국측(국방부) 견해와 주장의 문제점들
9. "북방한계선"은 남한의 "영해"가 아니다
10. 남북기본합의서 제11조와 그 부속합의서 제9조 및 제10조의 해석차
11. 잠정적 결론 종합
12. 결론과 제안 |
1. 서문 : 상황적 배경의 이해
1999년 6월 11일과 15일 사이에 한반도 서해상 남북경계 연평도 동북방, 옹진반도 남단 구월봉 남방 해상에서 발생한 남북한 해군의 무력충돌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 정 체결 이후 최대규모의 불상사이다. 이번의 해군 교전은 우발적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쌍 방의 치밀한 계산과 준비를 거친 군사력의 행사였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중대한 사건이다. 정전협정 발효 후 46년 뒤에 일어난 이번 해군충돌의 순수 군사적 결과는 북한 해군함정 침 몰 1척, 대파 3척(북측 공식발표), 남한 해군함정 경미한 손상 3척(남측 공식발표)인 것으로 알려졌다. 몇 분 사이에 침몰한 북한함정 승무원 20∼30명이 배와 함께 사망한 것으로 남측 군당국의 비공식 발표가 있으나, 북측의 공식발표에는 병력손실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확정 할 수 없다(99년 7월 20일 현재).
정전협정 발효 이후에 발생한 쌍방간 주요 군사충돌은 이 번을 합쳐서 일곱 번이며 그 각 상황은 다음과 같다.
、 1967. 1. 19 : 남한 해군 구축함 제56호, 동해안 휴전선 부근 북측 육지 근접 지점에서 북쪽 해안포와 교전, 침몰, 승무원 사망 11, 부상 30.
、 1968. 1. 23 : 미국 전파통신 수집용 최첨단 첩보함 푸에블로(Pueblo)호, 북한 원산(元山)앞 영해(12마일) 침해, 나포됨. 영해침해 시인후 12월 23일, 승무원 82명 석방. 스파이함 은 불반환.
、 1968. 11. 2 : 남한 동해안 울진て삼척에 북한 무장 게릴라 부대 침투, 서울 청와대 지근 거리까지 접근 성공, 교전("김신조 부대 서울 침투 사건"). 체포 5명, 자수 2명, 사살 1백여 명, 남측 군인 사상 70명이라고 발표됨.
、 1969. 8. 17 : 미국 육군 헬리콥터 중부 휴전선 월경, 영공침공으로 격추됨. 미국측의 영 공침공 사실 시인 후 승무원 2명의 시체 인도.
、 1969. 4. 15 : 미국공군 고공 첩보정찰기 EC-121기 북한 함경도 영공 침공(?)으로 북한 공군기에 의해 격추.
、 1976. 8. 18 : 비무장지대상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미군て북한군 충돌, 미군장교 2명 사망. 공동경비구역 내에 있는 미루나무를 미군측이 사계청소를 위해서 도끼로 자르다 가, 그것을 말리는 북한군과 충돌한 사건.
、 1999. 6. 15 : 연평도 북서방 해상에서 남북 해군 교전.
이상의 주요 군사적 충돌 7건 중, 북한-미국간 사건 4건, 남-북한간 사건 3건이며, 지상 2 건, 공중 2건, 해상 3건으로 분류된다. 무력충돌 발생의 시기적 상황의 특성으로 분류하면, 한국구축함('67), 미국 푸에블로호('68), 북한특공대 청와대 기습('68), 미국 육군 헬리쓼터 ('69), 미국 EC-121첩보기('69) 등의 사건들은 미국의 베트남전쟁 최절정기와 남한군대의 베 트남전쟁 개입 및 참전기간('66∼'75)에 한반도 주변 및 남북한사이에 조성된 미국て북한て남 한간 일촉즉발적 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소위 "미루나무 살 인"사건은 그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1976년까지의 사건들의 직て간접적 원인이 미국의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월남파병"이었던 것과는 달리, 99년 6월의 남북한 서해상 해군교전은 그 원인이 4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53년(7월 27일)에 조인て발효한 정전협정의 불확실성과 협정의 합의조문에 대한 남북한의 해석차(또는 일방적 왜곡)에 기인한다. 그런 까닭에 이번 해상교전은 그 정전협정의 원천에 돌아가서 엄정한 사실규명을 해야만 시비를 가리고 분쟁점을 바로 잡아야만 앞으로는 이같 은 군사충돌의 재발을 예방할 수 있다. 남북한 각기의 주장은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데서 끝 나는 것이 아니다. 이 불행한 사태의 원인て과정て결과에 관해서 쌍방은 전적으로 자기합리화 를 고집하고 있다. 우리 남쪽의 경우 심지어 일부 몰지각하고 선동적인 신문て방송て기자て평 론가들이 아무런 사실인식의 근거도 없이, 북한 해군함대의 "한국(남한) 영해 침범"이라고까 지 외쳐댔다. 정부(군사)당국조차 "영해 침범"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데, 문제의 전체적 맥 락이나 구조에 대해서 무지한 신문인들과 소위 "전문가"를 자처하는 지식인て교수들이 오히 려 "한국의 영해 침공"이라고 대서특필하고 방송 텔레비젼에서 국민감정을 선동하고 있다. 이같은 한국의 소위 "언론(인)"의 작태는 지난 냉전て반공주의て반평화 군사독재 시대의 무책 임성과 어용성과 경박성을 조금도 청산하지 못한 "반공 선동주의"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이 글의 본론에서 전체상을 상세히 분석하고 서술하겠지만, 이번 해상에서의 남북 함대간 교전의 성격은 "북한의 계획된 도발" 또는 "영해 침범"이라는 한 마디로 단정하여 모든 위 법과 책임을 한 쪽에 돌려씌우고 끝나는, 그런 단순て명료한 사건 구조가 아니다. 비무장지대 의 어디에서 총성이 울리거나 충돌의 소식이 들리면, 우리 정부(군부)て"언론"은, 그리고 그 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부분의 국민은, 50년간 길들여진대로,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또 북한공산도당이 저지른 악랄한 휴전협정 위반행위!"로 단정하고 흥분하고 규탄해 왔다. 이번 서해상 해군 충돌의 전체 과정을 통해서도 그러했다. 이같은 국민정서는 언제나 사건 과 사태의 진상규명을 스스로 거부하는 위험한 고정관념이다.
전문적て객관적 관점과 남북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는 독립(중립)적 관점에서 보면, 남북한 간의 행위는 거의 예외없이 서로 원인을 주고 받는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의 연쇄적 성격임을 알 수 있다.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의 충돌이 가장 적합한 실례이다. 사태의 전모를 철두철 미하게 검증해 보면 어느 한 쪽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남북한 어느 한 쪽은 전적으로 결백하고 다른 쪽은 전적으로 위법자라는 식의 간편하고도 행복한 도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선량한 남한 시민들에게는 심정적으로 불편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북한 에 대해서 언제나 자기 국가의 행위의 결백성이나 도덕적 우월성을 믿고 싶고, 또 억지로라 도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한 "광신적 극우て반공주의자"들도 많을 것이다.
이번 서해상 남북 해군 교전의 단순명료한 일방적 위법성과 책임을 주장하고 싶거나 그렇 게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눈에 낀 안개를 벗겨 줄 좋은 통계적 근거가 있다. 정전 협정이 발효한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부터 지금(정확하게는 1998년 6월말까지)까지 군 사정전위원회에 등재된 남북 각기의 "정전(휴전)위반 현황"을 알면 남북간에 일어나는 문제 의 가려진 진실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통계를 보면 북한측 위반건(件)수는 다음과 같다(총 42만 4천356건).
