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협정

[2004/11/24][통일뉴스] 평통사 10년, 자주.평화운동도 통일운동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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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통사 창립 10주년을 맞아 통일뉴스에 실린 홍근수 상임대표 인터뷰 기사를 옮깁니다.
"평통사 10년, 자주.평화운동도 통일운동"
작성일:2004-11-23 오후 3:10:53
▶평통사 10주년을 맞이해 홍근수 상임대표와 만나 평통사의 과거.현재, 미래에 대한
전망을 들어보았다. [사진 - 통일뉴스 이현정기자]
용산기지이전협정 국회비준 저지활동 등 평화와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벌여오고 있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하 평통사, 상임대표 문규현, 홍근수)이 23일 창립 10주년을 맞이했다.
평통사는 94년 창립된 뒤 소파(SOFA, 한미주둔군지위협정)개정과 미 전폭기 F-15K도입 반대 등의 활동을 펼쳐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시켰으며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미 8군부대와 국방부 앞에서 최초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용산기지 이전협정 국회비준 저지활동과 미군기지 평택이전을 반대하는 투쟁을 평택 주민들과 함께 전개하고 있다.
평통사 홍근수 상임대표는 2003년 11월 재창립 이후 '전문화', '전국화', '대중화'란 기치를 내걸고 지역단체들을 조직해 외연을 넓히고 있으며 평화통일연구소(소장 강정구)를 설립해 전문성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평통사 회원은 약 1000여명이며 점차 조직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상근자는 약 20여명이며 상근비를 받지 않고 평통사 활동에 임하고 있다. 홍근수 상임대표는 재정확보가 최대의 문제점이라 지적하고 "모두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있지만 민족자주를 위해 평화통일운동에 만 매진하니... 사실은 존경스럽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인터뷰는 공덕동에 위치한 평통사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이현정기자]
23일 오후 6시에 개최되는 평통사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 앞서 18일, 서울 공덕동 평통사 사무실에서 미국에서 3개월간 머물다 돌아온 홍근수 상임대표를 만나 평통사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전망을 들어보았다.
일시 : 2004. 11. 18 오후 2시
장소 : 평통사 사무실
대담 : 김치관 편집국장
정리.사진 : 이현정 기자

'평화적 통일, 통일 후에도 평화'

□ 통일뉴스 : 평통사는 어떻게 출발하게 됐나?
■ 홍근수 : 94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그 전에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연대회의'(평통연)였으며 약 2년 간 존속했다. 이후 평화운동체가 합쳐져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평통연을 해체하고 사람들과 힘을 합쳐 평통사를 설립했다. 공식창립일은 6월경이다.  
□ 94년 당시에는 평화운동이 널리 퍼지지 않았을 텐데.
■ 내다보고 평화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손병선 씨와 김낙중 씨, 김진균 교수가 평화문제연구소를 운영했는데, 김낙중 씨가 고정간첩으로 구속되면서 평화문제연구소 문제가 흐지부지 됐다. 이때 김상근 목사가 평화운동단체가 자꾸 난립할 필요가 있으냐 하면서 평화문제연구소와의 모임 통합을 제안해왔다. 자기들이 한 300명되는데 통합하는 게 어떠냐 해서 10개월 가량 통합모임을 했다. 이때 평통연이 약 2-3백명 가량 됐다. 그러나 10개월 간 논의하는 동안 사람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 94년 경 평통사를 시작할 때도 기치를 평화운동으로 설정했는가?
■ 통일된 뒤에도 평화를 계속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평화운동을 기치로 설정했다. 평화적인 통일을 이뤄야 할 뿐만 아니라 통일된 다음에도 평화는 계속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 설립당시 어려운 점은 없었는가?
■ 어려움 점은 없었다. 조직건설을 논의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당시 평화문제연구소는 준비모임 상태였고 우리는 기존 조직체로 활동했었다. 이를. 1:1로 통합한다는 게 내 목적이었다.
▶"평화는 통일된 뒤에도 추구할 과제"
[사진 - 통일뉴스 이현정기자]
□ 이후 자통협도 만들어졌는데.
■ 범민련이 약화된 뒤 통일운동체를 통합할 필요에 의해 99년 자통협이 생겨났다. 자통협은 평통사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우린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주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전교조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자통협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94년 설립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전개했는가.
■ 주로 평화와 통일을 주제로 회지를 내고 민족자주를 쟁취를 위한 활동을 벌였다. 본격적인 활동은 작년 이맘때 전문화, 전국화, 대중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평통사를 재창립할 당시 시작됐다. 이 때부터 회원들이 많아졌다. 외연이 넓어진 셈이다.
94년부터 98년 사이 특색 있었던 사업은 회지 발간과 지역운동단체 조직이었다. 주로 인식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회지를 발간했으며 익산지역 단체들을 조직했다. 또한 소파개정국민행동, 자통협과 같이 열린시민공원에서 정기행사인 반미연대 집회를 진행했다. 지금 이 집회가 60회를 넘었다.
□ 자통협과 함께한 99년 이후 특별히 기억나는 활동은?
