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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7] 평화누리통일누리:::96호::: [사람] '전쟁'을 입에 담는 자들이 들어야 할 통곡 - 서영선 강화유족회 회장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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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

 

‘전쟁’을 입에 담는 자들이 들어야 할 통곡

-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유족회 서영선 회장 -

 

바야흐로 6월, 호국보훈의 달.

게다가 올해는 한국전쟁 60주년이다. <포화속으로> <로드넘버원> <전우> 등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총 잡은 군인이 주인공인 드라마, 영화가 한창이다. 그 와중에 피난가다가 미군에 학살당한 노근리 주민들이 주인공인 <작은 연못>도 재개봉 되었단다. 군인의 눈으로 본 전쟁과 민간인의 눈으로 본 전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꽃처럼 자라나던 12살 소녀가 겪은 전쟁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입을 앙 다물게 하는 악몽이다.

며칠 동안 4대강 반대 기도회에 저녁 미사, 촛불 유세장을 쫓아 다니느라 정신없이 바쁘셨다는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유족회 서영선 회장(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을 명동성당 앞 카페에서 만났다.

진행  :  김강연 인천평통사 교육부장,  사진·정리  :  오미정 홍보팀장

 

 

● 그러니까 전쟁당시 강화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1·4후퇴 직후였다. 치안대 역할 하던 사람들 27명이 부역 나갔다가 돌아오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학살한 것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인정된 사람만 332명이고, 한성대 김귀옥 교수는 1,3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부역 갔다 돌아오던 사람들을 해변에서 워낙 많이 죽였다. 갑곶 월곶 등. 해변 학살지가 7~8군데이고 교동에서도 학살지가 6~7군데 된다. 깜깜한 밤에 바닷가이고 하니, 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산이포같은 경우는 배에 불붙여 죽였다고 하고, 돌모루같은 데는 가해자들이 189명을 생포해서 강화경찰서에 구금했다가 시골 7일장에 맞춰 조리를 돌렸다. 등 뒤에 ‘나는 무슨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종이를 붙이고... 그 광경을 우리 고모가 직접 봤다. 그 사람들이 객지에 나가서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몰골이 말이 아니더란다. 동상 걸린 맨발에, 설령 신발이 있다고 해도 너덜너덜하고.. 최중석(당시, 향토방위특공대장으로 학살자 중 1인)은 자기는 학살한 적 없다고 하지만, 우리 고모처럼 본 사람 많다. 확인된 332명이라도 위령비 세워 위령제 지내면 그동안 진상규명한다고 고생한 게 보람 있을 것 같다. 이번 선거 군수 당선자가 이미 예전부터 위령비 세우겠다고 했으니 기대해 봐야지. 학살자들과 그 하수인들은 국가 유공자라면서 연금 받아먹고 있는데, 피해자들은 위령비도 못 세우니...

 

● 선생님 가족 분들도 그때 학살당하신 건가요?

내가 12살이었다. 위에 언니가 14살, 동생들이 9살, 6살, 4살, 1살 그랬다. 경성사범을 나와 장학사를 지내던 아버지는 전쟁 발발과 9·28 수복 사이에 몸을 피신한 상태였고, 집에는 어머니와 우리 6남매만 있었다. 치안대들이 몇 차례 집을 드나들면서 겁을 주고 협박을 해서 우리들은 대문 밖에도 나다니지 못했다.

그런데, 12월 말 어느 날 밤 복면한 3명이 집에 들어와 젖먹이 동생을 업은 어머니를 끌고 갔다. 복면을 했다는 건 우리가 얼굴 아는 동네사람이라는 거다. 진화위에서 증언 받고 할때 학살자 중 한 사람이 ‘한동네서 살아서 나 알거에요’한 적도 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어리고 무서워서 어머니 끌려간 날짜도 정확히 기억 못하고, 그 사람들 이름도 기억해 두지 못해서, 어머니가 정확히 어디서 언제 학살당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어머니와 같이 끌려간 젖먹이 동생을 그날 밤에 집으로 데려 와서 며칠 쯤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 사는 신택균이라는 사람이 너희들이 어떻게 애기를 키우냐하면서 어머니한테 애기를 데려다 주라고 해서 같이 경찰서에 갔다. 어머니는 그 사이 양조장에 갇혀 있다가 곡물검사소를 거쳐 경찰서로 끌려가 있었다. 그 신택균이 나를 떼어놓고 애기만 데려가는데, 그때 내가 “우리 엄마 보고 갈래요” 그 소리를 못 한게 한이 되었다. 어머니가 잡혀 가던 날 “엄마”하고 불러보지 못한 것도 한이다. 시신이라도 수습했다면 이리도 한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 양조장이 지금도 있어.