<표 1> 북한의 휴전협정 위반 현황
구분 |
계 |
지상 |
해상 |
공중 |
휴전이후∼1960
1961∼1970
1971∼1980
1981∼1990
1991∼1997
1998∼6월말
합 계 |
628
7,544
49,414
359,669
36,867
234
424,356 |
538
7,476
49,371
329,659
36,865
233
424,142 |
11
57
26
7
2
1
104 |
79
11
17
3
0
0
110 |
출처 : 박헌옥, [북한의 휴전협정 위반 반세기], 한국군사학회, {군사논단}, 통권 제16호, 1998년 가을호, p.24.
한국(남한)측의 결백성과 북한측의 상시적 협정위반 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연구자는 남쪽(미국+한국=유엔군)의 위반현황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편, 북한측이 인정한 협정위반건수는 단 2건에 불과한 반면, 1991년까지 유엔군측의 휴전 협정 위반이 454,605건(45만 4천 605건)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엔군측 실제 위반건수는 16 건으로 알려졌다.
간추려 말하자면, 북과 남이 시인한 위반 건수는 각기 2건과 16건이지만, 서로가 상대방이 위반했다고 군사정전위원회에 제기한 정전협정위반 건수는 각기 40여만건으로서 막상막하임 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자는, "…결국 북한이 한국전쟁을 도발했고, 패전 으로 체결된 휴전협정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상습적이고도 의도적인 크고 작은 도발을 계속해 온 점은 한국안보에 위협을 가중시킨 것임에도 한반도의 평화정책과 민족통일을 지 연시킨데 대한 책임을 민족앞에 지지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고 단정하고 있다. 남북 쌍방 의 엄청난 정전협정 위반 사실의 상세한 내역을 눈앞에 놓고도 이같은 일방적 결론을 도출 하는 것이 한국의 정부(국방부)て소위 "전문가"들과 맹목적 "애국자"들의 경향성이다. 하물며 아무런 정보도 갖지 않은 일반 지식인들, 오로지 정부 당국들의 발표만을 곧이 곧대로 믿는 데 길들여진, 또는 심지어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이 나라의 남녀노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서해상 해군 충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상에서 검토한 약간의 사전지식, 또는 "진실"을 알고자 하는 객관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론에 들어가자.
2. 정전협정의 합법적인 "분계선"과 관할 "구역"
정전협정은 남북의 교전당사자(군대)를 분리하여 "무력행위의 완전한 정지"(서문)를 보장 하는 분계선과 지역(공간) 설정을 4개 항목으로 나누어 규정하고 있다.
1) "쌍방"이 승인한 구역 또는 수역의 해석
1. 지상(地上)의 군사분계선(線) 및 비무장지대(地帶)(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의 육지 공 간:DMZ) : 제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1, 2, 3, 4항은,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의 지 상 약 250㎞ 길이의 "휴전선"과 그 남북에 협정상 각기 2㎞의 폭을 가지고 설정된 비무장지 대(DMZ)라는 "완충지대"에 관해서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이들 지상의 규정들은 이번의 서해상 해군 교전과는 무관함으로 본론에서는 생략한다).
2. "한강하구 수역"이라는 남북공용의 특수 구역 : 한강이 서해에 유입하는 "한강하구(漢江河口) 수역"은 정전협정의 "제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제5항에 의해서 남북한 쌍 방의 민간선박(주로 어선)에게 그 이용이 개방되어 있다. 이 규정의 성격은 육지상의 비무장 지대가 남북의 민간이용을 금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 협정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제5항 : 한강 하구의 수역으로서 그 한쪽 강안(강기슭)이 다른 일방의 통제하에 있는 곳 은 쌍방의 민간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 첨부한 지도(제2도를 보라)에 표시한 부분의 한 강하구의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원회가 이를 규정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해함에 있어 자기측 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
<그림 1>(정전협정 첨부지도 제2도)에서 보듯이, 남북 민간선박이 자유항행て이용할 수 있 는 이 특수구역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동쪽)에서부터 다시 한강이 되어, 강화도 (江華島) 북변과 북한의 황해도의 예성강이 만나서 넓은 한강하류 수역을 형성하여 넓어지 면서, 북쪽의 굴당포 끝과 남쪽의 작은 섬 불음도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선으로 둘러싸인 구 불구불한 모양의 남북간 수역이다.
<그림 1> 정전협정 첨부지도 제2도
이 규정은 그런 용어나 표현으로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한강하류에서 황해에 접하는 남북 한 사이의 수역은 일종의 "국제수로(international water ways)" 성격으로 규정하였다. 이 서해안 한강하구 수역내에서 남북한의 민간 배들은 일종의 "자유통행권(right of free passage)" 또는 "무해통행권(right of innocent passage)"을 인정받고 있다. ▦구역은 정전협 정 조인 당사자 "쌍방이 공인"하고 또 "쌍방이 관리하는 구역으로 구정되었고, 지금까지 40 여년간 그렇게 유지되었다.
이 "쌍방"이라는 용어가 중요하다. 육지상에서의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제외하면, 서 해바다에서 이 "한강하류 수역"만이 북한과 유엔군 총사령관의 "쌍방"이 인정て합의하고 "쌍 방"이 "함께" 관리해온 수역이기 때문이다. 이번 남북한 해군 충돌 후에 우리 정부(국방부) 당국자들이나 언론계의 어떤 식자들은 이른바 "북방한계선"과 그 선을 따라서 남쪽에 한국 측이 설정한 "완충구역"이나 "어로한계선"을 북한측이 1991년 12월 13일에 조인한 "남북사 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て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합의서)"의 "부속합의서" 제3장 "불가 침 경계선 및 구역" 제9조와 제10조에서 인정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옳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남북합의서 "부속합의서"에서는 정전협정에 관하여 어느 "한 쪽"의 행위나 결정을 적시할 때는 그 상황의 경우에 다라서 "일방", "자기측", "상대측(또는 상대방)"으로 표기하고, 협정당사자 또는 남북이 "함께"인정했거나 함께 관할했거나 하는(해 온) 일을 적시할 때는 반드시 "쌍방"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용어의 엄격한 구분은 남북합의서의 부속합의서를 작성하는 협의과정에서, 북한쪽이 정전협정상의 쌍방(유 엔군 총사령관과 북한て중공군 사령관)이 "함께" 인정하고 합의하여 조문화한 결정사항으로 써 함께, 즉 "공동"으로 관리해 온 일만을 "쌍방이 지금까지 관리하여 온" 선 또는 구역으로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한쪽"과 "양쪽"을 엄격히 구분한 이 용어의 뜻을 한국(남한)측 대표 들이 인식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북측은 "북방한계선"은 남한이 "자기측" 또는 "일방"으로 설정한 선이지 정전협정상의 "쌍방"의 개념에 해당하지 않은 선 또는 구역으로 주장하는 것 같다. 이 협정용어의 분별적 사용은 이번 해군충돌과 "북방한계선"의 협정상 효과를 가르는 핵심적 기준이 된다는 중대한 사실을 많은 논자들이 간과하고 있다. 어느쪽 해석이 옳은가? 의당 남한(한국)쪽의 편을 들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유엔군총사령관(미 국)은 남북해군 충돌 이후 남한쪽에 유리한 성명이나 공식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미국(유엔 군 총사령관)의 이런 태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심각하게 음미해 볼 일이다.
2) 분계선의 성격
서해안의 유일한 남북분계선 "Aて가―Bて나"선의 성격과 문제 : 정전협정에서 한국의 서해 안 하면에 "쌍방"이 합의하여 그은 "분계선"과 쌍방이 "함께" 관리해 온 선(線)은 정전협정 제2조(정화(停火)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들)의 제12항 (b)에 의해서 그어진 "Aて가―Bて나線" 이다.
