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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8/7~8] 청년,청소년 모임 제주기행 3탄 - 4.3 항쟁 유적지를 중심으로

평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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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항쟁 유적지를 중심으로~
 
공항에서의 만남과 아침 식사 (8월 7일-토요일)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제주도로 떠나려는 우리가 아쉬워서인지, 7일,토요일 새벽은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댔다. 6시에 공항에 도착해서 서둘러 발권을 마치고 6시 반 비행기에 올랐다. 몇몇은 처음 타보는 비행기로 설레기도 하고 몇몇은 멀미로 고통스러워하며 8시 경 제주도에 도착했다. 반가운 배팀과 합류를 하고 빈속을 달래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한 식당에는 맛집을 증명하듯 스타들의 싸인으로 가득했다. 청년과 청소년이 한자리에 모인 건 처음이기에 우리는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서로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서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인사를 하며 아침식사를 기다렸다.
메뉴판에는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의 음식들이 있었다. 그중 보말국, 갈치국, 오징어볶음 등을 먹게 되었다. 보말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역국으로 보였지만 안에 귀여운(수진이 표현) 올갱이, 다슬기 같은 것들이 들어있어 재밌고 맛이 참 시원했다.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올라 우리는 평화공원으로 갔다.
평화공원
평화공원에는 평화박물관이 있는데 주로 제주 4.3항쟁에 관한 기록과 전시물이 있었다. 도착해서 10시 20분경 먼저 <제주 4.3의 기억>이라는 영상을 시청했다.
우리는 영상과 안내하시는 분의 얘기를 듣고 끔찍한 학살에 관해 알게 되었다. 학살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관광학살, 총알이 아까워 여러 명을 묶어놓고 몇몇만 총살한 뒤 한꺼번에 물가로 떨어트렸다는 집단학살, 죄가 있음을 자백하면 용서해준다고 얘기하고 그들을 모아 학살했다는 자수학살. 평화와 인권의 성지로 불리고 또한 홍보하는 제주도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너무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아픈 역사가 있지 않으려면 더 이상 제주도가 전쟁이나 군사요충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4,3 평화 박물관에서 영상물을 보고 있는 청년, 청소년들
 
굴 모양의 박물관 입구를 지나 백비와 비석을 보았고 해방 직전 제주도를 요새화하기 위해 만든 알뜨르(뜻은 아래뜰이라고 한다)비행장을 보았다. 그리고 4.3항쟁이 일어나게 된 계기를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함께 듣게 되었다. 3.1발포사건이라고 해서 6명이 사상된 이후 사람들의 반란으로 제주도를 로 단정하고 서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1948년 4월 28일 평화협상으로 마무리 되려던 때에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5.10선거 반대로 제주4.3항쟁의 신호탄을 알리게 되었다.
안내자 분께 왜 제주 4.3항쟁을 4.3사건이라고 얘기하시는지 여쭤보았다. 안내자 분께서는 발발원인이 확실치 않아서 그렇다고 하셨다. 60년이 지난 이 항쟁이 아직 발발원인도 규명되지 못하다니, 제주도민의 고통이 조금씩 느껴졌다.
제주도에는 돌담이 참 많다. 돌담에 관련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는데, 많은 이유는 무장대의 공격을 막으려고 토벌대가 주민들을 시켜 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예쁘다고 바라보는 돌담에 얽힌 아픈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제주에 가기 전 자료를 조사하고 영상 관람 후 전시관을 둘러보니 이해가 쉬었다. 제일 기억에 많이 남은 것은 하얀 모형으로 만든 학살당하는 모습의 조형물을 봤을 때였다. 그 모습이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팠다. 또한 다랑쉬굴을 재연해 놓은 곳이 있었는데 그 굴은 사람들이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숨어있던 곳으로 여기서 살아남은 한명은 그 죽음과 고통에 대해서 30년간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제주도의 아픔을 치료받지 못한 채 침묵 속에서 버텼어야했던 곳이다.
50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예비검속으로 정신적 피해, 후유증, 400년간이나 지속되었던 마을의 공동체 생활 파괴. 잃어버린 마을만 84곳에 이른다고 한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평화의 섬으로 선포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이 땅에 전쟁의 피해, 무자비한 학살, 아픔 등을 다시 겪을 수 없다. 박물관을 나오며 이런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해군기지 건설을 꼭 막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3평화기념관
 
올레길
12시 반경 우리는 올레길 7코스를 걷게 되었다.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 천혜의 절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그 중 많은 굴들 또한 볼 수 있었는데 가슴이 조금 먹먹했다. 올레꾼이 제일 좋아한다는 수봉로도 갈 수 있었다. 걷다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리막길과 시원한 바람이 참 좋았다.
대평 포구 (8월 8일 - 일요일)
기행 둘째날, 본격적으로 4.3 항쟁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오늘 기행에는 민주노동당에서 일하고 있는 김국상님께서 해설을 맡아주셨다.
우리는 먼저 대평 포구로 갔다. 경치가 예쁘고 좋았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제주도에서 가장 시원하다는-영화감독 장선호씨가 1년 가까이 해군기지 반대를 위해 천막시위를 한다고 들었다.