 

● 그러면 그때 경찰서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신 건가요?

윤성만이라는 사람이 말하길 어머니가 경찰서에서 돌아가신 것 같다고 하더라. 윤성만이 경찰서에 가 보니 200여명이 죽어 있었다고 했고, 경찰서 앞마당이 군화 목까지 피가 차오를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또 다른 얘기로는 당시에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던 사람 60명 쯤 중에 여자가 15명쯤 있었고. 1월 초쯤에 갇혔던 사람들을 갑곶리 선착장과 옥계 갯벌에 끌고가 죽였다고도 한다.  

 

● 그러면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신 건가요? 서회장님도 죽을 고비를 겪으셨다면서요?

어머니가 곡물검사소에 있을 때 (문틈으로 골목길에 있는) 우리 남동생에게 “집에 꼭 있어라” 당부했다고 한다. 그게 마지막 유언인 셈인데, 우리 바보(남매)들이 사람들이 막 피난간다고 하니까 시골에 있는 큰어머니댁으로  간 거야. 그 난리 통에 큰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반길 리 없고, “남동생만 두고 너희(자매)들은 읍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할머니가 우리를 데려다 준다고 나왔는데, 치안대 놈들에게 잡힌 거야. 할머니는 바로 총으로 학살당했고, 우리는 지서로 끌려갔는데, 한 30명이 잡혀 왔더라. 우리만 애들이고.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너무나 슬픈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면서 ‘이제 너희들도 죽겠구나’ 했다. 그 눈이 잊혀지지 않아... 하루종일 지서 바닥에 무릎 꿇려 있다가 저녁에 끌려 나갔는데, 석모도 가는 배를 타는 외포리 포구였다. 배만 바로 왔다면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배표 파는 아저씨가 아버지 친구였고, 그 아저씨 아들이 어거지로 (치안대)소년단을 하던 아는 오빠였다. 그 오빠가 밖에서 술렁술렁하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우리들이 있는 거야. 그 아저씨랑 오빠가 ‘우리가 아는 아이들이다’ 하면서 우리 넷을 집안으로 들여 살아났다. 잡혀있던 나머지 스물 몇 명은 어디 구석에 가서 죽임을 당했다. 큰 집의 육촌 언니가 아침에 나간 할머니는 죽임을 당했지, 우리들은 소식 없지 하니 ‘애들도 죽었구나.’ 하며 밤새 잠도 못자고 있었는데, 그 밤에 우리가 도망나와 똑똑 문을 두드리니까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는지, 그 언니가 신도 못 신고 달려 나왔다. 남동생도 지금은 세상에 없고, 6살짜리 동생도 당시에 못 먹어 죽고 지금은 딸만 셋 남았다.

● 가해자였던 사람들을 찾아내고, 증언을 받고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내가 10년 20년 전 것은 막 까먹는데, 그때 일은 하나도 안 잊어버린다. 큰언니와 내가 친척집을 전전하고 머슴처럼 일하고 밑에 동생은 고아원에 가고, 자라는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17살이 되어 서울로 도망 왔다. 잘사는 사촌 언니 도움으로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자매원이라는 곳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배웠다.

그러다가 19살이 되어 강화도를 갔어. 우리 동네를 가니 비석이 하나 떡 있었다. 특공대(치안대) 비석이더라구. 그래서 비석 옆 방앗간 집 주인보고 ‘저 비석이 뭐냐’ 물었더니 특공대 대장이 세운 비석인데, 사람 많이 죽인놈이라고 욕을 하더라. 그때만 해도 얼마나 무서운 때냐. 그 특공대 대장 사는 데를 물어물어 가니 답십리였다. 그 집을 찾아가서 겨우 이름을 알아놓았다. 최중석이라고..그리고 나서 93년에 처음으로 찾아가 봤지. 두 딸들 시집보내고 나니 내가 좀 활동할 만해서 그 집을 계속 찾아갔지만, 죽을 때까지 (학살을) 부인하였다.