이 선은, 위의 1부에서 검토된 서해안의 "한강하구 수역"의 남북한 사이의 대체로 중앙선 을 따라서, 강화도, 석모도의 서쪽 약 30㎞의 거리에 있는 우도(隅島)까지를 연결하는 선이 다(지도 제2 : 정전협정지도 제3도를 보라). 정전협정 첨부지도의 유엔(미국)측 지도상에는 "A―B"로, 조선인민군측 지도상에는 "가―나"로 표시돼 있는 이 선은 육지의 군사분계선과 같은 서해안의 군사적 해상분계선이 아니다. 이 사실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 "Aて가―Bて나"선은, 정전협정 제12항(b)에서 서해안 한강하류 공용 수역에 산재하는 수 없이 많은 작은 섬들에 대한 통제권을 유엔군과 북한쪽으로 구분하는 기준선으로서 설정된 것이다. 위의 1항에서 검토했듯이, 한강하구 공용수역(▦)안에서 이 선은 남북의 민간선의 자유항행이 인정되기 때문에, 육지의 군사분계선과 같은 분리(分離)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우도에서 한강하구 수역의 끝인 황해도(북쪽)의 마항동과 남한쪽의 볼음도를 연결하는 직선 부까지의 "하구수역"밖의 길이는 약 13㎞이다.
이 Aて가―Bて나 중 약 13㎞에 해당하는 선은 북한 황해도와 남한 경기도의 도(道)경계선 으로서, 그 선의 남과 북쪽에 있는 수많은 작은 섬들의 관할권을 표시하는 선일 뿐, 아무런 해상에서의 "군사적 분계선"의 기능이 없다(정전협정 첨부지도 제3도에서 Aて가―Bて나선의 성격과 기능을 명시한 단서).
이 황해도-경기도 도분계선과 한강하류 민간선박 자유항행 구역이 정전협정상 서해안과 서해 해면에 "쌍방"이 설정하고 "함께" 운영해온 유일한 "선(線)"과 "구역(區域)"이다.
3. 서해5도 "북방한계선"과 "군사완충지대"의
법적 성격 및 지위 문제
1999년 6월에 발생한 남북한 해군의 서해상 전투에 대해서 남북한의 주장은 서로 정반대 로 다르다. 남한(한국)당국의 공식 또는 비공식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우도-연평도-소청도-대청도-백령도를 연결하는 해상의 선(線)은 북한 함정 또는 어선이 넘어올 수 없는 "군사분계선"이다.
(2) 그리고 그 남쪽으로 평균 약12㎞ 폭의 해역은 남북간 "군사완충지대"이다.
(3) "북방한계선"은 6て25 전쟁중에 유엔군이 설정한 군사분계선인 "클라크라인"을 그대로 따른 선이 다.
(4) 북한은 그동안 "묵시적"으로 북한한계선을 인정해 왔다.
(5) 북한은 1992년에 체결된 [남북합의서]에서도 쌍방이 관할하는 "지역"을 인정한다고 했다.
(6) "북방한계선"은 지난 40여년간 사실상의 남북간 서해 해상분계선의 후력과 기능을 하고있다.
(7) 국제법적으로 "실효성"의 원칙과 "응고"의 원칙에 의해서 수용되고 있다. 따라서 북방한계선과 완충지대를 넘는 행위는 불법적 침범행위이다.
(8) 따라서 이번 연평도 서북방 해상에서의 한국해군의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합법적 자위권의 발동 이다.
이상의 내용이 이번 사건에서 대체로 한국정부(국방부)를 대표하는 국방부대변인의 공신 견해이자 기타 정부당국들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해군충돌이 있은 해상 부근을 "우리의 영해"라고 주장하고, 남한측의 주장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우리 함선들을 상대로 한 무장도발이며 군사적 도전"이라 고 규정하였다(사건발생직후의 평양방송보도, 판문점 조て미 군사장성급 회담, 북경에서의 남 북정부 차관급 회담 등에서의 성명).
이처럼 남북의 주장은 어느 한 항목에서의 합치점도 없이 전면적으로 상치하고 대립하고 있다. 북한측은 남한측 국방부대변인 성명으로 대표되는 한국(남한)정부의 주장들을 전적으 로 부인할 뿐만 아니라 남한측이 주장하는 이른바 "북방한계선"과 "서해 해상군사완충지대" 가 중대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남한의 일방적 결정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 분쟁지 해역 은 북한의 "정당한 영해"(국제법상의)임을 내세우고, 북한 어선과 함정의 그곳에서의 작업을 방해て공격한 남한 해군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무장 도발"이라고 규탄했다. 따라서 이같 이 정면대립하는 주장과 해석들의 정당성 여부가 우선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인식 을 바탕으로 해서 남북의 정치て군사적 태도수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전향적 사고와 이성적 노력이 없이, 서로 자기쪽의 해석과 주장만을 고집한다면, 남북한 사이에는 앞으로도 99년 6 월의 군사위기가 거듭될 것이다. 그같은 무력충돌이 연속될 경우 "전쟁"으로 확전되지 않는 다는 보장은 없다.
4. 정전협정상 유일한 "분계선"과 "수역"
이번 무력충돌은 서해상의 도서て선(線)て구역(區域) 등의 개념에 관한 해석의 차와 주장의 대립이 빚은 결과적 불상사이다. 정전협정에서 이 쟁점들에 관한 조문은 제2조 [정화 및 정 전의 구체적 조치] A. 총칙, 13항 (b), 15항 및 13항 (b)의 첨부지도(그림 2 ; 정전협정 첨부 지도 제3도)에 기재된 추가적 합의내용의 세가지의 규정들이다(한강하구 도분계선과 개방수 역에 관해서는 위에서 검토하였다). 정전협정 규정의 전체 구조와 규정 내용을 정확히 이해 하려면 13항 (b)의 전문을 알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13항 (b)의 협정문장을 내용별로 항목화하여 세분해 본다.
(1) 정전협정 발효 후 10일 내에 쌍방은 상대방의 후방て연해도서 및 해변으로부터 병력て장비て 물자를 철수한다.
(2) 이를 이행치 않을 때는 상대방은 그 영역에 대한 치안유지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리를 보유한다.
(3) "연해도서"의 정의는 정전협정의 발효시에 어느 쪽이 점령하고 있었느냐와는 관계없이 (전 쟁발생 전날인) 1950년 6월 24일에 각기가 통제하고 있던 섬들을 말한다.
(4) 다만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道)경계선의 서て북쪽에 있는 모든 섬들중에서 백령도て대청도て 소청도て연평도て우도의 다섯 섬은 유엔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둔다. 그 해역에서 그밖의 모든 섬들은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둔다.
(5) 서해안에서 위에서 말한 분계선 남쪽에 있는 섬들은 유엔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둔다 (그림 2).
<그림 2> 정전협정 첨부지도 제3도
정전협정 제2조 제13항 (b)에서 규정된 서해5도
위의 다섯 가지의 합의된 조치사항을 알기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3년 2개월간의 전쟁이 끝났을 때, 서해상의 웬만한 섬들은 압도적인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유엔군의 점령 또 는 관제하에 있었다. 그러나 정전협정에서는 협상과정에서의 치열한 논란 끝에 해상의 섬들 의 통제권은 (1) 정전발효 당일(1953. 7. 27)의 실제적 점령 또는 관제상태로 귀속되지 않고, (2) 3년 2개월 전의 전쟁발생 전날(1950. 6. 24)을 기준으로 하고, (3) 그 분계선은 원칙적으 로 그 과거 시점에서의 황해도-경기도 도분계선(그림 2의 "Aて가―Bて나"선)으로 하되, (4) 다만 북한의 황해도 해안에 가까운 도서들은 유엔군이 포기하지만, 그 중에서 큰 섬 백령도 て대청도て소청도て연평도て우도의 5도서만을 그대로 유엔군 통제하에 두기로 합의하고, (5) 그 밖에 황해도-경기도 도분계선을 기준으로 남한의 육지에서 가까운 서해안 한강하구에 산재 하는 섬들은 유엔통제하에, 그 선의 북쪽에 있는 섬들은 북한통제하에 두기로 한 것이다(지 도를 세밀히 참고해 보아야 이해가 간다). 이 부분의 정전협정 합의규정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서해안 수역의 분계선이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경계선이라는 사실이다. 그 도경계선은 한강하구 수역(▦)끝에서 우도(북위 37°36′, 동경 125°58′)까지며, 우도(Aて 가)에서 끝난다는 사실이다. 이 경계선의 길이는 강화도에서 직선거리로는 36㎞에 불과하다. 우도에서 끝나는 도경계선 이외에는 정전협정상 쌍방이 인정하고 쌍방의 합의로 설치된 선 이 없다. "북방한계선"의 문제를 이해하려면 이 사실을 토대로 해야 한다.