화순항
다음으로 화순항에 갔다. 1937년에 생겼다는 이곳은 6.25당시 대형선박이 대기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거북 모양의 산새 같은 곳이 있었는데 거북의 머리 모양 부분을 용머리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남자의 성기와 비슷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설명을 하자 이야기를 듣던 청년 청소년 회원들과 미주 지역에서 KEEP 참가자로 온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어 한다.
해군기지는 예전 1987년부터 제주와 기나긴 인연을 맺고 있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 기지 건설에 반대가 심해서 다른 마을로 옮겨졌다가 또 그 반대로 현재 강정마을에 기지를 건설하겠다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지건설을 막는 게 어려운 일일수도 있겠지만 주민들과 우리들이 힘을 합쳐 반대하는 의견을 제기하면 어려운 일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이 화순 훈련장은 우리나라에 반환됐다고 한다. 미군의 군사 재배치 전략에 따라 맺게 된 LPP로 반환됐는데 지금은 한국 해병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훈련하고 있는 군인들이 왠지 딱해 보이기도 했다.
천연양학이라고, 괌과 하와이 경우를 얘기하며 섬이라는 공간은 훈련이나 전쟁을 하기에 아주 좋은-군인들이 좋아하는-곳이라고 했다. 일제시대부터 끊임없이 제주도가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가 되었다.

산방산의 연대
연대란 연기를 피워 적에게 알리는 곳이라고 해서 조선시대도 이 연대가 있었다고 헸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지만 높은 곳에 있어서 올라갔을 때 아주 경치가 좋고 제주도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앞에 마라도가 선명하게 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 지역은 바람이 특히 많은 곳이어서 더위에 지친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주변에 레이더가 있었는데 1992년까지 사용된 이 레이더는 오키나와까지 정찰이 가능하다고 한다.
 
산방산 연대에 올라 설명을 듣고 있다
 

대정고을
대정마을은 좌익이 많아서 민란이 많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우리가 간 곳은 장두정신을 기리는 기념비 앞이다. 이곳 대정마을 장두정신의 유래는 이렇다.
외래문물이 많이 들어오던 1901, 카톨릭 신자들이 좌익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이 좌익들을 우리나라 군대의 힘으로는 제압할 수 없자 프랑스 군대가 직접 좌익들을 진압하게 된다. 그리고 그 책임을 당시 좌익들에게 물었을 때 대표 3-삼의사-가 죽음으로써 책임을 졌다고 하는데 이런 대표들의 정신을 대정 장두정신이라고 하여 기린다고 하였다. 이렇게 책임지는 정신을 우리가 본받을 필요가 있겠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다. 이 중 한 명을 중심으로 만든 영화가 <이재수의 난>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마을이 4.3사건 당시 반란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빨치산의 대장인 김달삼 역시 이 동네 출신이라고 한다. 대정 마을의 뜻이 큰 대, 고요할 정을 쓴다고 하는데 바람이 하도 많아서 이런 이름으로 지어 바람을 좀 잦아들게 하려한 것 같다는 말도 보태주었다.

점심
기다리던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다. 모슬포의 최남단식당이라는 곳에서 회덮밥, 초밥, 뚝배기, 갈치구이 등을 식단으로 식사를 했다. 제주도 인심이 좋아서 그런가 팥빙수를 후식으로 주셔서 우리 모두가 환호를 했다. 정말 즐거웠다.

비행장 격납고
식사를 마치고 간 곳은 비행장 격납고였다. 1940년대 일본군이 만든 이 격납고는 현재에는 감자를 보관하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전쟁이 일어나기 전 좌익이라고 몰아세워 무차별로 검속하여 죽였던 예비검속. 이것으로 인해 제주 도민들은 큰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그 중 섯알오름에서의 주민학살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주민들을 학살하고 그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을 듣게 되었는데, 당시에 학살당한 주민들의 가족들은 군통제로 시신을 바로 수습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무려 7년이 지난 후에야 수습할 수 있었고, 때문에 그곳을 발견했을 때는 몇 조각의 뼈와 검은 물뿐이었다고 한다. 시신이 훼손돼 누가 누구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 없었고 그런 뜻에서 묘를 만들 때 100여명의 조상에 손자가 한 명이라는 뜻으로 백조일손지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섯알오름 터
 
글 · 정리 이주은(청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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