■ 소파개정운동이다. 우리의 저항이 거세니 정부도 결국은 소파협정을 개정했다. 그러나 이는 겉치레 정도의 개정이었다. 이때 평통사 김판태 국장이 할복도 했다. 당시 국회는 거수기에 불과했으며 당시 김 국장도 이런 국회의원들을 보다가 할복을 감행했다.
이후 평통사는 주로 미제무기 구입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으며 미 8군과 국방부 앞에서 처음으로 시위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때 평통사가 했던 시위 중에서 F-15K문제가 이슈화 됐다.
매향리 또한 그 자체적으로 성공적인 투쟁이었다. 비록 미 공군 연습장이 백두대간으로 옮겨졌으나 매향리를 세계적으로 이슈화시켰다. 여중생 사건도 큰 사건이었는데 당시 여중생 범대위를 구성했던 이들 중에는 미군을 지지하는 그룹도 있어 미군철수를 공식적인 입장으로 다룰 상황이 아니었다.
전문화, 전국화, 대중화를 기치로 재창립
□ 재창립 된 작년(2003년) 11월 이후 평통사는 어떻게 변화됐는가?
■ 통일평화운동 선각자 몇 사람이 운동을 주도하다가 점점 대중화, 전국화 되면서 인식의 범위가 넓어졌다. 전국화의 경우 자통협 해소도 하나의 여건이 됐다. 재창립 이후 지방 여론이 급속도로 모아졌는데 안동의 경우 우리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평통사에 들어왔으며 광주, 부천, 인천 등은 본래 노동운동이 활발했는데 통일과 평화운동이 절실하다고 판단해 우리와 손을 잡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 지역 단체들은 평통사 소속 단체지만 노동운동 단체만이 갖고 있는 특색도 갖고 있다.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평통사 상근자들. [사진 - 통일뉴스 이현정기자]
□ 현재 새롭게 추진되고 있는 사업은?
■ 용산미군기지 평택이전 반대 운동을 평택에서 우리가 주도하다시피 하고 있다. 미군기지확장반대 사업이 평통사 2기에 들어 가장 중요한 사업인데, 현재 당국은 11차 포타(FOTA,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에서 용산기지 이전협정에 이미 합의를 본 뒤 가서명까지 했고 국회비준만을 남겨뒀다. 용산협정 국회통과는 시간문제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외향적으로 보면 우리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군기지 이전지역 농민들이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정부도 쉽게 협정안을 통과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주한미군의 동북아지역군화는 한미동맹의 기본적인 내용에 비춰봐도 잘못된 것이다. 평택은 해안가라 중국과 가깝다.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는 작전으로 평택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또한 미군기지가 있는 동두천, 용산 등에 북한의 미사일이 조준되어 있는데 미군기지가 만약 평택으로 이전한다면 북한도 미사일을 재조준해야 할 것이다. 재조준으로 인한 공백기동안 미국이 선제공격을 할 지도 모른다. 우린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
□ 올해 연구소를 새로 만들었는데.
■ 연구소 설립문제는 평통사가 내건 기치 중 전문화와 관계되는 것이다. 강정구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한미관계연구모임이 있는데 이 모임이 아마 평화통일연구소(소장 강정구)로 흡수될 것 같다.  
□ 평화통일연구소와 평통사의 미군문제팀, 평화군축팀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 연구소가 주로 이론적 베이스를 만들어주고 팀에서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자주, 평화운동도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
□ 평통사가 이름과 걸맞지 않게 통일관련 활동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 통일운동에서 제일 시급한 것은 미국으로부터 자주권을 되찾는 일이다. 통일문제에 대해선 조금 소홀해 보일지 모르나 우린 장기적으로 보고 있다. 평화와 자주도 모두 통일과 관련된 것이다. 통일국가는 자주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한다. 때문에 멀리 내다보면 자주, 평화운동도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이다.
▶정치와 통일운동에 있어  '원칙준수'를 강조한 홍근수 상임대표.
 [사진 - 통일뉴스 이현정기자]
□ 2000년 이후 평통사가 남북민간교류 행사에 참석치 않아 통일을 논외로 한다는 이미지가 더욱 굳어졌는데.
■ 아마 그럴 것이다. 당시 자통협이 통일연대에 가입했었는데 통일연대가 민화협과 7개 종단을 견인하지 못하고 오히려 견인 당하더라. 우린 처음부터 어용단체하고는 같이 연합하지 못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자통협이 해체된 뒤 평통사가 통일연대에 가입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린 우리 자체에 충실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가입계획은 당분간 없다. 그러나 우리 실력이 갖춰지고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면 통일연대에 가입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 어용단체라는 말씀도 했는데, 노무현 정부에 비판적 입장인가?
■ 문동환 목사를 이번에 만났는데 노무현 반대는 있을 수 없다. 노무현을 반대하면 이회창이 나온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나 나는 이회창이나 노무현이나 김대중이나 누가 대통령을 하던지 간에 우리 원칙에 어긋나면 비판을 하고 반대를 했다.
□ 지난 여중생범대위 촛불집회에서 목사님이 노무현 정부에 대해 강력한 성토를 한 뒤 일부 시민들이 너무한 것 아니냐고 비판도 했었는데.