5. 서해5도의 정전협정상 성격 및 법적 지위
이 문제에 관해서는 먼저 현재 한국해군(유엔군)의 통제하에 있는 서해5도의 지리학적 위 치て크기て북한과의 인접거리를 알 필요가 있다. 연평도의 경우는 가장 가까운 북한영토의 섬 에서 불과 4㎞의 거리에 자리하고 있고, 황해도 옹진반도의 끝에서부터도 국제해양법상 영 해 거리인 12마일(약 20㎞)의 절반밖에 안되는 지근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참고로 인천항에 서 백령도까지의 거리는 180㎞가 넘는다. 이처럼 서해5도는 그 전부가 북한의 황해도의 해 안선을 남서(南西)에서 완전히 포위한 위치에서 국제해양법 규정의 북한 영해 안에 놓여 있 다.
<표 2> 북한영토와 서해5도의 거리
섬 |
위치 |
면적 |
육지와의 거리 |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
37˚58´n, 124˚40´E 37˚50´n, 124˚42´E
37˚46´n, 124˚46´E
37˚38´n, 125˚40´E 37˚36´n, 125˚58´E |
47㎢ 25㎢
6㎢
7.4㎢ 0.2㎢ |
장산곶에서 17㎞
월내도에서 12㎞
하련도에서 19㎞
하련도에서 15㎞
웅진반도에서 12.6㎞
미력리도에서 4㎞
하련도에서 9.8㎞ |
1) "서해5도"의 정전협정상의 특이한 성격
기하학의 초보적 공리의 하나인 점(點)은 "위치는 있으나 크기는 없다"가 바로 서해5도에 해당된다. 정전협정 제2조 13항(b)에서 그 군사적 통제권의 소유가 규정된 이 섬들에게는 별도 규정으로 특수한 성격적 제한이 가해져 있다.
미군(유엔군)て북한인민군て중공지원군의 총사령관은 이 섬들의 소속통제권을 규정한 뒤에, 지도상의 확정작업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주(註)"의 형식으로 엄격한 별도의 단서를 붙였 다.
첨부한 지도 제3도
조선 서부연해섬들의 통제
(제13항 遁목을 보라)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가-나선)북쪽과 서쪽에 있는 모든 섬 중에서 하기한 다섯(5)도서 군들을 제외한 기타 모든 섬들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의 군사통제 하에 둔다.(5개 섬의 위치 : 동경, 북위, 도분 표시)
상기 다섯(5) 도서군들은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둔다. 한국 서부해안에 있어서 상기 경계선 이남에 있는 모든 섬들은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둔다.
(주1) 상기계선(가-나선)의 목적은 다만 조선 서부연해섬들의 통제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선은 아무런 다른 의의가 없으며 또한 이에 다른 의의를 첨부하지도 못한다(The purpose of the line A-B is solely to indicate the control of coastal islands on the west coast of Korea. This line has no other significance and none shall be attached thereto).
(주2) 각도서군들을 둘러싼 장방형의 구획의 목적은 다만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두는 각도서군들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방형의 구획은 아무런 다른 의의가 없으며 또한 이에 다른 의의를 첨부하지도 못한다(The rectangles which island groups are for the sole purpose of indicating island groups which shall remain under the military control of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These rectangles have no other significance and none shall be attached thereto).
(주1)에서 가(A)―나(B)선의 성격은 앞에서 이미 검토했듯이, 경기도-황해도 도경계선으 로 육지에 가까운 서해연안의 많은 섬들의 남북 통제권을 명시하는 선일 뿐, 그 선을 연장 해서 또는 접속시켜서 다른 "선"이나 "구역" 일부로 이용할 수 없다는 규정으로 해석된다.
(주2)에는 그림 2(협정 첨부지도 제3도를 보라)에서 보듯이 다섯(5)개의 섬의 둘레에 섬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보이도록 점선으로 된 4각형을 그려놓았다. 이 섬 둘레의 지도 상 점선 사각형은 (1) 섬의 위치를 명시하는 시각적 목적일 뿐, (2) 그 섬들의 밖으로, 섬에 속하는 공간의 면적을 의미하지 않으며, (3) 그 4각형 점선 안의 공간이 어떤 "수역", "구 역", "지대", 또는 "구획" 같은 것을 형성하지도 않으며, (4) 그 점선 4각형을 서로 연결하여 어떤 목적의 "선(線)"을 긋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2) 선으로 연결될 수 없는 서해5도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서해 5도"는 각기가 따로 따로 하나의 기하학적 "점"으로서 유엔군 통제하에 놓일뿐, 군사 목적으로나 어업て산업적 또는 정치적 목적의 선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령도て대청도て소청도의 각기의 거리 6㎞와 4㎞의 바다 공간은 물론, 근 100㎞나 되는 연평도와의 해상공간은 어떤 목적이나 명분의 선으로 연결될 수 없 다. 이 부분의 서해 해역 공간은 정전협정 발효 후 3개월 이내에 참전국가들의 정부급 정치 회담(협정 제4조 제60항)에서 체결될 예정이었던 "평화협정"으로 성격이 결정되거나 국제해 양법의 해석에 넘겨진 것이다.
한국전쟁 참전국들의 정부급 정치회담은 끝내 결렬되어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제 3차 국제해양법회의에서 조인(1982년)되고 94년에 정식 발효된 해양법의 영해(領海)를 비롯 한 어업전관수역, 경제수역 등에 관해서도 남북한간에는 명확한 합의가 없는 것이 오늘까지 의 현실이다. 따라서 이 해역에서의 남북간 권리て의무 관계는 그 간에는 정전협정의 결정과 해석에, 그리고 1992년 이후는 휴전협정과 함께 [남북기본합의서](1992. 9. 17)의 결정て합의て 해석에 따라야 할 것으로 해석된다([남북기본합의서]에서의 이 해석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는 위에서 따로 검토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강하구수역"의 황해도-경기도 도경계선 "Aて가―Bて나선"을 제외하 면, 유엔군(미국)을 포함한 남북한 사이에 합의된 독점적 "수역(水域て區域)"이나 "분계선 (線)"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북한이 1977년에 선포한 50마일 "군사경계수역"이나 남한 이 주장하는 이른바 "서해 군사북방한계선"도 다같이 일방적 선언 및 주장일 뿐이다. 이런 "선(線)"이나 "수역(水域)"은 앞으로 정전협정을 대체할 강화조약(평화협정)과 국교정상화의 과정에서 서로 합의되고 결정될 문제들로 남는다.
6. "서해군사북방한계선"의 전신(또는 근거)으로 주장되는
소위 "클라크라인"의 실상
이번에 남북 해군 함정충돌이 발생한 원인에 대한 한국(남한)측 주장은 북한 어선과 해군 함정이 거듭 "서해북방한계선"을 침범하고 철수요구て경고에 불응했기 때문이라고 발표되었 다(국방부 대변인 성명). 북쪽은 군사적 목적의 그런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함 께, "남조선 괴뢰들"이 황해도의 강령군 쌍고리 남동쪽 "우리 영해"에서 북쪽 해군함정들에 대해 무모한 "군사적 도발행위"를 감행하여 북쪽 함정을 침몰て파괴시켰다고 주장했다.(사건 직후의 평양방송보도).