그러다가 강화유족회 활동이 [말]지에 보도되고 하다가 2000년에 뉴스를 보니 강정구 교수 등이 ‘한국전쟁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진상규명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연락해서 고양, 강화, 문경 유족들이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활동을 같이 시작하게 되었다. 5년 동안 국회 앞에서 농성하고 고생 많았다. 2005년에 겨우겨우 법이 만들어져서 통과되기는 했는데, 가해자들 처벌 조항이 빠져버렸다. 가해자들 데려다가 조사해도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날짜도 안 가르쳐 주면서 부인한다. 더군다나 지금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 가해자들이 자기네 명예회복 해 달라고 여기저기 진정서내고 난리다. 중앙일보도 크게 다뤄주고. 가서 항의하기도 했는데 진화위도 없어지고 예산도 없어지는 마당이라 아직 할 일이 많다.

그런데, 왜 우리 어머니를 잡아갔을까? 진화위에서 진상조사 할 때 보니, 당시 치안대 일을 하던 한 선생이 “너희 아버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다”라 하더라. 그러고 보니 장학사였던 아버지가 선생들 발령 내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미움을 사서 빨갱이로 고발당한 게 아닐까 한다.  

● 전국유족회 상임대표로도 활동하고 계신데 강화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런 일들이 많았지요?

전국적으로 유족회 단체만 76개다. 아직 위령제를 못해본 데도 있다. 전국적으로 민간인 학살피해자가 백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유족만 3백만명이 넘을 것 아니냐. 그런데 안 나선다. (빨갱이 가족이라고) 얼마나 무서움에 떨어 왔고, 핍박을 당해 왔으면 피학살자 유족이라고 나서질 못하나? 공부를 할 수 있었어? 어디가 취직을 할 수 있었어? 공무원이 될 수 있었어? 앞으로도 피해보상법 제정하려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해. 국가에서 인정받고, 국민의 정서도 바꿔야 한다. 이게 후손들한테 넘어가면 된다.

 

● 그런데, 시는 언제부터 쓰신 거에요?  

<하얀 눈 위의 첫 발자국> <가깝고도 먼 길> <푸른 초원> 세 권을 냈지. 어릴적 우리 집이 나름 여유가 있던 집이라 양철지붕에 정원에 꽃도 있고, 빨간 장미 울타리도 있던 집이어서 그런 게 잠재적으로 남아 있었나 봐. 12살에 전쟁을 그리 혹독하게 겪고 몇 십년을 그대로 살다가 등단한 게 1996년이야. 그때가 첫 손자 봤을 때지. 그 전에도 어머니 생각나면 뭘 써놓고 했는데, 손자를 보면서 어머니 생각 더 났다. ‘우리 어머니도 이렇게 나를 낳아서 키웠구나’ 손자들 키우면서 저녁 노을 보면 그렇게 어머니가 생각났어. 그런 정서가 시로 표출되어 나온 것 같다.

시를 안 썼다면, 지면에 호소하지 않았다면 내가 미쳤을 것 같다. 잠을 자다가 깨면 잠이 안 와. 그 순간부터 어머니 잡혀가는 모습, 그때 왜 나는 엄마를 부르지 못했나, 밥이라도 싸다주지 못했나, 누구를 찾아가지 못했나하는 생각이 막 나면서 속에서 열불이 나는 거야. 그러다가 ‘아니다.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나는 병들면 안 된다. 나는 자야 한다.’ 하면서 자는 거지. 천식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 늙어서 여기저기 아프기는 하지만, 잘 관리를 해서 할 일 다 하고 죽을 꺼다.

 

● 젊은 세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요?

사실, 남북이 모두 피해자 아니냐. 기막힌 일이 얼마나 많았냐. 한국의 청년들이 역사적인 인식을 잘 가져야 한다. 한국전쟁 학살은 교과서에도 안 나온다. 전쟁 역사를 올바로 알아서 앞으로는 절대 전쟁이 없는 세상 되어야 한다. 나도 손자들이 있어. 우리같은 세상 살지 않도록 절실히 바란다. 지도자를 잘 뽑고, 동족끼리 평화통일해서 평화스런 나라에서 후손들이 살아야 한다. 앞으로 청년, 지식층들이 활발히 움직여서 통일을 이루어야 해.

그러니까 자기들도 할 일 많으니까 건강관리 잘 해라.

평통사 사람들 보면 너무 똑똑한 사람들만 모였다. 어쩌면 그렇게 미군문제 연구하고 미국까지 가서 발표하고 그러냐. ‘이 사람들이 나중에 평화통일 이룰 사람들이구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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