■ 당시 촛불집회에는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노사모도 있었으니 비판할 만 하다.
"보수기독인은 사이비, 기독교는 분열되지 않았다"
□ 부시 재선 이후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리라고 생각하는가?
■ 민주당이냐 공화당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민주당이 냉전적 사고방식을 갖고 전쟁을 일으켰을 때도 있었고 공화당의 경우 전쟁을 끝내고 중국과 수교를 맺은 적도 있다. 클린턴 행정부만 하더라도 민주당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하려 했으니까...
부시가 현행전쟁범이라면 케리는 현행전쟁범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다. 이 차이밖에 없다. 케리는 해외미군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보고 있고 한국문제에 대해서도 양자회담을 주장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힘으로 굴복시키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평화.통일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이 중앙일보에 개재된 친북사이트 폐쇄 관련 기사를
들춰보며 토론을 벌이고 있다.[사진 - 통일뉴스 이현정기자]
□ 북한인권법 미 상하원 통과도 그 한 징표라 할 수 있을텐데, 직접 본 미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 북한자유법은 김정일 정권 붕괴작전이었다. 인권법에서는 김정일 정권 붕괴 작전 조항이 빠지긴 했지만 일각에서는 개정을 해야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북한인권을 재단할 수 없다. 고문기술자와 무기를 수출해 폭력을 조장하고 있는 미국은 정의와 인권을 말할 상황이 아니며 인권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 북한의 개혁방향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 솔직히 말해 북한은 잘 모른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미국의 군사전략에 굴복해 모두 오염됐는데 북한만이라도 사회주의 정권을 지켰으면 한다.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국가가 하나라도 있는 것이 대안적인 의미에서도 좋고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다.
□ 목사로서는 사회적 발언 강도가 센 편인데, 필화사건도 많이 겪은 것으로 안다.
■ 지금까지 설교집 6권, 논설집 7권 정도를 내면서 필화도 많이 겪었다. 특히 지난 주 뉴욕에서도 미 대통령 선거에 대해 언급하며 설교를 했는데 설교가 끝난 뒤 어떤 사람이 오더니 정치를 하시지 왜 설교를 하느냐고 항의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인간은 정치적이라고 답했다.
□ 예전 TV 토론에서 목사님이 주체사상 옹호 발언을 했을 때도 충격적이었는데.
■ 당시 PD가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밤늦게 하는 프로라 사람들이 끄고 잘까봐 생동감있게 발언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PD는 다 책임진다 해놓고 결국 책임지지 못했다(웃음).
그래도 다수 젊은 사람들이 TV를 보면서 내 발언에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생방송으로 직접 나가는 바람에 운동을 10년 당겼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있다. 공산당 당원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국민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주체사상 연구와 김정일 만세를 한다 해도 정부가 규제할 수는 없으며 이는 국민들이 자율적으로 조정할 일이다.
□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등 보수 기독인들의 보안법 폐지반대 집회로 한국교회가 보수 대 진보로 양분됐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
■ 기독교인이 있다고 해서 다 기독교회는 아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는 평화적인 존재이며 때문에 전쟁을 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전쟁을 하는 미국을 찬성하고 평화 운동하는 사람들을 좌경으로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비 기독교인이다.
기독교가 보수와 진보로 분리된 것 같지만 예수를 옳게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들을 다 사이비 기독교인이라고 본다면 결코 기독교는 갈라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갈라질 수 없다.
평통사, 재정확보가 관건
□ 현재 평통사 상근자와 회원은 몇 명인가?
■ 회원은 약 800여명이다. 보통 1000명이라 얘기한다. 목표는 1만 명으로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게 단기간에 되겠는가. 목표에는 못 미치더라도 앞으로 중요한 지역에 들어가 명실상부한 전국 조직을 만들려 한다. 상근자는 약 20여명 가량 된다. 부천과 인천에 상근자가 몇 명 있고 서울본부에 13명이 있다. 현재 1명은 평택에 파견중이다.
□ 재정상황은 어떠한가?
■ 상근자들이 자원해서 일하고 있다. 매달 15만원 정도의 활동비를 마련해 주려 하지만 이 마저도 집행을 못하고 있다. 회원들의 회비로 인건비를 충당하기 때문에 회원이 많아지면 재정문제는 잘 해결될 것이다. 그간 재정사업은 한 번도 없었다. 후원회도 10년 만에 처음으로 개최하는 것이다.
상근 간부들이 50대가 다 돼가고 애들도 커서 아무래도 돈이 필요하다. 이런 문제가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재정적인 안정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 향린교회를 정년퇴임하고 단체 활동가들과 상근해보니 어떤가?
■ 일이란 게 끝이 없다. 젊은 분들이 존경스럽다. 모두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있지만 민족자주를 위해 평화통일운동에 만 매진하니... 사실은 존경스럽다. 활동가들과 일하다 보면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건강도 좋은 편이다. 산에도 가야하는데 매일 기자회견이 있고 저녁에 강연하게 되면 사전에 원고도 만들어야 하니까 시간에 쫓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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