남쪽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북쪽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남쪽 주장의 군 사적 "북방한계선"과 "남북완충구역"의 법적인 존재 여부가 이번의 해군 무력충돌에 국한하 지 않고 앞으로도 서해 해역의 문제에 관한 시비를 가리는 핵심문제로 제기된다. 남쪽의 주 장은 현재의 "북방한계선"이 한국전쟁시기의 이른바 "클라크라인"의 선과 그 법적 효과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소위 "클라크라인"이란 어떤 것이가? 그것은 우리 측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그림 3> 남한측 주장의 "북방한계선"과 "서해 해상 군사완충지대"
1) 클라크라인의 생성과정, 그 목적과 효과, 그리고 폐기
클라크라인(Clark Line, 1952년 9월 27일 설치, 1953년 8월 27일 철폐)은 한국전쟁 기간중, 1952년 4월 28일부터 1953년 9월 10일까지 미군총사령관 겸 유엔연합군 총사령관의 직위에 있었던 마크 W. 클라크(Mark W. Clark) 미국육군대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51년 7월 10 일, 개성에서 정식회담이 시작된 정전협상이 지지부진하고, 새로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중 공군)의 대공세로 수세에 몰린 미국(미군て유엔군)은, 중공(군)과 북한(인민군)에 대한 외부로 부터의 압력을 강화해야할 필요가 더욱 커졌다. 외부(외국) 무기て물자와 보급て지원て교역을 전면 차단함으로써 미국의 조건에 따르는 정전조건을 최단시일내에 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 는 수단으로서 중공과 북한에 대한 해안봉쇄(Embargo 또는 Blockade)를 실시하고 유엔총회 에
그 승인을 요청하였다.
미국정부(군)의 중공て북한 해안봉쇄안은, 유엔으로 하여금 모든 회원국가에게 통신て전자 제품 가재, 비행장 및 도로건설 자재, 각종 화학물자 및 화학 기재, 발전기 및 발전관련 기 재, 철て금속재 및 그것들의 제조용 기재, 석유(유류) 관련 장비, 정밀제작 기계류, 그밖에 (품목을 명시하지 않은 채) 전반적 공업용 장비 일절의 대 중공て북한 수출 및 중공과 북한 으로부터의 모든 직접 또는 간접적 수출て재수출 및 중계적 방법의 수송 등을 완전 금지케하 고 미국해군함정이 해안봉쇄선 안에 들어오는 외국선박들을 경고て정지て승선て임검て수색て나 포… 등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를 채택케 하려는 것이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 다.
RECOMMENDATIONS FOR EXTENSION OF UNITED NATIONS
SELECTIVE EMBARGO
The General Assembly might recommend that every state prohibit all direct or indirect exports, re-exports and trans-shipments to Communist China and North Korea of communications and electronics equipment, airfield and road construction equipment, chemicals and chemical equipment, electrical and power-generating equipment, metals, minerals and their manufactures, metal-working machinery, petroleum equipment, precision instruments, and general industrial equipment.
사실은 유엔에 대한 중국て북한 해상봉쇄 조치 요청에 1주일 앞서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은 실제적인 봉쇄조치를 취했었다. 이것이 "클라크라인"이다. 하지만 미국정부(군)는 중국본 토 해안에 대해서는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의 반대로 실효 있는 해상봉쇄의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에 북한 해안만 미국해군의 실력행사로 봉쇄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2) 클라크라인의 성격 및 기능
클라크장군(유엔연합군총사령관)의 전략으로 표현된 미국정부의 대 북한 해상봉쇄는 본래 다음과 같은 구체적 조치들을 포함했었다.
1. 어떤 국가의 선적 또는 국적에 등재된 선박이나 항공기도, 자국의 금수 종목의 산물이나 그 물자의 원산지 국가에 의한 금수물자를 막론하고, 어떤 출발점으로부터도 그것들의 공산중국과 북한에 대한 수송을 금한다.
2. 중국정권이나 북한당국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그들 국가의 국민이나 그들 정권 또는 당국의 대행역할을 하는 어떠한 법인이나 행위자에 대해서도, 선박 및 항공기의 판매 또는 임 대를 금지한다.
3. 중국인 또는 북한인의 소유 또는 지배하에 있는 선박들에 대해서는 물론, 자국에 의해서 금 수조치되었거나 그 물자의 원산지 국가에 의해서 금수조치된 일체의 종류의 물자를 적재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모든 선박에 대해서 정박 또는 항만시설て설비의 편이 제공을 금지한다.
4. 제3항에 포함되는 선박과 제1항에 포함되는 물자て상품에 대한 영해て영공관할영역 내에서의 모든 보험 또는 재보험 제공을 금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1. Prohibit vessels or aircraft of its registry from any point to Communist China or North Korea any types of goods embargoed by itself or by the country of origin of the goods.
2. Prohibit the sale or charter of vessels and aircraft to the Chinese Communist regime or to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or to their nationals, or to any person or entity acting for them.
3. Deny bunkering and port facilities to vessels owned or controlled by the Chinese Communists or North Koreans, and to vessels of any nationality believed to be carrying to Communist China or North Korea types of goods embargoed by itself or by the country of origin of the goods.
4. Prohibit the insurance or reinsurance within its territorial jurisdiction of vessels included in paragraph 3 and of cargoes included in paragraph 1.
즉, "클라크라인"은 6て25전쟁 중, 남북한 사이의 해상전투행위의 어떤 분계"선", 완충"선", 또는 완충"지대" 등을 목적으로 설치됐던 선이 아니다. 한국전쟁에 파병하지 않고 있는 제3 국들의 선박과 항공기의 북한 지원て교역て출입 등을 저지하여 공산군의 전력약화를 기하고 상대방에 대해 미국의 안대로 정전협정을 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해상봉쇄선"이었 던 것이다.
3) 정전협정 제2조 14항 규정과 클라크라인의 폐지
북한을 정전협상에서 굴복시키기 위해서 정전협상 도중(1952년 9월 27일)에 일방적으로 설치된 소위 "클라크라인"이라는 대 중공て북한해상봉쇄안은 유엔총회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그 대신 중공에 대한 "침략자 결의"에서 "침략자"에 대한 직접적 지원의 자제를 권고하는 일반원칙의 "권고안"형식이 채택되었다.
클라크라인 봉쇄선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에 대한 제3국의 해상 또는 공중지원 행 위는 미국의 압도적인 제공권과 재해권 하에서는 실제문제로서 불가능했다. 미국정부는 그 같이 이미 실제적으로 단행하고 있던 대 북한 해상봉쇄선(클라크라인)에 대해서 유엔총회 결의라는 국제적 합법성의 명분을 첨가하려 했던 것이다. 해상이나 공중으로 그런 위험을 무릅쓰려는 국가나 개인 또는 법인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또 하나 있다. 이 문제와 관련된 사실과 사태진전에 대해서 우리 국내에서 알고 있거나 지적하려는 전문가는 한 사람도 없다.
클라크라인이 일방적으로 집행되기 시작한 지 10개월 후에 정전협상이 끝나고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협정의 "제2조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A 총칙, 15항"으로 미국(유엔 군)과 중공て북한은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2조 15항 : 본 정전협정은 적대중의 일체의 해상군사력에 적용되며, 이러한 해상군사력은 비 무장지대(육지)와 상대방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조선의 육지에 인접한 해면(海面)을 존중하여, 조선에 대하여 어떠한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한다.
북한은 정전협정 조인(53. 7. 27) 그 날까지도 북한의 전체 해안을 실제적으로 봉쇄하고 있던 미국에게 협정 발표 후의 그 해안봉쇄의 불법て부당성을 지적했다. 미국은 그에 동의한 것이다. 이것이 휴전협정 제2조 15항의 합의이다. (16항은 공중영역에 관한 같은 합의 규정).
이 합의 규정에 따라서 클라크 유엔(미군)총사령관은 정확히 협정발효 1개월(30일) 뒤인 1953년 8월 27일에 자신의 이름으로 설치를 발표했던 "클라크라인"의 철폐를 발표했다. 이 것으로 북한 "해상봉쇄선"으로서의 이른바 "클라크라인"은 1952년 9월 27일 발표일부터 철 폐된 53년 8월 27일까지 11개월간의 존재를 마감하고 소멸됐다. 이로써 6て25전쟁 기간 중 남북한 사이의 바다에 그어졌던 경계선 또는 분계선은 정전협정 제2조, A. 총칙, 15항의 규 정으로 사라진 것이다.
7. "북방한계선"의 생성과정, 그 동기て목적て성격て효과
1) 리승만 대통령의 정전협정파기 및 한국전쟁재발구상
리승만 대통령이 두만강-압록강선까지의 전쟁확대를 고집하면서 미국(유엔군)의 휴전협상 노력을 끈질기게 방해한 정책과 행위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트루만 대통령의 후임인 아이 젠하워 대통령 후보는 한국전쟁의 조속한 정전과 미군의 대폭 철수, 대체로 38도선에 해당 하는 전투선에서의 정전을 선고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다. 대통령선거 당시 미국민의 66%가 당장 휴전, 미국철수에 찬성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온갖 고난 끝에 정전을 이 루고 정전협정을 성립시킨 마당에, 협정 발효 뒤에도 계속 "북진통일"을 외치고, "두만강-압 록강"선까지의 전쟁 재개를 요구て위협하는 리승만 대통령을 회유て무마て협박하는데 형용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리승만 대통령은 공식적て비공식적으로, 공개적て비공개적으로, "한국(남한)군에 의한 단독 적 휴전선 돌파, 대북한て중공군 공격, 북한공산정권 및 국가의 군사적 타도, 두만강-압록강 선의 실지회복, 통일달성"을 언명하고 계획했다. 리승만 대통령의 심사와 계산은, 아무리 미 국국민과 정부가 다시는 한반도에서의 전투나 군사게임을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명 령하에 한국군이 지상에서 휴전선을, 또는 해상에서 황해도 해안을 공격て상륙て진격하면, 미 국은 결국 자신이 일으킨 새 한반도전쟁에 다시 개입해 들어올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정전협정 제4조 60항 합의에 따라, 협정발효 후 90일내에 정치회담을 열어서 통일문제를 논할 때까지만이라도 협정파괴와 전쟁재발 행위를 삼가해 달라는 미국정부의 호소는 리승 만 대통령에게는 오히려 미국의 약점으로 비쳤다. 정전협상 기간에 노골화된 리 대통령의 휴전반대, 군사적 분쟁 야기 위협, 정전협정 조인 전て후에 이를 저지하려는 한국군의 북한군 공격계획, 협정 발표 후에 정치회담 개시와 그 기간 중에 들어난 그의 군사적 도발적 발언 과 행위는 2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한국정부와 한국군의 행위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미국군 부て정부를 격노케 하였다. 그런 한て미간 긴장사태는 드디어 리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 및 군에 대한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 자신의 일종의 "최후통첩"격인 노골적인 협박으로 잠시 무마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리승만 대통령에 보낸 극비 친서
와싱톤,
1953년 11월 4일,
극비(Top Secret)
…(자신이 한국에 있는 미국과 유엔참전국들의 군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야 할 중대한 책 임, 공산주의자들이 정전협정 위반시는 자신은 당연히 그들을 응징하는 군사행동을 취할 것이 라는 등의 결의를 표명한 다음)…그러나 만약 귀하가 독단으로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행위 를 결심한다면 나는 귀하에게 대한민국 군대는 참담한 괴멸적인 패배를 당할 뿐만 아니라 기 능할 수 있는 군사집단으로서는 영원히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본인의 확신을 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우리의 군사지도자들이 (정전발효 후의) 적절한 계획들을 수립할 수 있도록 귀 하가 본인과 뜻을 함께 할 용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고자 한다.
정전협정을 서명함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반도)에서 어떤 군사적 분쟁의 재발도 원치 않음을 서약하였다. 우리는 그 협정의무를 전적으로 이행할 결심이다. 더구나 강조할 일은, 대한민국군 대(부대들)에 의한 어떠한 군사적 적대행위의 재발에 대해서는, 미국은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건 그것을 돕는 행위로써 정전협정의 규정て의무를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그것을 위반하 거나 회피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만약에, 상대방 공산군 쪽에서는 정전을 성실히 이 행하는데 귀하가 군사적 행동을 계획한다면, 본인으로서는 주한미국군대와 유엔참전국들의 군 사력으로 하여금 그런 사태에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막고 그 군인들의 생명안전을 보장하 기 위해서 요구되는 가장 적절한 방법과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 아주기 바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But if you should decide to attack alone, I am convinced that you would expose the ROK forces to a disastrous defeat and they might well be permanently destroyed as an effective military force. Therefore, I must know whether or not we are to stand united so that our military leaders may make appropriate plans.
In signing the armistice, the United States has pledged itself not to renew hostilities in Korea. We mean to carry out that commitment fully. Moreover, we will not directly or indirectly violate or evade that commitment by assistance in any form to any renewal of such hostilities by ROK forces. If you were to plan to initiate military action while the Communist forces are complying with the Armistice, my obligation as to both United States forces and other United Nations forces would be to plan how best to prevent their becoming involved and to assure their security.
미국정부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전협상 과정에서 이미 리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 또는 그의 명령하에 한국의 육해공군이 휴전선 넘어 북한을 침범하여 정전협정이 깨질 위험을 심 각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국정부와 유엔군사령관은 이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비해서 리 대통령과 한국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수립해 놓고 있었다. 미국(유엔군 총사령부)은 2년반에 걸친 정전협정 협상을 통해서, 정전협정을 준수하려는 공산국(중공て북한)측의 성실성을 확신 한 것 같다. 그와는 반대로 미국은, 정전협정의 이행과 한반도에서의 평화가 남한에 의한 대 북한 군사도발로 깨어질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정전 수립 후에 남한군이 지상의 비무장지대 를 넘거나 서해에서 서해5도를 기점으로 북한 서해 연안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남한 해군의 군사행동의 한계선을 그어야 할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같은 사실들은 훗날의 서해5도의 법적지위와 남한이 주장하게 되는 "북방한계선"이라는 "선"의 생성과정과 성격 및 목적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국전쟁관계 미국정 부내 극비문서집"에는 거의 200페이지에 걸쳐서 남한군대의 북한공격 위기조성 문제를 논하 는 수많은 최고 기밀문서가 들어 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은 평가였다.
특별평가보고서와 SF-48,
와싱톤,
1953년 10월 16일,
리(승만)은 현상태에서 자기가 공산군에 대한 일방적 군사행동을 개시하더라도 미국으로서는 자신의 행동을 저지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뿐이 아니라 더 고약 한 사실은, 리(승만)는 자신의 군사공격으로 공산측의 대규모의 군사적 대응행동이 발생하더라 도 미국으로서는 한국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 미국이 별 수없이 전쟁에 끌려 들어 올 것이라는 가능서이 몇 천분지 일이라도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리(승만)는 미국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라도 자기를 전면적 으로 지원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런 행동을 감행할 것으로 확신한다. 그 반대로, 만약, 자기가 시작한 한국에서의 전쟁재발에 미국을 끌여들일 수 없으리라고 깨닫게 되면 그 때는 공산측에 대한 일방적 군사공격을 단념하리라고 믿어진다. 군사공격 개시의 희망이 사라지면 그는 (정전협상에서 합의한) 앞으로의 정치회의에서 한국에 불리한 결의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미국의 보호군대가 남한에 계속 주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번 에는 정치회의의 진전을 방해하는데 전력할 것으로 믿어진다(원문생략).
거듭 언급하지만, 서해상에서의 전쟁재발 가능성에 관한 한, 미국(유엔군총사령관)은 그것 잉 북한공산국쪽의 도발보다는 리승만(남한)쪽의 계획적 군사도발을 훨씬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서해5도" 또는 서해 "북방한계선" … 등의 문제의 본질을 이해 할 수 없다. 미국은 한국군 장군들에게 여러번 그 사실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시사했었 다. 그 결의는 다음과 같다.
국방성과 국무성 및 중앙정보부 공동으로 안전보장회의에 보낸 문서 (대 리승만 응징계획안)
와싱톤,
1953년 11월 2일,
극비
NSC 167/1
한국문제의 적절한 정치적 해결이 불가능할 경우의 미국의 한국에서의 행동방향
1. 남한이 정전협정의 비무장지대내의 또는 그 북쪽에 있는 중국군이나 북한군에 대해서 일방 적 군사공격행위를 감행할 경우에는 리(승만)와 그밖에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즉각 다음의 사실 을 통고할 것.
a. 미국의 육군て해군て공군은 그런 행동을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일체 지지하지 않는다.
b. 미국은 그런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일체의 군사적 또는 물자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
c. 미국의 일체의 경제원조가 즉각 중단된다.
d. 모든 유엔군 산하 부대 지휘관들은, 휘하 장병들이 그 같은 교전상태의 재발에 말려들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인정된는 일체의 조치를 취한 다.
2. 이런 조치와 동시에, 미국은 리승만으로부터 비무장지대의 안의 또는 그 북쪽에 있는 공산 군에 대해서 앞으로 절대로 일방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문서로 기술한 서약 서를 받아낸다"(이하 대략 같은 내용의 구체안들은 생략).
다른 비밀문서들에 의하면, 한국군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에 리승만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 와 체포, 한국정부해체, 한국임시정부수립 등을 치밀하게 계획해 놓고 있었다.
2) 미국의 대응조치 - "북방한계선"의 실체
리승만 대통령의 북한침공작전과 정전 파괴 계획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네 가지로 표현된 다.
、 한て미 방위조약의 체결 : 이 조약으로써 미국은 만약 북한의 군사공격이 있을 경우의 "제한적" 범위의 군사적 지원과 보호를 약속했다(한미방위조약 인준 : 1954. 1. 19).
、 평화협정 협상의 기한 설정과 협상 실패 등의 한국군 증강 종합계획 실시 : 제네바에서 의 정치회담은 쌍방의 주장 대립으로 실패했다. 미국육군대장 벤 프리트를 사절단장으로 하 는 한국군 종합 증강계획이 실시됐다(1954년 5월 6일 부터).
、 남한 전후복구て부흥을 위한 경제원조, 지원계획의 실시.
、 서해에서의 한국해군 행동규제 : 한국(남한) 군대의 육지 비무장지대 넘어서와 서해에서 북한 해안에 대한 군사적 침투て공격 등 일방적인 군사행동을 방지하는 조치로서 유엔군사령 부는 서해에서의 한국해군 행동의 북방한계를 대체로 이전의 대북한 "해상봉쇄선"(클라크라 인, 1952년 9월 27일 설치-1953년 8월 27일 철폐)으로 제한한 것으로 믿어진다. "북방"한계 선이라는 명칭 자체가 이상하다. 그것은 남쪽 군사력의 행동범위의 북쪽한계를 뜻한다. 만약 북한해군의 남방향 행동권의 한계선이라면 "북방"한계선이 아니라 북한해군에 대한 "남방" 한계선이라고 이름했어야 할 것이다.
이 선이 그후 한국해군에 의해서 이른바 "북방한계선"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된 것으로 보 인다. 이 선이 정전협정위반이라고까지 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필자로서는 단정하려 하지 않지만, 적어도 정전협정에는 전혀 합의된 바 없는 일방적 선임은 확실하다. 남북한 사이에 군사적 행위를 규제하는 효력이 있는 "선"이기 위해서는 유엔군사령부가 (1)북한군 당국에 정식통고를 해야 하고, (2)상대방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3)"쌍방"이 "공동"으로 관 리했어야 한다. 북한측은 그런 사실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고, 유엔군사령부도 해군충돌 사건 이후에도 이에 관해서 침묵을 계속하고 있다. 관련된 협정 조문을 보자.
정전협정 제5조 부칙
61. 본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이나 증보는 반드시 조인 쌍방 사령관들의 상호합의를 거쳐야 한 다.
정전협정 제2조 5항 합의로 폐지된 대북한봉쇄선(클라크라인)의 자리에 그 어떤 새로운 "선"이나 "수역"을 설정하려면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것이 협정규정이다. 일부 학자들은 유 엔군총사령관의 통보가 있은 것처럼 추정 내지 주장하고 있으나 확인된 바 없고, 유엔군사 령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북방한계선의 합법성이나 정당성을 한국측 입장에 서서 주장하 고 있는 연구가 김현기씨(한국군사학회 연구위원, 국방대학원 교수, 국제정치학 박사)도 이 점을 시인하고 있다.
참고로, 리승만 대통령이 한반도 주변 해역(동て남て서해)에 전쟁중인 1952년 1월 18일에 선 포한 소위 리승만라인 또는 "평화선(Peace Line)"의 서해부분이, 영평도-대청도-소청도의 연결선 밖으로 올라가 한て만국경의 압록강하구 서단과 접하는 직선으로 북한의 서해안을 포 위하고 있었다. 미국정부는 이 선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리 대통령(한국정부)에 그 법적 무효 성을 통고하면서 그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었다(1953년 11월 2일). 이것은 미국(유엔군사)이 소위 클라크라인을 철폐한 직후이다. 마찬가지 근거에서 북한의 일방적 선포인 서해의 "군 사경비선て구역"도 남쪽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불법으로 간주된다. 한국이 주장하는 "북방한계선" 역시 동일한 기준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불법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8. 한국측(국방부) 견해와 주장의 문제점들
이상에서 모든 가능한 방향과 근거로 검토한 결과로써 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떠오른다.
(1) 북방한계선의 법적 성격 : 클라크라인의 후신인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 합의규정에 근 거하지 않은 일방적 조치이다.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던(있는) 유엔군사령관 휘하 의 내부적 작전운용 규정의 성격이라 함이 옳다. 그 명칭의 "북방"한계선은 북한 해군의 한 국 쪽에 대한 남(南)방향 행동의 저지선, 또는 한계선이기보다는 한국(남한)해군의 북쪽 도 발행위를 예방하기 위해서 규정て운영된 내부적 한계선으로 봄이 옳다.
(2) 서해5도를 연결하는 군사적 목적의 선 또는 구역의 문제 : 서해5도는 위에서 상세히 검 토했듯이, 정전협정에서 단순히 유엔군측 통제하에 각각(이것이 중요하다) 그 위치에 존재할 뿐이지 그 섬들을 연결하는 어떤 "선"을 설정하거나 그 선의 어떤 부분에 "구역"을 설정할 수 없는 "각개산재(各個散在)"하는 "개별적 존재"이다. 따라서 소위 "북방한계선"과 그 남쪽 으로 평균10㎞의 폭을 가지는 "완충구역"이라는 것은 정전협정에 위배된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3) 그 법적 효과의 의문성 : 정전협정의 어느 일부에 대한 수정이나 증보는 협정조인 쌍방 당사자간의 공식통보와 합의가 있어야 한다. 유엔군사령부가 이 사실을 시인하지 않고 있다. 유엔군사령부는 이번 남북해군 충돌사건 이후에도 판문점 정전위원회에서나 미국 정부의 입 장에서나 "북방한계선"이 합법적이라는 공개적 발표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4) 북한은 40년간 북방한계선을 묵시적으로 인정해 왔다는 주장 : 한국정부를 대표한 국방 부대변인(차영구)의 이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진실의 왜곡으로 해석된다. 그 증거로서 국방 부가 언론기관에 제공한 "서해5도 주변해역 북한 주요 도발일지"를 보면, 북한은 1956년 이 래래 매년 정기적으로 수없이 많은 "북방한계선 침범"을 했다. 북한의 북방한계선에 대한 "도발"의 측면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국방부가 제시한 다음의 표는 결과적으로 국방부의 의도와는 반대로 북쪽이 행동으로써 "북방한계선"이라는 선의 존재에 이의제기를 거듭해 온 실적을 반증해 준다. 북한의 이같은 거듭된 행위는 법률적으로는 남한의 실제적 무력으로서 의 "권리취득시효" 주장에 대항해서 자신의 권리를 법적으로 주장하는 "소멸시효의 중단" 또는 "그 중지", 또는 남한의 권리주장에 대한 자신의 계속적인 권리행사 또는 "최고(催告)" 행위의 연속으로 보는 것이 옳다.
<표 3> 서해5도 주변해역 북한 주요 도발일지(소규모 충돌은 생략)
일시 |
내용 |
56. 11. 7
57. 5. 16
58. 4. 24
60. 8. 24
62. 12. 23
64. 3. 20
65. 10. 29
68. 6. 17
70. 6. 5
70. 7. 9
71. 1. 6
72. 2. 4
73.12.7∼12.1
74. 2. 14
75. 2. 26
75. 3. 24
75. 6. 9
76. 1. 23
81. 8. 12
81. 8. 26
83. 1. 31
85. 2. 5
91. 4. 13
93. 6. 21
96.4.19-8.27
97. 5. 29
97. 6. 5
97. 7. 2
97. 7. 4
98. 11. 24
99. 6. 7
99. 6. 15 |
서해상공서 아군기 2대 습격
북한선박, 연평도서 어선 납북
연평도서 어선 1척 납치
연평도 근해에 북한 무장선 침입, 우리 함정이 포격전 끝에 격침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함정과 교전, 우리 장병 6명 사상
백령도 근해에서 어선 2척 납북
강화 앞바다서 북한 함정, 어부 109명 납치
연평도 근해에서 어선5척(어부 44명)납북
연평도 서북방서 해군 방송선 납북(승무원 20명)
백령도 근해서 어선 5척(어부 29명) 납북
서해안서 북한경비정, 어선에 포격 1척 피침
대청도 서쪽 해상서 북한 함정 우리 어선 1척 격침, 5척은 납북
연평, 대청, 백령근해에서 북한함정 경비정 11차례 10여척 침범
백령도 서쪽 공해상에서 북한함정, 우리 어선 2척 납북
북한선박 10척, 백령도 서남해상 침범. 북한 함정 미그기도 월경
북한기 30대 백령도주변 상공 침입
미그21기 2대 백령도 상공 침범
북한기 2대 백령도 상공 침범
북한 미그21기 백령도 상공 침범
북한,미군정찰기 SR-71기에 미사일 공격
북한IL-28기 백령도 상공 비행 도주
백령도 공해상에서 어선 2척 납북
북한 경비정 1척 백령도 근해 북방한계선 침범
북한 경비정 1척 백령도 동북방 약 2.5마일 월선 침범
북한 어뢰정, 경비정 등 96년 한해동안 서해 NLL 13차례 침범
북한 경비정 1척 백령도 서북방 5.6㎞ NLL침범
북한 경비정 1척 백령도 서쪽해상 12.9㎞ NLL침범(북 함포 3발 발사)
북한 경비정 1척 백령도 서쪽해상 12.9㎞ NLL침범
북한 경비정 1척 백령도 서쪽해상 12.9㎞ NLL침범
강화 간첩선 출몰도주등 30여회 출몰
북한 경비정 9척 백령도 NLL침범
연평도 서북방 해역에서 남북 해군 포격전 |
출처 : {한겨레}, 1999년 6월 16일.
(5) "북방한계선"의 "점유의 사실상태의 보호"에 해당하느냐의 문제 : 법률적으로 점유(占有)의 사실상태가 권리로서 보호받는 경우는 (4)의 경우 이외에도 그 점유가 "폭력"이나 "은 비(隱秘)"에 의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또 그 점유에 대한 권리주장의 최고가 없이 그 상 태가 일정기간 계속된 경우이다.
클라크라인(북한해안봉쇄선)이 공개적으로 철폐된 이후에, 다시 그와 유사한 선을 공개적 으로 선포하고, 그 사실을 정식으로 적법한 경로를 통해서(즉 정전협정의 군사정전위원회 등) 상대방에게 통고하고, 그 통고내용에 대한 쌍방의 합의가 있었으면 정전협정상 합법적 이다. 즉, "은비"하지 않게 점유했으면 그 행위는 합법화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 사실은 없었다. 또 "폭력에 의하지 않은" 경우도 점유권 보호의 한 사유가 된다. 그런데 위의 표2에 서 입증되듯이, 지난 40년간 수없이, 거의 정기적으로 북한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무시하고 월경해 온 "최고"나 "소멸시효의 중단"행위를 그 때마다 남한 해군이 군사력으로 구축했다 면, "폭력에 의하지 않은 행위"로써의 "점유의 사실상태의 보호"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한 국해군이 북한 어선이나 함정의 남향 항행을 무력으로 격퇴해 왔다면 이 사실도 문제이다.
(6) 실효성의 원칙과 응고의 원칙에 의해서 수용되고 있느냐의 문제 : 국방부 최영구 대변 인은 두 원칙에 의해서 수용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 일정기간 사실상의 점유상태가 지 속되었을 때는 점유의 법적 합법성 여부를 묻지 않고 "일정한" 법률적 보호를 향유할 수 있 다. ⸂ 그런 상태가 일정기간 지속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점유의 실효성이 "응고"(solidify), 즉 굳어졌다고 한다. 위에서 살펴본 (1), (2), (3), (4)의 실제적て법적 대항들이 분명함에도 불구 하고 점유의 실효성이 "응고"됐다고 단정할 수 있을지 단정하기 어렵고, 많은 의문이 남는 다.
9. "북방한계선"은 남한(한국)의 "영해"가 아니다
이번 서해상 해군 포격전이 일어나자, 대개의 신문들과 많은 남북문제 "전문가"들, 그리고 국제정치て법 교수들이 "북방한계선"을 한국(남한)의 "영해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북한해군 함정의 "악랄한 대한민국 영해 침범"이라고까지 경솔하게 주장하고 나서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런 맹목적 애국주의와 비학문적이고 감정적인 선입관적 독단론이 이번 의 남북간 위기사태의 핵심과 진실과 전모를 이성적으로 밝혀내려는 소수의 견해를 묵살한 감이 있다. 이같은 소위 언론기관(언론인)의 작태는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닌 극우て반 공주의적 고질병이다. 그 정신적て사상적 고질병이 학문과 이론을 전업으로 한다는 학자て교 수들의 대부분 사람들의 두뇌까지 치명적으로 병들게 하고 있는 이 실상은 남북관계의 개선 과 통일노력에 심각한 저해요인으로 작용했다.
10. 남북기본합의서 제11조와 그 부속합의서 제9조 및 제10조의 해석차
우리 당국과 소위 전문가て학자들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북쪽이 "서해 북방군사한계선"의 존재를 시인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て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서 이번 서해 해군 교전 사태와 관련될 수 있는 합의는 제11조의 경계선 및 구역에 관한 내용이다.
제11조 : 남과 북의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 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이 조문의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의 해석에는 치밀하고 세 심한 협정 용어의 성격분석이 필요하다. 육지의 "군사분계선"과 그 남북을 포함한 "비무장 지대"에 대해서는 쌍방 정부와 민간학자て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이 "선"과 "수 역"의 개념과 그것이 정전협정에서 지칭하는 대상은 엄격하게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 북이 각기 마음대로 그은 어떤 선을 "군사적 경계선"이라고 하지 못하며, 한국전쟁 발생 전 날인 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